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폐지된 뒤 사실상 특수수사를 전담해야 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지만 올해 들어 잇따른 악재에 암울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현재 검찰 특별수사팀(팀장 문무일 검사장)이 수사하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의 모태가 된 경남기업 성공불융자금 비리 수사다.
검찰은 경남기업이 해외자원개발을 빌미로 한국석유공사로부터 받은 성공불융자금과 지원금 수백억원을 횡령·착복했다는 혐의로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성 전 회장이 지난 4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신이 불법 정치자금을 건넨 여권 실세들을 폭로하면서 전국이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성 전 회장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만 기다리던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임관혁)는 성공불융자금 의혹 수사가 무산되는 것을 허탈하게 바라만 봐야 했다.
성완종 쇼크에 휘청이던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경남기업의 3차 워크아웃(2013년 10월) 당시 채권단에 금감원이 외압을 행사한 정황을 포착하고 김진수 전 금감원 부원장보에 대해 영장을 청구하면서 반전의 기회로 삼고자 했지만 지난 22일 법원의 영장기각으로 이마저도 무산됐다.
검찰은 이번 주에 김 전 부원장보와 조영제 전 금감원 부원장을 소환한다는 방침이지만 최수현 전 금감원장까지 수사선상에 올렸던 첫 청사진대로 수사가 이뤄지는 것은 쉽지 않게 됐다.
실제로 검찰은 최 전 원장과 조 전 부원장, 김 전 부원장보가 외압을 행사하기 위해 공모를 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아직 입증을 하지 못한 채 김 전 부원장보의 신병 확보에 실패했다.
포스코 비자금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조상준 부장검사)도 악재가 닥치기는 마찬가지다.
어려운 수사가 될 것이라는 초기 예상에도 불구하고 횡령 등의 혐의로 7명의 전현직 포스코건설 임원들을 구속하는 등 성과를 내는듯 했지만 의혹의 몸통이라는 정동화 전 부회장의 영장이 지난 23일 기각되면서 비틀대는 모습이다.
정 전 부회장의 영장이 기각되면서 포스코 비자금 의혹의 몸통으로 지목받던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의 수사 뿐만 아니라 특혜인수 의혹에 휩싸였던 성진지오텍의 전정도 전 회장에 대한 수사도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구속기소에는 성공했지만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의 경우도 청구한 구속영장이 한 차례 기각되면서 공정거래조세조사부(부장검사 한동훈)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검찰은 이미 올해 초 금융정보분석원으로부터 장 회장의 수사한 자금에 대한 자료를 넘겨받고도 구속영장을 재청구한 끝에 가까스로 장 회장의 신병을 확보했다.
◇ 영장 기각, 기각, 기각… 무리수 남발하는 檢
하지만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의 갈지자 행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비단 올해 상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가장 많이 지적되고 있는 것은 수사과정의 무리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점이다.
김진태 검찰총장이 취임하면서부터 '곁가지 수사', '먼지털이식 수사'를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한 수사는 여전하다는 것이 내부의 시선이다.
성완종 전 회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검찰이) 자원 쪽을 뒤지다 없으면 그만둬야지, 제 마누라와 아들, 오만 것까지 다 뒤져서 가지치기 해봐도 또 없으니까 또 1조원 분식 얘기를 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검찰이) 저거(이명박 정권의 자원외교)랑 제 것(배임·횡령 혐의)을 '딜'하라고 그러는데, 내가 딜할 게 있어야지요"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정동화 전 포스코건설 부회장의 영장 기각도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영장 청구에 나섰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검찰은 정 전 부회장의 자택 등을 압수수색한지 두 달여가 지난 19일 소환해 조사했는데 압수수색부터 소환과 영장 청구까지 지나치게 늘어진 점도 이른바 ‘부실론’을 부채질 하고 있다.
법원은 김진수 전 부원장보의 영장기각 사유로 “기업구조조정에 있어서 금융감독기관의 역할 내지 권한 행사의 범위와 한계가 문제되는 이 사건의 특성과 제출된 자료에 비추어 본 범죄사실의 소명정도 등을 종합할 때 구속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 마디로 경남기업의 워크아웃 과정에서 김 전 부원장보가 부당하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혐의에 대한 검찰 소명이 석연치 않았다는 지적으로 무리한 수사 논란의 근거가 되고 있다.
◇ 檢의 무리수는 靑의 하명수사 때문?
검찰 내부에서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의 무리수가 많아진 이유를 청와대의 지나친 간섭에서 찾는 시각이 있다.
특수수사 경험이 많은 한 검찰 관계자는 "경남기업 성공불융자금 사건, 포스코건설 비자금 사건, 박범훈 전 교육문화수석 의혹 등 현재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맡고 있는 사건들 상당수가 정권의 필요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수사를 맡고 있는 검찰도 청와대가 원하는 결과에 맞추기 위해 수사를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무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정부 들어 청와대와 행정부가 수사의 주제를 먼저 던져주는 하명식 수사관행은 이제 완전히 뿌리를 내린 것처럼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가 정치적 난관을 돌파하는 해법 중 하나로 검찰수사를 애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세월호 사건으로 지지율 급락 등 위기가 닥치자 '관피아 척결'을 내세워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이른바 '사자방' 국정조사로 야당이 압박해 들어오자 ‘방산비리 척결’을 지시하며 야당 공세를 무마시켰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대국민담화에서 밝힌 '부패와의 전쟁' 역시 문건유출 파문 등으로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시점에서 나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정치적 도구로 검찰의 수사권이 남용되면서 가장 중요한 사정기능을 담당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마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검찰관계자는 "이른바 '○○○척결'식의 지시는 내리는 쪽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구체적인 혐의를 입증해야 하는 일선의 입장에서는 애매하고 막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이런 지시가 자주 바뀌게 되면 수사팀은 수사준비에만 매달리다 정작 제대로 수사는 못해보고 다시 새로운 수사에 착수해야 하는 딜레마가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지시를 내리는 쪽이 원하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수사검사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점도 하명수사의 큰 폐해다.
충분히 수사를 진행하지 못한 상황에서 '원하는 결과'까지 염두에 두다 보면 객관적인 증거를 자연스럽게 쫓아가기보다 '끼워맞추기식' 수사를 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이완구 전 국무총리의 후임으로 청와대의 검찰 제어에 한 축을 맡아왔던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지명하면서 이같은 하명수사의 관행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