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12월 18일 북한의 <노동신문>은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체포된 부수상 겸 외상 박헌영에 대한 재판 소식을 보도했다.
이 보도에서 ‘현앨리스’라는 여성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현앨리스는 박헌영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액세서리였다.
“박헌영은 1948년 6월 현앨리스를 비롯한 미국 탐정들을 구라파를 통해 북조선에 파견하겠으니 그들의 입국과 간첩활동을 보장해주라는 하지 미 군정사령관의 지령을 접수하였다. 그는 1949년 봄에 정치적 망명자로 가장하고 미국으로부터 체코슬로바키아에 잠입한 간첩 현앨리스와 이사민에게 외무상의 직권을 이용하여 입국사증을 발급케 하여 이들을 입국시킨 후 중요한 기관의 요직에 배치하여 그들의 간첩활동을 도와주었다”
현앨리스라는 여자는 미군을 따라 남한에 들어왔던 미국 시민권자로, 미군정에서 일하다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한다는 이유로 미국에 추방된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해서 하지의 지령으로 북한에 침투한 간첩이 되었는지 수수께끼로 남았다.
그녀는 박헌영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1956년 8월 종파사건 직후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이 흐른 후 2002년에 가서 남한의 언론보도를 통해 현앨리스는 ‘한국판 마타하리’로 묘사되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마타하리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미모를 무기로 프랑스와 독일에서 활동한 여성 이중간첩이다.
현앨리스가 일제강점기에 중국 상하이에서 박헌영과 여운형으로부터 구애를 받았고, 한국전쟁 중에는 중위 신분으로 맥아더 극동사령관 비서로 근무하다 박헌영을 따라 월북한 뒤 미국 간첩이란 혐의를 받고 총살당했다는 소설같은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과연 그럴까?
◇ 30여 년 후 파멸로 끝나는 상하이에서의 만남
이 사진은 원래 박헌영이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시절인 1929년 각국 혁명가들과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현앨리스 일가에 대해 오랜 기간 연구해온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정 교수는 이 사진은 1929년이 아니라 1921년 겨울 상하이에서 중국에 유학온 한국학생들이 찍은 것임을 입증했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헌영, 둘째줄 오른쪽 끝 여인이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 그 왼쪽이 현앨리스이다.
현앨리스의 동생 현피터는 맨앞줄 오른쪽 끝에 앉아있다.
그러니까 현앨리스 남매와 박헌영 부부는 상하이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음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3.1운동 당시 민족의 독립을 갈망하던 열혈청년들이 공산주의자로 변신해가는 한때의 장면을 잡은 것이다.
이 사진 속 인연은 30여년 후 파멸로 끝난다.
1921년 상하이에서 주세죽과 결혼한 박헌영은 1933년 상하이에서 체포된 이후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
주세죽은 박헌영의 혁명동지 김단야와 재혼했지만, 김단야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일제의 간첩’이란 죄목으로 처형된다.
남편 때문에 노동교화형에 처해졌던 주세죽은 1953년 박헌영의 체포소식을 듣고 딸이 있는 모스크바로 가다 병사한다.
박헌영과 현앨리스는 1956년 ‘미제의 간첩’이란 혐의를 받고 동반 처형된다.
그러면 박헌영 부부와 현앨리스 남매는 어떻게 해서 이국땅 상하이에서 사귈 수 있었을까?
현앨리스의 부친 현순 목사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서울에서 상하이로 넘어가 ‘조선독립단’의 상하이 특별대표 자격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3.1운동이 발발하자 현 목사는 3.1운동 소식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중국과 미국, 유럽 등지에 널리 알리고 해외 정보를 국내에 전달했다.
임시정부 수립에도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 1세대이다.
서울에 남아있던 부인 이마리아는 8남매를 이끌고 1920년 중반 우여곡절 끝에 상하이에 있는 남편과 합류했다.
