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제3공화국의 '데자뷰'가 펄럭입니다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 사랑해야 되겠고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싸움 하다가도 애국가 들리니까 국기배례를 하고…".

지난해말 박근혜 대통령의 '영화평'에서 비롯된 국기 게양 논란이 갈수록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2월말쯤 정부가 국기 게양·하강식 부활을 추진해 논란을 빚더니, 지난달부터는 태극기 부착이 '폭풍 러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군대를 시작으로 소방 공무원과 사회복무요원, 경찰까지 가슴팍에 태극기를 달겠다고 하는군요.

위장 크림을 발라도 적의 눈에 띌 판에 빨강파랑 문양을 심장 위치에 달겠다는 것도, '불에 안 타는 장갑'이 절실한 소방관들의 가슴팍에서 검게 그을린 태극기를 매번 봐야 하는 것도 여간 마뜩치가 않습니다.

우리가 낸 세금이 하필 그런 곳에만 투입돼야 하는 건지도 내심 불편하긴 마찬가집니다. 세수 부족이 심각하네, 그래도 증세는 못하네, 복지를 골라서 하면 되네 식의 논리가 횡행한 요즘이라 불쾌함의 강도는 더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얼마전엔 새로 취임한 '국가기간통신사' 사장이 임원들을 모아놓고 국기게양식을 단행해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어떤 류의 눈길인지는 따로 묘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이곳 역시 국민 세금을 매년 350억원 넘게 지원받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적어둡니다.

◇왜 지금 '태극기'와 '애국가'는 화두가 됐을까요

박근혜정부와 그 옹위세력이 이처럼 '태극기'와 '무궁화' 등을 라켓 삼아 일련의 드라이브를 거는 이유는 바로 '애국'이란 상징성 때문이겠죠. 실제로 집권여당에서 최근 추진에 나선 '애국3법'만 봐도 그 배경은 명확합니다.


'애국3법'이란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이 6일 발의한 '대한민국 국민의례법'과 '대한민국 국화에 관한 법률' 제정안, '대한민국 국기법' 개정안을 스스로 이름 붙인 건데요. 정치부 기자도 아닌 제 메일함에 자료가 들어와있길래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골자는 이렇습니다.

먼저 '국민의례법'은 국가기관이나 정당 등이 공식행사에 앞서 국민의례를 먼저 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행자부 장관이 매년 실태를 평가해서 제대로 한 곳엔 포상을, 안한 곳엔 시정을 요구하도록 돼있습니다. 또 국기에 대한 경례곡이나 묵념곡은 대통령령으로 정한 악보만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국화법'은 요즘 말로 설명하자면 "무궁화는 사랑입니다" 정도 되겠습니다.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정하고, 국화 선양사업을 하는 단체엔 국가나 지자체가 비용도 지불한다는 내용입니다.

사족을 달자면 '8'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숫자이기도 한데요. 옆으로 눕히면 무한대를 뜻하는 기호인 '∞'와 비슷하다고 해서, 일부 민간 단체가 그날을 '무궁화의 날'로 이미 지정해 기려왔다 합니다.

마지막으로 '국기법' 개정안은 내용상 '애국가법'으로 부르는 게 더 적합하겠네요. 안익태의 '애국가'를 대한민국 국가로 명확히 규정하고 임의로 변조할 수 없게 한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애국법'과 '종북사냥법'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발의한 여당 의원은 "일부 정당과 단체에서 공식행사때 국민의례를 생략하거나 애국가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등 논란이 있어왔다"고 취지를 설명했는데요. 아마 지금은 해산시켜 사라진 특정 정당을 상기시키고 싶은 듯합니다.

논란이 있어온 건지, 아니면 논란을 삼아온 건지의 경계는 사실 불분명합니다. 현 정부에서 경계가 분명한 것은 딱 하나뿐인 듯합니다. 바로 '애국'이냐 '종북'이냐의 이분법입니다.

한번 상상해보시죠. 행사나 집회에서 '애국가' 대신 다른 노래를 부르는 경우 앞으로는 어떻게 인식될까요. 애국법 위반, 곧 '비애국자'가 되는 겁니다. 남북이 나뉘어 정전중인 상황에서 '비애국'은 곧 '종북'으로 내몰릴 개연성이 다분하겠죠.

참모들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던 고(故) 노무현 대통령도, 그 노래를 5.18 기념식에서 부르려는 이도, 4.3희생자추념식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르자는 이도 이제는 모두 명쾌한 기준으로 '종북 세력' 반열에 오를 수 있단 얘깁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나 맹세는 또 어떻습니까.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느니 안 올렸느니 여부는 이미 '애국법' 시행 이전에도 '종북'을 낙인찍는 도구로 실전에 여러 번 사용되지 않았던가요.

◇이런 '데자뷰'는 한번으로도 족합니다

이러니 '제3공화국의 데자뷰'란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3선 개헌으로 정권 연장에 성공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대 초반 걸었던 '애국 드라이브'가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박정희정권은 극장에서 모든 영화 상영에 앞서 애국가를 틀기 시작합니다. 또 이듬해인 1972년부터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송하도록 지시합니다. 심지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라고 가르친 교회 주일학교 교사가 구속되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러한 '애국 드라이브'는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그해 10월 유신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의 사후에도 국기에 대한 경례는 신군부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1984년 법제화됐다가, 민주화 이후인 1989년에야 폐지됩니다.

설마 박근혜 대통령과 현 정부의 '애국 드라이브'가 선친과 똑같은 일련의 프로세스를 염두에 둔 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 종착역이 그리 바람직했던 것도 아님은 모두 아실테니까요.

특히 이 점만은 우리 모두가 꼭 기억해둬야 할 겁니다. 국기에 맹세를 하고 국민의례를 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 나라와 미국 정도밖에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물론 예전에도 없지야 않았습니다만, 그 면면을 살펴보면 또 어떤가요.

히틀러 치하의 독일,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국왕 치하의 프랑스에 그런 맹세가 있었을 뿐입니다. 가깝게는 일제가 우리에게 강요했던 '황국신민서사'도 있었구요. 모두 왕정이 붕괴하고 파시즘이 패망하면서 자취를 감춘 건 물론입니다.

저 천문학적 방산 비리를 저지른 군과 국방부의 시계마저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는데, 창조경제를 일구기 바쁜 대한민국의 시계가 이렇게 퇴행해도 되겠습니까.

선출직을 비롯한 공직자들로부터 '국민에 대한 경례'를 받진 못할지언정, 떠올리기 싫은 '데자뷰'는 이쯤에서 마침표를 찍고 싶은 게 투표권을 가진 우리 국민 모두의 심정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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