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통제불능 '메르스'…'영화'보다 참담한 '현실'
② '탄탄대로' 걷던 극장가…'메르스' 직격탄에 '벌벌'
③ '작년엔 세월호 올해는 메르스'…공연계 덜덜덜
④ '메르스', 한류에 찬물…아이돌도 中서 '찬밥신세'
⑤ 공동체 덮친 '메르스' 재앙…철학자 강신주에게 묻다
5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메르스를 '재앙'으로 표현했다. "메르스가 사람들을 깨알처럼 쪼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친자본적이고 파시즘적인 시스템을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감염의 위험 탓에 서로 사랑하기 힘들어지면 '너 저 애랑 놀지 마'라는 식의 경쟁 메카니즘이 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서로를 이간질시켜 지배력을 갖는 통치의 방식이 저절로 강화되는 거죠. 사람들이 서로를 질병 보듯 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이를 어떻게 다잡을 것인지가 우리의 과제입니다."
▶ 메르스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 세월호 참사와 똑같다. 지난 10여 년간 자본 중심의 시스템이 자리잡은 탓이다. 효율만 따지는 친자본적 시스템은 태생적으로 '만에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병원은 많은데 환자를 받을 곳이 없다고 한다. 더 많은 돈을 버는 데만 급급해 다인병실을 줄여 왔기 때문이다. 만약을 대비하지 않은 정부는 우왕좌왕하고 있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공동체를 꾸려 왔다면 이렇게 될 수 없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지금처럼 자본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 국민들의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 전염에 대한 공포. 이로 인해 유대와 연대를 위한 가장 좋은 단계인 '접촉'이 줄고 있다. 무서운 일이다. 전염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고 파괴하는 셈이다. 지금 상황에서 연인에게 키스하는 이는 훌륭한 사람이다. 재앙이 닥쳤을 때 타인을 불신의 존재로 바라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공동체 생활이 주는 느낌은 편안함이다. 재앙은 공동체를 '정글'로 변화시키려 한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 존재를 볼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공포를 느낀다. 귀신, 유령에 대한 두려움이 그런 것이다. 메르스는 귀신, 유령의 성격을 갖고 있다.
=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동물적 공포와 인간적 공포를 구분할 수 없어 보인다. 생존을 생각해야 하는 지점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다만 공동체를 걱정하는 '인간적 고뇌'를 볼 필요가 있다. '내 이웃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어떻하지"라는 생각 말이다. 동물적 공포를 보듬고 인간적 고뇌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일선 병원에서 열심히 환자들을 돌보고 있을 의사, 간호사들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정부가 정보를 틀어쥐고 인력, 물품도 부족한 환경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돌보는 그들은 위대하다.
문제는 사회 지도층의 생각이 여전히 동물적 공포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지도자는 지금 당장 부끄러워서라도 평택으로, 병원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만 공동체의 안정을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무도 안 간다. 자기만 생각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4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긴급 브리핑은 "전면에 나서겠다"는 의미로서 남다르게 다가온다.
▶ 재앙은 항상 가난한 이들, 노인, 아이 등 사회적 약자에게 더 큰 피해를 주는 모습이다.
= 전염은 동물적인 사태다. 약한 곳이 먼저 죽는 것이다. 공동체는 그래서 필요하다. 약한 이들을 돌봐 주는 곳이 공동체니까. 하지만 한국 사회는 정글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자본주의를 공동체의 원리로 여기니 비행기 타면 살고 배 타면 죽는 것이다. 철학자의 눈에는 소탐대실로 보일 뿐이다. 효율을 따질 게 아니라, 길게 보고 약자를 위한 안정망을 갖춰야 한다.
▶ 메르스 사태에 직면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산에서 암벽을 타던 두 사람이 발을 헛디뎌 로프에 매달려 있다고 하자. 그때 아래에 있는 사람이 줄을 자르려 한다. 위에 있는 사람은 그럼에도 상대를 끝까지 붙잡고 늘어진다. 상대를 살리려고 줄을 자르려는 사람처럼 메르스에 감염된 사람은 '공동체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나를 격리시켜 줘"라고 말해야 한다. 아래에 매달린 사람을 끝까지 붙드는 이처럼 건강한 사람은 감염자를 품어야 한다. 혹여라도 밀쳐서는 안 된다. 그러한 하모니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인간적 고뇌이자 사랑, 공동체 의식이다. 다만 "너는 감염됐으니 나를 밀쳐야 해"라는 식의 강요는 안 된다.
▶ 결국 인간적 고뇌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다가온다.
= 재앙 앞에서 스스로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지를 증명해야 한다.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소설 '페스트'에서도 잘 묘사됐듯이 이런 위기는 상대를 확인하는 성찰의 단계가 되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메르스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걸렸을 때 원칙에 따라서 대응해야 하니까.
