메르스로 드러난 시민의식 '실종'…"공동체 의식 필요"

자가격리자 무단이탈 잇달아…의료진 낙인·따돌림도 문제
"정부 대응·제도 문제 있지만 시민들도 관심·배려 범위 넓혀야"

(사진=연합뉴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가 한 달 가까이 지속하면서 공동체를 배려하는 시민의식 부족으로 불안감을 높이는 행태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별 증상이 없고 답답하다는 이유로 자가격리자들이 거주지를 무단으로 이탈하는 사례, 일선에서 메르스 예방과 치료에 구슬땀을 흘리는 의료진과 그 자녀를 따돌리는 행위 등은 사태 극복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에 이르는 사태의 근본 원인은 정부의 폐쇄적 태도와 부실한 방역체계에 있지만 당장 불안을 마주해야 하는 시민들 역시 성숙한 공동체 의식으로 위기를 슬기롭게 넘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자택격리자가 집 나와 골프…의료진·격리자는 '메르스 낙인'

메르스와 관련해 격리 조치된 이들은 18일 오전 기준으로 6천729명에 이른다. 보건당국이 일거수일투족을 빈틈없이 파악하고 통제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점을 이용해 일부는 당국 지시를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이달 2일 서울 강남에서 자택격리된 한 50대 여성이 지방에 내려가 골프를 친 사실이 알려져 한때 논란이 일었다. 당국의 관리체계가 허술하다는 비판과 함께 성숙하지 못한 시민의식의 발로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다.

11일에는 메르스 확진 환자와 접촉 사실이 확인돼 자택격리 통보받은 한 50대 여성이 외국 여행을 가겠다고 고집해 보건당국과 경찰의 진땀을 빼놓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
일선 현장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의료인들은 자신을 마치 메르스 감염자라도 되는 듯 보는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한다.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병원에 근무한다는 이유만으로 이웃들로부터 따돌림당하는 일은 다반사고, 심지어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당분간 아이를 등교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전화까지 받은 사례도 있다.

일부 지역에서 시민들이 뜻을 모아 의료진을 격려하는 현수막을 병원에 걸고 응원 선물을 보내는 등 미담이 등장하는 상황이 이들에게는 그나마 위안이다.

◇ "'나만의 결정' 아냐…관심·배려 경계 넓혀야"

사회학계는 메르스 사태가 이처럼 악화한 근본 요인이 정부의 태도와 방역체계 문제라는 데 대부분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정부의 책임을 묻는 일과 더불어 시민들도 스스로 의식 변화를 통해 사태 극복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과거에는 사고가 나면 시민들이 정부나 지도층만 비판하면 됐지만 메르스 사태에는 시민들끼리 서로 비난하는 현상이 발견된다"며 "시민의식을 평가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자가격리자가 골프를 치러 간 사례 등은 어떤 결정이 '나만의 결정'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그간 우리는 배려의 대상을 가족이나 친구 등에 한정했지만 이제는 그 경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시민에게까지 배려의 범위를 넓혀야 함을 보여준 계기"라고 강조했다.

개개인이 고립된 현대사회의 특성이 메르스에 대한 불안감 증폭의 주요 원인인 만큼 '신뢰망 구축'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역설적으로 불안을 마구 증폭하면서 자기불안을 해소하는 경우가 있다"며 "이는 고립된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으로, 개별화한 사람일수록 더 큰 패닉 상태에 놓인다"고 지적했다.

조한 교수는 "개별화한 개인들은 스스로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터넷상에는 서로 상반된 정보만 무수히 널려 있다"며 "마을공동체처럼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망이 있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고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만큼 이런 관계망 구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로 불거진 정부의 역량 부족과 부실한 제도 운용 등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만 시민의식 개선을 논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재난 대응이나 방역체계와 같은 시스템 측면이 먼저 고쳐져야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건강도 지키는 공동체 의식을 요구할 수 있다"며 "시스템이 개선되기 전 시민의식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오판이며 균형 있는 개선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도 "우리의 시민의식이 높든 낮든 그게 현실이고 하루아침에 달라질 일은 아니다"라며 "시민의식 개선은 장기 과제일 뿐 갑자기 정부가 시민의식 탓을 한다면 오히려 화를 키우는 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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