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주목되는 신호는 중국 정부가 지원하는 싱크탱크가 워싱턴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 연구소는 형식적으로는 민간재단인 하이난 난하이 연구재단이 세운 비영리 학술기관이다. 그러나 이 재단은 중국 정부 산하기구인 남중국해 국가연구소가 세웠기 때문에 내용상으로는 중국 정부가 출연한 셈이다.
바꿔말해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 벨트웨이 안에 중국 정부가 처음으로 자국의 싱크탱크를 세운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대미 공공외교는 중국문화 교육기관인 '공자학원'을 세워 중국 정부의 입장을 홍보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이 연구소의 설립은 지난해 시진핑 국가주석이 '소프트파워'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싱크탱크를 설립할 것을 지시한데 따른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지'가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연구소 활동의 주된 목적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둘러싼 미국내 논의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려는데 있다는게 소식통들의 설명이다. 중국은 최근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스트래틀리 군도에 전초기지를 세우고 부지확장에 나서고 있지만 미국의 견제가 결정적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남중국해를 '앞마당'으로 여기는 중국에 맞서 미국은 지난달 필리핀과 합동군사훈련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미국 국방부는 8일(현지시간) 펴낸 '중국 군사보고서'에서 중국 정부의 영유권 주장을 역내 안정을 위협하는 패권확장 기도라는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따라 이 연구소는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와 관련한 중국의 입장을 미국 내에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 외교소식통은 "중국 본토의 싱크탱크가 워싱턴에 지부를 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며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정책논의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도가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추이톈카이 주미 중국대사는 지난달 연구소 개소 기념 콘퍼런스에서 남중국해에서 진행 중인 인공섬 건설을 적극 옹호하는 논리를 설파했다.
이 연구소는 현재 직원이 세 명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연구원들을 지속적으로 채용해나갈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이미 지난해 초부터 워싱턴 싱크탱크계의 최대 '돈줄'로 통하는 사사카와 평화재단을 앞세워 미국 여론주도층을 집중공략하고 있다.
과거사 이슈와 영유권 문제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과거에는 미국 주류 싱크탱크를 지원하는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세미나와 강연, 저술을 통한 직접적 활동에 나서고 있다. 데니스 블레어 사사카와 재단 이사장은 지난달 29일 워싱턴DC의 최고급 호텔에서 지일파 400여명이 집결한 가운데 방미 중인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초청하는 등 적극적 세과시에 나선 바 있다.
이와 맞물려 일본은 지난달 말 아베 총리의 방미를 전후해 과거사 문제나 영유권 관련 자국의 주장을 국제사회에 전파하기 위한 '전략 대외발신' 예산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특히 미국 워싱턴의 싱크탱크와 주요 대학을 상대로 막대한 자금을 투하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게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워싱턴DC의 조지타운대학은 아베 총리가 방미 중이던 지난달 28일 일본 정부의 500만 달러 지원에 따라 일본의 근현대 정치·외교정책을 연구하는 '일본 석좌'(재팬 체어)를 신설한다고 밝혔다. 이에 더해 일본 정부는 뉴욕 컬럼비아대와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 각각 500만 달러를 지원할 계획이다. 이미 미국의 상위 10대 싱크탱크에는 모두 일본석좌가 개설돼있다.
일본은 이밖에 미국내 지일파 육성을 목표로 미·일 인적 교류 프로그램인 '가케하시 이니셔티브'에 30억엔(약 2천500만 달러)을 투입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은 '양'이나 '질'에서 아직 일본에 크게 뒤지고 있지만 지난해부터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워싱턴의 여론주도층을 겨냥한 공공외교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현대기아자동차그룹과 국제교류재단(KF)은 금명간 미국 굴지의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에 한국학 프로그램을 개설할 계획이다. 투입자금은 총 300만 달러로, 현대자동차그룹이 200만 달러, 한국국제교류재단이 100만 달러를 '매칭펀드' 방식으로 출연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2009년 5월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 첫 한국석좌(빅터 차)를 개설한데 이어 지난해 6월 미국 최대의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에도 같은 자리를 개설했다. SK그룹이 200만 달러, 한국국제교류재단이 100만 달러를 출연한 이 석좌에는 캐서린 문 웰즐리대학 정치학과 교수가 임명됐다.
국내 민간 싱크탱크로 워싱턴 내에 사무소를 두고 활동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아산정책연구원은 본격적인 싱크탱크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 중이다.
문제는 이웃 일본에 비해 투자가 너무 저조하다는 점이다. 워싱턴의 여론이 한국과 한반도, 동아시아 문제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감안해볼 때 한국 정부와 민간이 대미 공공외교에 보다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외교소식통은 "워싱턴은 단순히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지식과 정책을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지식의 수도"라며 "한국은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고 미국 내 싱크탱크와 대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정부 차원의 공공외교 자금 지원을 강화해야 하며 기업 등 민간 분야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