= 체제 유지를 위한 통제만을 염두에 둔, "가만히 있으라"는 최악의 방침이다. 사람들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 정보인데, 이러면 안 된다. "지금 대한민국 전체가 세월호"라는 누군가의 표현이 정확한 것이다. 지금의 정부는 "체제만 유지할 수 있다면 다 죽어도 돼"라는 오만한 파시즘적 시선으로 국민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 시민들이 만든 '메르스 확산지도'(http://mersmap.com) 소식을 접했나.
= 공동체 구성원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막아 주는 다중지성의 힘이다. 훌륭하다. 이러한 다중지성을 가능케 하는 SNS와 스마트폰의 발달은 고무적이다. 정보는 무조건 많이 유입돼야 한다. 그중 유언비어가 있더라도 나중에 정화되기 마련이다. 부부가 심하게 싸우고 이혼하면 충격을 덜 받는다. 하지만 행복한 줄 알고 있다가 "이혼하자"는 말을 들으면 심한 충격에 휩싸인다. 메르스에 관한 정보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메르스 정보를 처음부터 알고 있으면 충격적인 사태가 닥치더라도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
▶ 앞서 언급했듯이 메르스 사태와 세월호 참사를 동일하게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 인간을 부정하는, 친자본적이고 파시즘적이라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호황일 때는 모르다가 불황이 닥치면 친자본·파시즘적 체제는 비정규직, 제3세계 등의 구분을 통해 인간을 배제하고 제거하기 때문이다.
▶ 박원순 시장의 브리핑을 두고 정부와 대형병원의 반박이 거센데.
= 정부가 정보를 통제하는 건 결국 대형병원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앞으로 정부와 대형병원은 메르스가 아닌, 서울시를 상대로 죽도록 싸울 것이다. 대형병원의 문제점이 터져 나올 테니 미리 수비하는 것이다. 치졸하다.
▶ 해당 대형병원 소속으로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의사 역시 서울시의 발표를 두고 각을 세우고 있다.
= 면피를 해야 하지 않겠나. 동물적 고뇌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안타까움도 있을 테지만, 철학자 입장에서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 철학으로 메르스라는 재앙을 본다는 것은.
= 위기와 시련이 닥치면 공동체와 그 구성원 각자가 어떤 수준에 있는지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사랑하는 사람과 이웃에 적대적이진 않은지, 정부가 우리를 진정 돕고 있는지 말이다. 지금의 모습을 잘 기록하라고 권하고 싶다. 지금 시대는 언론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이슈로 물타기를 한다. 메르스 사태가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 또 다시 이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움직임이 일 것이다. 6개월, 1년 뒤 자신의 메모를 보면서 무엇이 변했는지 보면 된다. 지금 보고 있는 것들만 기억하고 지키자.
= 진실은 "나를 봐달라"며 우리 뒤를 항상 쫓아다닌다. 그게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진실은 직면하면 사라진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 당시 진실을 제대로 못 본 것일 수도 있다. 처음 잘못하면 실수라고 할 수 있지만, 다시 반복하면 멍청한 것이다. 만약 세 번째로 반복한다면 희망은 없다. 우리 사회의 민낯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 나은 세상을 물려 줘야 한다.
▶ 진실과 대면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 진실을 봤을 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중요하다. 진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하면 반복할 수밖에 없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라는 미셸 푸코(1926~1984)의 말이 맞다. 용기가 있어서 진실이 있는 게 아니라, 진실을 말할 때 용기가 있는 것이다. 참담하다고 고개돌리지 말고 이 위기를 제대로 응시해야 한다. 공동체에 닥치는 문제의 진실은 계속 회자돼야 한다. 그래야만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공통분모가 생길 수 있다.
▶ 더 나은 공동체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 남태평양의 어떤 섬에 한 공동체가 있다고 하자. 그곳의 젊은이들이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가득 잡아 마을로 돌아온다. 해변에 모여 있던 아이들과 노인들이 그 물고기를 나누어 가진다. 그 모습을 보는 젊은이들은 가만히 있다. 자신들이 어릴 때 그랬고, 앞으로 늙었을 때도 그렇게 살아갈 테니까. 이것이 공동체 아닐까. "내가 잡은 물고기를 왜 그냥 가져가냐"고 하는 자본주의적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운, 동물적인 이기심을 버린 이러한 공동체가 실제로 있다. 우리도 이러한 활동을 늘려가야 한다.
▶ 그러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나'라는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사회는 개인들의 수준에 맞춰 꾸려진다. 민주주의와 공동체는 그런 것이다. 구성원들이 감당할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대안이라도 쓸모가 없다. 공동체의 발전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자신에 대한 냉정한 성찰에서 시작된다. 한 걸음도 못 갔는데, 두세 걸음 앞을 가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지금의 친자본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에 우리가 얼마나 길들여졌는지를 직시하고, 그 악순환의 고리부터 끊어야 한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를 보고 옆 사람과의 합의를 통해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다중지성적 사유란 그런 게 아닐까. 몸이 약해 걸음이 느린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의 보폭에 맞출 수 있는 여유와 의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