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업] 성완종 리스트, 대한민국을 뒤흔들다

2011년에 '기자수업'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책 말미에 "만약 독자 중에서 기자생활과 관련한 또 다른 궁금점이 있다면 본인의 이메일이나 SNS를 통해 연락주시기 바란다. 언제나 '소통'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고 적었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많은 분들이 이메일로 궁금한 사항을 물어옵니다. 그 질문과 답변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댓글과 이메일(steelchoi@naver.com)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되면서 대한민국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VIP이름은 없지만 사실상 겨냥했다는 해석이 많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일단 쪽지에 이름이 적힌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게 돼 있습니다. 벌써부터 홍준표 경남지사의 측근이 돈을 받았다고 시인하고 있는게 그 증표라고 할 수 수 있겠네요.

안그래도 바쁜 법조출입기자들이 '성완종 리스트'로 더 바빠질 것 같습니다. CBS노컷뉴스 법조팀의 조근호 반장님, 김중호 지검반장님, 조은정 대검출입기자님, 이지혜 법원출입기자님 힘내십시오T.T 오늘은 말 나온 김에 법조출입기자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 법조, 레임덕을 알리는 신호탄을 쏜다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면 그 위세가 '서슬 퍼렇다'고 할만큼 대단하지만 정권의 막바지, 즉 레임덕이 찾아오는 임기말이 되면 정권의 실세였던 사람들이 법조 기사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지난 2011년 상반기만 봐도 '저축은행 비리 사태'로 정권의 실세였던 사람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구속됐습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MB정권의 레임덕이 시작된거죠.

다시 말해, 정권의 실세들이 검찰에 불려나가기 시작할 때가 바로 그 정권의 '레임덕'이 찾아왔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 '성완종 리스트'의 면면을 보면 이른바 친박으로 분류되는 분이 6명이나 됩니다. 이분들이 검찰에 소환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레임덕'의 신호탄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반검반판(半檢半判)'으로서의 법조기자

2005년 11월에 '대한변협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먼저 올려보겠습니다.

'반검반판(半檢半判)'으로서의 법조기자
지난 6월 이후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귀국', '행담도 개발 의혹 사건', '안기부 X-파일 사건', '두산 비리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끊이질 않으면서 한마디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대한변협신문'에서 이달 초 법조기자 생활에 대한 기고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주제 넘게 '기자와 법조인과의 닮은 점'을 얘기하며 주제를 넘어 보려 한다.

기자는 '취재 후 기사를 쓰는 사람'이란 전제를 달아둔다. 지금은 대검 부장인 모 검사장은 지난해 검찰 조사를 받던 유명 인사들의 잇단 한강 투신을 두고 한마디 하셨다. "검사와 기자는 업을 쌓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가만히 뒤돌아보면 후회와 아쉬움만 남으니 최기자도 업을 쌓지 않도록 주위를 살펴봐라" 팩트 하나를 챙기기 위해 용의자를 신문하듯이 대하기도 하고, 또한 숨겨진 비리가 없는 지 샅샅이 뒤지면서 멀쩡한 생사람 잡기도 하는 게 기자인 걸 보면 검사장의 말씀엔 분명 일리가 있다.

지금은 서울중앙지법에 있는 모 부장판사는 "판결문을 쓰는 판사의 고충을 기자의 그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복잡한 사건에 대해서도 간결하고 명료한 판결문을 쓸 수 있어야 '명판(明判)을 넘어 명판(名判)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취재가 완전치 못하거나 사건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기사가 한없이 길어지고 중언부언했던 기억이 많은 나로서는 부장판사의 지적은 추상같이 날카롭기만 했다.

처음 법조팀으로 발령 났을 때 주위에서는 "입대했다고 생각하고 눈 딱 감고 법조팀에 빨리 적응하라"는 조언이 쏟아졌다. 법조 발령을 입대와 비교하는 걸 보면 이곳 생활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나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길을 함께가는 경험많은 회사 선배들이 있고, 또 머지않아 든든한 후배들도 내 뒤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대로 삶은 바뀌는 법이다.


