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개봉한,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경찰이 그 사건을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악의 연대기'(감독 백운학, 제작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역시 이러한 선택의 결과물이다. 영화 이야기를 하던 중 나온 "한 가정은 한 국가와 다름없다"는 손현주의 발언은 배우로서 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열쇠다.
▶ 자녀들이 아빠가 출연한 영화를 좋아하나.
= 물론이다. 전작 '숨바꼭질'(2013),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때도 극장에서 봤다. 딸은 두 번씩 보고는 했다. 이번에도 '몇 세 관람가냐'고 묻더라. 15세 관람가여서 고등학생인 딸은 괜찮은데,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걱정이다. (웃음)
▶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는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건가.
= 애들이 크는 과정이어서 그렇게 되더라. 딸 아이가 부담스러워하고 그러면 하기 그렇지 않나. 애들이 다 크면 할 수도 있겠지. 결혼 안하고 혼자 살면 구분 없이 했을 텐데, 아내와 아이가 있는 입장에서 굳이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악의 연대기도 등급 심의 때 고민이 컸다. 영화사가 청불과 15세를 두고 고민했을 때 마음속으로 '15세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애들이 봐야 하니까.
▶ 스스로 "평범한 얼굴"이라고 말하는데, 배우로서 장점이라 여기는지.
= 외모에 대해서 '잘 생겼다' '개성 있다'는 식으로 유심히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현재 '더 폰'이라는 스릴러 영화를 촬영 중인데, 주로 밤에 찍는다. 하루는 밤 촬영 때 분장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마주친 감독님이 "아! 선배님이셨군요"라며 놀라더라.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는 거다.
그 일을 계기로 평범한 얼굴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요새 평범한 외모의 배우들이 대세로 크지 않나? (웃음) 제 평범한 외모 덕에 감독님들이 편안한 옆집 아저씨 같은 캐릭터도 그릴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 최근 열린 언론 시사회에서 완성된 영화를 처음 봤다. 전날 긴장돼서 잠도 안 오더라. 처음에 시나리오를 무척 재밌게 봤던 터인데, 두 번째 읽을 때는 '이게 영화적으로 될까'라고 생각되는 장면들이 있다.
처음 읽을 때는 재밌다고 느낀 부분들이 막상 찍을 생각을 하면서 보면 어렵다. 그런 부분들 속에 숨겨진 것들이 뭘까를 고민하면서 표현하려 애썼다. '이 점들이 관객의 입맛에 맞을까'라는 생각에 지금도 떨린다.
▶ 최반장 캐릭터가 이해됐나.
=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물론 법 없이 살 사람들도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순수하고 열정적이던 때가 있지 않나. 살면서 묻어가는 세월의 때, 그로 인한 타락의 때…. 그러한 때를 어느 순간 때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
우리 영화에서처럼 이러한 것들이 한 가정을 파멸로 몰아가는 듯하다. '이 정도쯤이야'라고 여기게 되는 순간이 무섭다. 한 가정은 한 국가와 다름 없다. 결국 한 가정이 무너지는 것은 한 국가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악의 연대기는 우리를 돌아볼 수 있도록 돕는 영화다. 결론을 주기 보다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오이디푸스 왕' 등 고대 그리스 비극과 몹시 닮았다.
= 촬영에 앞서 굳이 찾아보려하거나 참고하려 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끌어올 필요 없지 않나. 우리 영화만의 색깔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컸다.
▶ 영화 속 최반장처럼 살인이라는 극단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물질만능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다. 그럴 때마다 인간적인 선택을 하게끔 만드는 힘 같은 것이 있나.
= 그렇게 안 살려 노력은 하지만 저 역시 돌아보면 때가 묻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대학로 시절을 잊지 않고 살려 애쓴다. 그럼에도 잊기도 하고 타협도 한다. 돌아보면 항상 자기 합리화가 문제였다. '인류가 오랫동안 살아 온 방식'으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은 극중 최반장은 분명 가해자다.
▶ 맡은 역이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경찰이라는 점에서 실제 촬영장에서 외로운 점도 있었겠다.
= 쉬는 시간에 동료들과 웃고 즐기기에는 최반장이 저지른 일이 너무 컸다. 촬영장에서도 잘 떠들 수가 없더라. 다른 역할에 비해서 현실적인 고민이 많이 들었다.
= 촬영 한 달 전부터 극중 형사로 출연한 7, 8명의 배우들이 뭐든 함께 움직이고는 했다. 진짜 동료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 시간들이 경찰서를 무대로 촬영할 때 소통의 폭을 훨씬 넓고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 가장 공감 가는 영화 속 장면이 있다면.
= 아무래도 최반장의 과거 신들이 정서적으로 끌린다. 이 신들이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저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지점들이 있어서 그랬던 듯싶다. 악의 연대기의 정서는 답답함인 것 같다. 색깔로 보면 회색 톤이다. 촬영을 마치고도 잿빛의 암울함, 암담함이 컸다.
▶ 최근 몇 년 동안 사회 문제를 다룬 영화와 TV 드라마에 주로 출연해 왔는데.
= 시나리오를 볼 때 '이 시대 상황에 맞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이는 곧 '대중에게 먹힐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숨바꼭질의 경우 사람이 귀신보다 무서울 수 있다는 사회상이 와닿았다. 윗분들은 솔직히 모르겠고, 일반 대중이 제 영화, 드라마를 봐 주시는 것 아닌가.
극장에 가기 힘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영화관에 간다는 게 밥도 먹어야 하고, 영화 본 뒤 소주도 한 잔 할 수 있으니 1, 2만 원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눌려 있는데, 문화적인 볼거리까지 한정돼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가 출연하는 작품들은 그분들이 쉽게 접하고 공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 앞으로 편한 역할을 맡게 되는 시점은 스스로 '세상이 좋아졌다'고 느낄 때인가.
=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웃음) 영화 속에서 정말 편하게 웃을 기회가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연기하자고 했던 작품이 은밀하게 위대하게였는데, 거기서도 안 웃었다.
최근 4, 5년 동안 옆집 아저씨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 길을 가다보면 "요즘 왜 텔레비젼에 안 나오냐" "아무 것도 안하는데, 뭘 먹고 사냐"고 묻는 아주머니들이 계시다. 이제는 다시 그분들 곁으로 갈 때가 된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