바로 이곳 상하이에서 청년 박헌영은 존경하는 현순 목사를 따르게 되고, 자연스럽게 현앨리스, 현피터 남매와 동지적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이 가족과 박헌영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는 현순 가족의 피크닉에도 따라가고, 상하이 프랑스 조계 경찰에 체포된 현순 목사와 현피터 부자를 뇌물을 써서 빼내줄 정도였다,
현피터는 회고록 <만세>에서 상하이 시절의 박헌영에 대해 ‘점잖으면서도 친절한’ ‘젊은 혁명가들의 지도자’였으며 자신의 우상이었다고 소개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는 박 선생(박헌영을 지칭)이 나의 매형이 되어주길 바랐다”고 쓸 정도였다.
그러나 현앨리스는 1927년 일본에서 만난 변호사 정준이라는 양반의 후예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시댁의 구식생활과 남편의 나태함, 나아가 남편이 총독부 관리로 들어가자 미련없이 남편과 딸을 버리고 친정이 있는 미국으로 떠난다.
이혼 당시 뱃속에 있던 아들 정웰링톤은 외조부모의 손에서 자라 체코로 건너가 의사가 됐지만 1963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결혼에 실패한 현엘리스는 1930년대 중반 미국의 뉴욕에 있는 헌터 칼리지 등에서 공부했다.
이어 아버지가 있는 하와이로 돌아가 동생 피터와 함께 미국 공산당원 자격으로 노동운동가들의 그룹 속에서 활동했다.
이 정도라면 앨리스 현이 미군 내에서 펼친 활동의 맥락이 이해될 수 있다. 그녀는 아주 특이한 존재였다.
정병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남매(앨리스와 피터)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미국 시민이었으나, 이들의 인생행로를 이끈 실질적 정체성과 정신은 미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동양계 이민으로서 한국인이었다. 이것이 이들의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이 되었다. 존재는 미국 사회에 속한 미국 시민이면서도 그 정신은 한국의 해방을 지향했다. 문제는 이들이 한국을 택했을 때 발생했다. 남한 혹은 북한에서도 이들은 동화되기 힘든 특이한 존재였다. 한국인들의 눈에 이들은 어색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미국화된 동양인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한국을 지향하고 소원했으나, 남과 북은 이들의 고향이나 이상향이 될 수 없었다.”
◇ 해방이 된 조국에서 인연이 악연으로 변하다
일제가 패망하자 미국 시민권자인 현앨리스는 1945년 12월 주한 미24군 정보참모부(G2) 예하의 민간통신검열단(CCIG-K)에 군무원으로 배속됐다.
소위 계급이었다.
아마 해방 이후 미군 군복을 입고 한반도를 밟은 유일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남동생 피터 현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 육군부에서 일본어 전문가로 일했고, 종전 후 일본 도쿄의 연합통역·번역부대에서 잠깐 근무하다 한국으로 배속됐다. 그녀가 맡은 일은 한국인 민간통신을 검열해서 첩보를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국에 돌아와 다양한 활동을 벌이던 와중에 그만 금단의 영역을 넘어버렸다.
상하이 시절 가깝게 지내던 여운형과 박헌영을 너무 자주 만난 것이다.
미군정 당국이 1946년 6월 압수한 <공산당 일지>를 보자.
여기에 현앨리스가 세 차례 등장한다.
두 번은 박헌영과, 한 번은 여운형과 만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1946년 1월 11일 박 동지가 A. 현과 회견하다.
1946년 3월 2일 오후 5시 30분 제플린, 노만, 클론스키, 현앨리스, 정, 김과 이야기했다.
1946년 3월 6일 오후 2~4시 여 씨의 집에서, 여 씨는 현 앨리스와 회견했다“
현앨리스가 박헌영과 여운형을 만난 것은 중국 상하이에서의 인연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상임근무자의 일지에 등장하는 게 이 정도였다면 아마 그들의 만남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월 2일 회동에 등장하는 세 미국인의 이름이다.