◇행담도 비리 사건과 성완종


행담도 비리사건 중간 브리핑중인 박한철 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 검사
10년 전 기고문을 갑자기 꺼내든 이유는 2가지 입니다. 첫째 당시도 검찰 조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는 이유에서고 또 하나는 '행담도 개발 의혹 사건'에 故성완종 회장이 연루됐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저는 성완종 회장과도 잘 알지 못하지만 당시 법조를 출입하면서 행담도 사건은 취재한 바 있습니다. 이번 '성회장의 비극'은 제 나름대로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정치권과 숱한 관계를 맺어가며 사업을 하던 성 회장에게 최근들어 악재가 겹치면서 도저히 헤쳐나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성회장에게 찾아온 악재'란 본인이 운영하던 기업이 계속 워크아웃이 되면서 기사회생에 애를 먹고 있었던데다 자원외교 비리가 드러나고 있는데 뒤를 봐줄 '마땅한 권력'마저 없었던 걸 얘기합니다.

예전에 성회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성회장은 행담도 비리 사건 당시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검찰에 끌려와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습니다.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인격적인 모독도 당했다고 친분 있는 정치인과 언론인 등 여기저기에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어떤일이 벌어졌을까요.

행담도 수사를 책임졌던 부장검사가 사건 관련 참고인 백여명에게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당시 그 편지는 '부장검사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기사화도 됐고 미담으로 회자됐습니다.

부장검사의 편지
"빠른 시간 내에 국민적 의혹을 해소해 보겠다는 나름의 의욕이 앞서 불손한 말투나 친절하지 못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몹시 걱정이 됩니다. 혹여 잘못이 있었다면 무더위 속에서 거듭된 야근에 지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머리 숙여 사과를 드립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운 여름에 바쁜 시간을 쪼개고, 시급한 업무를 미루면서 잊혀져가는 기억을 되살려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저희들의 작은 노력이 대한민국을 좀 더 깨끗하고 정의로운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


이런 편지를 쓰게 한 힘은 정치권과 언론에 손을 쓴 성회장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성회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그뒤에 특별사면까지 받게 됩니다.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검찰을 뒤에서 '씹고' 집행유예, 특사까지...말그대로 힘도 있고 빽도 있을 때였습니다.

◇성완종의 유서, 쪽지, 기자와의 통화

그뒤 2006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를 도왔고 이듬해 MB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인수위에도 참여하는 등 친박과 친이를 오가며 수완이 대단하다는 평까지 얻었습니다. 박탈되기는 했지만 19대에 국회 입성도 했구요.

행담도 사건 이후 10년동안 승승장구 하는 듯 보였지만 말년에 실익은 없었고 결국은 '토사구팽'이자 '표적'으로 내몰리면서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정치인과 권력을 한없이 믿었는데, 현실은 이상과는 너무나도 멀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로 모든 걸 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힘이 떨어지자 도와주겠다는 사람도 주위에 없었던 겁니다.

인생사 허무하긴 매한가지지만 씁쓸한 마음 지울 길 없습니다.

벼랑끝에 내몰린 성회장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했던 일들을 되돌아봅니다.

하루 전날에는 자청해서 기자회견도 하고 유서도 남겼으며 자살직전에는 기자와 통화해서 꼭 기사화해달라고 신신당부 하고 몸에는 리스트 쪽지도 남겼습니다. '작정'했다는 뜻입니다. '억울'하다는 표시인 겁니다.

제2의 성완종을 막기 위해서라도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수사는 반드시 진행돼야합니다.

공소시효가 뭔가요?
공소시효는 어떤 범죄사건에 대해 일정한 기간이 경과하면 형벌권을 소멸해 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쉽게 말해서 A가 살인을 저질렀지만 공소시효인 25년간 숨어지내면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공소시효의 인정은 시간이 많이 지나면 그만큼 해당 사건의 증거력도 떨어진다는 의미인 셈입니다. 어떤 범죄자의 공소시효가 가까워지면 사정기관 관계자들은 덩달아 바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시효가 완성돼 처벌할 수 없는 범죄자가 나오면 '수사기관은 그동안 뭐했나'라는 식의 기사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해 정치자금법의 공소시효는 7년 입니다. 성완종 리스트가 사실이라는 가정을 세워도 2006~2007년에 돈을 받은 김기춘, 허태열 전 실장은 처벌할 수 없습니다. 홍준표 경남지사와 홍문종 의원은 2011~2012년이니까 아직 시효가 남아 사실로 드러날 경우 처벌할 수 있습니다.

성회장이 건넨 돈의 성격을 대가성 있는 뇌물로 본다고 하면 1억원 이상 수뢰죄의 공소시효는 10년이어서 김기춘, 허태열 전 실장까지도 처벌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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