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조선왕조실록] 신하들이 세종의 태종실록 열람을 반대하다

음력 3월 2일

조선왕조실록, 오늘은 세종이 태종실록을 열람하려하자 신하들이 강하게 반대했던 이야기를 전합니다.

실록은 임금도 함부로 볼 수 없었습니다. 특히 직전 임금의 실록은 이를 기록한 사관들이 살아있고, 현직 왕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이 많은 탓에 열람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그런데 1438년 세종 20년에 세종이 갑자기 태종실록을 편수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는 아버지 태종때의 실록을 보겠다는 뜻이어서 신하들이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한 신하는 "사초만 갖추어서 전해 두면 후세에서 자연히 사기를 편수하게 될 것이니급하게 할 것이 아니라"고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이 일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태종실록 편수를 지시한 것"이라며 게다가 "이미 '태조실록'을 보았으니 '태종실록'도 또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자손으로서 선대의 사업을 잘 알지 못하면 비슷한 잘못을 다시 저지를 수 있지 않겠냐"면서 '태조실록'을 먼저 열람했던 일을 거론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황희 등은 "만약 사기를 보는 법이 자손에게 전해지면 후세에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두둔해, 사관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임금의 뜻에 순응하려고만 할 것이니 천년 후에는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거듭 반대했습니다.

이어 태종의 일은 세종이 직접 본 것이니 반드시 지금의 실록을 볼 이유가 없다고 하자 그제서야 세종은 물러섰습니다.

■ 세종 20년 (1438년) : '태종실록'을 열람하려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보지 못함
⇒ 사관들이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역사를 기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하들이 실록의 공개를 반대했다. 특히 태종실록을 기록한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어 혹시나 화를 당할까 봐 반대했고 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 광해 원년 (1608년) : 관에서 백성들에게서 가져오는 물화에 대해 정당한 값을 지불하라고 지시
⇒ 광해군이 관아에서 백성들의 물건을 무상으로 강탈하지 못하게 했다

■ 광해 7년 (1615년) : 왕이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다
⇒ 임진왜란으로 주요 궁궐이 불에 타자 임금은 덕수궁에 머물렀는데, 광해군이 재건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덕수궁은 경운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 고종 1년 (1864년) : 동학을 이끈 최복술을 참형에 처하다
⇒ 고종 31년(1894년) 동학혁명을 일으킨 동학 세력은 이미 고종 초부터 정부의 견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고종 20년 (1883년) : 명나라 사람의 자손들을 등용하도록 명하다
⇒ 명나라가 멸망한 후 귀화한 중국인들의 자손을 계속 돌봐준 것으로 보인다

도움말 : 김덕수 (통일농수산 이사)

추천기사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