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한남동에 있는 영화제 사무국에서 만난 그는 "영화제를 살릴 수 있다면, 제가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용퇴하겠다"고 밝혔다.
올해로 17회째를 맞는 서울청소년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이어 국내에서 3번째로 긴 역사를 지닌 국제영화제다. 올해로 54회를 맞는 체코 질른청소년영화제와 45회째인 이탈리아 지포니청소년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국제청소년영화제로 꼽힌다.
하지만 오는 8월 5일 개막을 앞둔 상황에서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준비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김세훈)는 지난달 30일 '2015년 글로벌 국제영화제 육성지원 사업' 결과를 내놓으면서 서울청소년영화제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다. "전년도 평가 결과가 매우 저조하고 최근의 여러 분쟁으로 지자체에서 지원배제 된 점 등을 고려할 때 지원하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 영진위 측의 설명이다.
서울청소년영화제는 올해 영진위 지원금 2억 원, 서울시 지원금 3억 2000만 원이 끊기면서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생각을 많이 하고 있지만 정답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영진위가 이런 식으로 물타기를 하는 게 뻔뻔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들이 17년 역사를 지닌 영화제의 가치를 무시해도 상관 없지만 '왜 그랬냐'고 되려 묻고 싶습니다."
서울청소년영화제가 영진위와 마찰을 빚게 된 데는 임금체불 문제가 있다. 영진위는 지난 1월 서울청소년영화제에 대한 각종 지원사업을 배제하는 처분을 내렸다. 민원인 2명이 임금체불 등을 이유로 지난해 7월 14일 공정특위에 민원을 접수한 데 따른 것이다.
"영진위는 우리가 잘못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대단히 황당하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입장이다.
"임금 체불 문제가 부각되니 낙인이 찍힌 셈이죠. 맥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민원인이 사실 우리 직원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도와 주겠다'는 제안에 명함을 만들어 준 것이 행정적인 실수였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제안이 있더라도 더욱 확실하게 검증할 의향도 있어요. 논란을 부른 영진위가 누구보다 우리 입장을 잘 알 겁니다."
그는 "영화제 개막까지 3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오해를 풀 수 있는 대화에 영진위가 나서줬으면 한다"고 요청했다.
◇ 교사로 청소년들과 인연 맺은 '영상키드'…"학생들 입시 압박 영화로 해소"
"제 고향이 광주인데 고3때 광주민주화운동을 만났죠. 버스를 타고 시민군에 합류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그런 아픔이 대학 시절 서울에 올라와 민주화운동을 했던 동력이었죠. 당시 '영화는 세상을 보는 창'이라는 믿음으로 시네마테크 운동에 참여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2년간 다니던 광고회사를 그만 두고 유학 준비를 하던 그는, 교직 과정을 이수했던 점을 활용해 고등학교 영어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서른한 살 때로 기억합니다. 6개월 만 할 생각이었는데, 담임을 맡으면서 '1년 만 더하자'고 마음 먹었죠. 그런데 그 뒤로 10여 년을 교직에 있었네요. (웃음) 당시 교육 철학이 부족했던 저는 아이들과 인생 선배로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마음도 편해지더군요. 현재도 다르지 않지만 당시 학생들의 입시 압박을 해소하는 데 영화를 활용했어요. 그렇게 영화반도 만들어 운영했죠."
당시 문화예술 분야에서 주로 활동하던 그는 꽤 많은 교사들과 만나면서 2000여 명의 회원이 소속된 '전국영상미디어교육협의회'를 조직했다. 서울 영등포 사무실에 학생자치기구인 '청소년영상제작단'을 열어 영상 편집도 가르쳤는데, 1기 출신이 올해 열린 제6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단편영화 부분 황금곰상을 탄 '호산나'의 나영길 감독이다.
"공간은 좁은데 학생들로 바글바글했죠. 학교를 마치고 중고등학생들과 교사들이 모이니 즐거움도 컸어요.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만든 작품을 학예회나 축제에서만 틀 게 아니라, 극장에서도 상영해 보자는 데 뜻이 모였고, 청소년영화제를 조직했죠. 그게 1999년 1회입니다. 당시 영어를 공부한 게 도움이 돼 10개국에서 100여 편의 작품을 모았어요. 사람들이 많이 놀랐죠. (웃음)"
◇ "영화는 세상을 보는 창…서울청소년영화제는 세대간 '소통의 장'"
"할리우드 영화야 돈만 있으면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지만, 청소년들이 나중에 컸을 때 다양한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어요. 학생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그들로부터 큰 선물을 받고 있다는 기쁨도 상당했죠."
그는 "서울청소년영화제와 함께 보낸 시간은 결코 후회 없는 기억"이라고 전했다. "요즘처럼 힘든 때를 보내면서 그 시간들을 더욱 많이 되돌아보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영화제를 운영한다는 게 쉽지 않더군요. 뜻이 맞는 학생들, 교사들을 만났던 기억들이 큰 힘이 됩니다. '헛되게 살지는 않았구나'라는 위로도 받죠. (웃음) 미래 세대와 함께하면서 그들의 버팀목이 되겠다는 분들이 우리 영화제에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김 위원장은 지금까지 쌓아 온 네트워크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걱정에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함께했던 후배들, 스태프들, 제자들의 땀과 노력이 밴 영화제가 좌초될 위기를 맞았다는 데 대한 책임도 통감하기에,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각오란다.
"어떻게든 꾸려갈 겁니다. 운영이 어려운 만큼 부대행사를 축소하더라도 초청작은 줄이지 않는 방향으로 갈 예정입니다. 작품들이 어느 해보다 좋을 거라 자신하고 있으니까요. 이번 일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시스템 면에서 몰랐거나 놓친 부분이 있다면 뼈아프게 고칠 생각입니다. 그동안 바빠서 못 만났던 교사들, 학생들로부터 연락도 받고 있는데, 부족한 부분은 너그러이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영진위 측에 "서울청소년영화제를 '애들 영화 트는 행사'로 치부하지 말고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춘 세대간 소통의 장으로 바라봐 줄 것"을 당부했다.
"우리 영화제를 두고 '애들을 정치적으로 이념화 하려는 것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청소년들에게 '다치지 않으려면 줄 잘 서라'고 가르칠 수는 없잖아요.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눈을 갖도록 돕는 데 서울청소년영화제의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영진위가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은 우리보다 영화적으로 박식합니다. 그러니 한국영화 진흥이라는 책무를 '완장'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소통'의 방편으로 여겨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