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26일 최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최씨에게 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대전지법에 돌려보냈다.
최씨는 1978년 서울대 재학 중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에게 체포된 뒤 약 20여일간 불법 구금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은 최씨의 청구를 특별한 설명없이 기각했다. 하지만 2심은 "긴급조치 9호의 내용은 유신헌법에 의하더라도 명백히 위헌이고, 긴급조치 9호를 발령한 대통령과 수사를 감행한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들의 고의나 과실이 인정된다"며 민사상 불법행위로 인정해 200만원 지급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를 다시 뒤집었다. 대법원 재판부는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령행위 그 자체로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판결했다.
즉, "긴급조치 9호가 사후적으로 법원에서 위헌, 무효로 선언됐다고 하더라도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였다"는 것이다.
이어 재판부는 "대통령은 국가긴급권의 행사에 관해 원칙적으로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고도 부연 설명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동은 정치적 책임만 있을 뿐 불법행위에 따른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으로 귀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긴급조치 발령 자체가 민사상 불법행위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첫 대법원 판결이다. 그간 몇몇 하급심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판단이 엇갈려왔다.
재판부는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의 불법 체포, 구금 행위에 대해서도 "사태 종료된 후 소송 제기까지 30년 이상 흘러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덧붙였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긴급조치 위반자 전부가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수사과정 등에서 공무원의 불법 행위가 있었던 경우에만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긴급조치9호 피해자들의 국가 손해배상 책임을 대폭 줄인 것이다.
즉, 최씨처럼 긴급조치 피해자 중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지 않고, 단순히 구금되거나 체포됐던 경우는 국가 배상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불법 행위에 대한 소멸시효가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유죄 판결을 받고, 추후 재심을 청구해 무죄판결을 받은 일부 피해자들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논란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무효로 선언된 긴급조치 9호에 대해 대통령의 '행사권', '발동권'이라는 개념을 입혀 국가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각종 과거사위 사건에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점차 축소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며 "대법원 전합체 판결 취지와는 대치되는 방향이라 더욱 문제이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