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왜 괴질 발생을 숨기나요?"
② "정보 통제…괴담만 키운다"
③ 뒤늦은 '실토'…'패닉'에 빠진 도시
④ '사재기'로 폭발한 공포와 혼란
⑤ 공포의 대상이 된 '대중교통'
⑥ '충격'과 '공포'…숨죽인 베이징
⑦ "아빠 꼭 와요"…의료진의 '사투'
⑧ 유학생 '썰물'…한인 상권 '초토화'
⑨ "유령 도시?"…베이징의 굴욕
홍콩 언론들은 9일 "홍콩 정부가 곧 한국에 대해 홍색(紅色) 여행 경보를 발령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홍색 여행 경보는 불필요한 여행을 자제하고 기존 여행 계획을 조정하도록 권고하는 단계다.
홍색 경보가 적용된 국가는 현재 이집트와 레바논, 네팔, 파키스탄 등 4개국이다. 또 모든 여행을 피하도록 한 흑색 경보가 적용된 국가는 내전 상태인 시리아뿐이다.
이에 앞서 뉴욕타임스도 7일(현지시간) '메르스 만평'을 통해 탈북자들이 남한의 메르스가 무서워 다시 북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미 한국의 국격은 떨어질 때로 떨어졌고 한국인의 자존심도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2003년 5월 2일로 돌아가보자. 이날은 '계절의 여왕' 5 월답게 베이징 날씨는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알리좡(二里庄)에 있는 <세계광장>에서 자전거를 타고 <천안문>으로 출발한 것은 오후 2시 40분. 뻥 뚫린 도로, 한적한 도시, 울창한 가로수 그늘…. 한마디로 자전거 탈 맛이 났다.
가로수 그늘엔 빨간 택시들이 마냥 손님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마스크를 한 청소부들은 숨이 턱턱 막혀올 텐데도 부지런히 쓰레기를 주워담았다.
베이징사범대학(北京師範大學)은 경비원들이 외부인원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거리엔 노동절을 경축하는 오성홍기(五星紅旗)가 많이 내걸렸다. 백화점이 유난히 많은 시단(西單)은 '쇼핑하면 시단'이라고 할 정도로 언제나 쇼핑객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이날 만은 한산했다.
천안문에 도착한 것은 3시 30분. 정확하게 50분이 걸렸다. 버스를 타고 와도 언제나 1시간은 넘게 걸렸던 곳이다. 그만큼 ‘돌아다니는 차와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자전거도로가 잘 정비돼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안문 광장도 텅 비었다. 연을 날리는 사람 몇 명과 아이스크림 장수, 그리고 대형 마오쩌둥 사진만이 광장을 지키고 있다. 천안문 주변 곳곳에서 경비를 서는 군인들은 모두 마스크를 벗었다. 하지만, 교통경찰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 묘한 대조를 이뤘다.
마스크에다 장갑, 보안경까지 쓴 행인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날씨가 더운 탓일까? 마스크를 벗어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꼬치'와 '북경자장면' 등을 파는 아기자기한 왕푸징 먹자골목(王府井小吃街)도 모두 문을 닫았다.
백화점은 대부분 문을 열었지만, 손님은 없었다. 안에는 마스크를 하지 않은 점원들도 많았다. 상가마다 '소독 완료(本店已消毒)'라는 안내 문구를 붙여놓았지만, 손님을 끌어모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왕푸징에서 다시 숙소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길가에는 노인들이 의자를 내다 놓고 앉아있었다. 화창한 날씨에 거리는 한산한 평온한 오후였지만 표정은 모두 굳어있었다. 생각해보니, 거리에서 웃는 사람을 거의 못 본 것 같았다.
베이징대학의원 제2주원부(北京大學醫院 第2住院部) 정문 주변은 밧줄로 둘렀다. 흰 가운과 카우보이 모자를 쓴 직원들이 차량과 인원을 통제했다. 병원 안에서 급하게 구급차가 나왔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사람 모두 흰 가운을 걸치고 마스크와 모자를 썼다. 이날 두 번째 본 구급차였다. 맞은편의 베이징대학 제1의원(北京大學 第1醫院) 뜰에도 마스크와 가운을 걸친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다. 담 건너보이는 병원 창가엔 빨아놓은 듯한 마스크 10여 개가 걸려있었다.
근처 진타이호텔(金台饭馆) 입구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있었다. 9층까지 있는 제법 큰 건물 앞에는 보안 한 명이 덩그런이 서 있었다. 창문마다 모두 파란 커튼이 쳐있었다. 영업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스 환자가 늘 들락날락하는 병원 코앞에 있다는 것이 이유인 듯했다.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지나면서 이미 문을 닫은 호텔들을 여럿 봤다. 최대 관광특수기인 '노동절 연휴'를 앞두고 느닷없이 찾아온 사스는 호황을 누리던 중국 관광업계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마을 게시판으로 쓰이는 담벼락 칠판에 낯익은 글자인 '非典(사스)'가 눈에 들어왔다. 사스 환자를 돕기 위한 기부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중화 민족의 전통미덕을 넓게 펼치자는 내용이었다.
또 칠판에는 사스 예방법과 사스 의심환자가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 등도 빽빽이 적혀있었다. 마을 공동게시판으로 칠판을 이용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일치단결해 사스를 물리치자는 내용의 현수막도 내걸렸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여종업원이 흰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한복과 마스크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마스크를 보면 손님이 더 달아나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근처 사우나도 '당국의 지침에 따라 당분간 영업을 중지한다'는 안내문을 붙여놓았다. 무단위안 사거리엔 22번 시내버스 종점이 있다. 한창 바쁠 저녁 5시 반인데도 차고에는 버스가 가득했다. 버스 운행횟수도 이미 많이 줄어들었다.
얼마 전, 영국 BBC에서 사스가 급속히 확산하는 베이징의 상황을 보도하면서 'GHOST CITY(유령 도시)'라고 제목으로 뽑은 적이 있다.
베이징은 3000년이 넘는 긴 도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 국가의 수도로도 86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만큼 북경인들이 사스 창궐로 받은 자존심의 상처는 크고 깊었다.
'유령 도시'라는 표현이 비록 과장된 것이기는 했지만, 당시 베이징이 정상적인 도시의 모습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2003년 5월의 베이징은 '공포'와 '당혹',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뒤범벅이 된 회색빛 도시였다.
2015년 6월 대한민국 수도 서울도 베이징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이웃 나라의 '사스 창궐'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으면서도 아무런 교훈도 새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능한 정부가 불러온 참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