이들은 미국 공산당원들로 제대를 맞아 본국으로 귀환한다는 인사를 위해 박헌영을 찾았으며 그 자리에 현앨리스가 동석했던 것이다.
이 무렵 현앨리스는 국내의 좌익계 인사들은 물론 미국 공산당 관계자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무렵 세 미국인 중의 한 명인 로버트 클론스키에게 문제가 생겼다.
박헌영을 만나기 전날 그는 조선공산당이 주최한 삼일절 기념식에 참석해 미군 정보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현앨리스 오누이의 국내에서의 행적도 드러났다.
그렇게 현앨리스의 행적이 드러난 뒤 그의 상관인 정보참모본부장 니스트 대령의 1946년 8월 증언이다.
“대령은 전 기간 동안 검열된 항목 수에 관한 도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2월에 특별히 급속한 하강이 있었던 점에 대해 당시 전쟁부가 한 여성을 고용해 한국에 왔는데, 그녀가 그들의 임무를 망친 악마로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38이북 출신인 ‘북에서 온 그녀의 친구들’의 대다수를 고용해 CCIG-K의 임무를 파괴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그들은 그녀를 제거했고, 획득된 정보와 활동량은 차근차근 회복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악마’로 묘사된 여성은 바로 현앨리스였다.
CCIG-K가 한국어 편지의 검열을 위해 영어 구사가 가능한 한국인 통번역자들을 구하는 과정에 그녀가 개입해 북한 출신 공산주의자들을 다수 취직시켰고, 그 결과는 니스트 대령의 표현대로 ‘CCIG-K 임무의 파괴’로 귀결됐던 모양이다.
이는 그녀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과 상당한 연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앨리스 현은 나중에 북한 당국이 주장한 대로 ‘미국을 위한 스파이’이라기보다는 ‘북한을 위한 공작원’의 성격을 가졌다고 보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다.
그녀는 결국 한국 근무 반년 만에 해고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현앨리스는 주한미군에서 사실상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간 뒤 LA에서 아버지 현순 목사가 위원장으로 있던 재미조선인민주전선의 서기로, 조선민족혁명당의 미주총지부와 관계를 맺고 있던 주간지 <독립>의 ‘이사부 서기·상무위원·편집부원’으로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이들의 미국 내에서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면서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북한행이었다.
미국 내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북한으로 ‘귀국’할 뜻을 전했다.
프라하에 유학 중인 현앨리스의 아들 웰링턴도 그렇게 편지를 보내는 루트 중의 하나였다.
결국 이들 그룹 중의 현앨리스와 이사민이 1949년 10월경 어렵게 북한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의 김약산과 김두봉이 초청했다는 설과 박헌영이 비자를 내주도록 했다는 설도 있다.
‘사상의 조국’으로 돌아간 현앨리스는 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상하이 시절의 인연을 따라 박헌영의 지근거리에서 일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문제는 6.25전쟁 중에 터졌다.
현앨리스의 ‘특이한 존재’가 빌미가 되었다.
1955년 박헌영이 미국 간첩과 정권전복 음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을 때 그녀가 ‘미제국주의자들과의 연결고리’로 지목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박헌영에 대한 기소장에만 등장했을 뿐 재판정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라는 뛰어난 저서를 쓴 정병준 교수는 그녀의 일생을 이렇게 평가했다.
“해방 후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그녀는 이방인으로 자리했다. 그녀는 자신이 성장했던 남한에 속할 수 없었다. 남한은 상하이 시절의 ‘혁명동지’인 박헌영과 여운형이 탄압받는 ‘반동적’ 미군정과 이승만의 세계였다. 이제 그녀가 꿈꿨던 이상적인 모국은 북한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체코를 거쳐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평양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낯선 세계였다. 그 곳은 그녀가 깃들고자 했던 이념과 사상의 조국이 아니었다. 그녀의 비극적 삶을 완성하는 죽음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은 그녀를 이질적 존재이자 위험 요소로 간주했고, 그녀를 통해 박헌영과 이강국도 미국의 스파이로 규정한 후 제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