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3학년 시절 졸업도 하기 전에 동기들보다 1년 먼저 나가 덜컥 붙어버린 신인 드래프트. 그것도 1라운드 3순위, 비교적 높은 순위로 뽑혀 첫 시즌부터 실전에 나섰습니다. 얼떨결에 밟은 KBL 무대, 작은 호랑이 유도훈 감독님의 매서운 질책과 지도에 '어, 어?' 하는 사이 정규리그가 벌써 지났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플레이오프(PO). 대학 시절 여러 차례 아픔을 안겼던 준일이 형(연세대 출신 삼성 신인 센터 김준일)도 밟지 못한 큰 무대입니다. 그 사이 올스타전 토종 덩크왕에 오르기도 했지만 역시 20살을 갓 넘은 신인에게는 긴장감이 절로 드는 부담스러운 경기입니다.
그러나 정신줄을 놓을 새도 없이 누군가가 큰소리를 칩니다. 돌아보니 검은 피부의 주장 리카르도 포웰(32 · 196cm)입니다. 행여나 딴 데 정신을 팔까 '집중하라'는 뜻의 "포커스(focus)"를 한 스무 번 이상이나 외친 것 같습니다. 그렇게 PO 데뷔전이던 9일 SK와 6강 PO 1차전을 치렀는데 21분을 뛰는 동안 12점 4리바운드, 3점슛도 3개나 들어갔습니다.
▲패색이 짙던 SK와 PO 2차전
그냥저냥 대답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호통소리가 들립니다. 옆에서 함께 몸을 풀던 포웰 주장입니다. 연신 손으로 귀를 가리키는데 다른 데 신경쓰지 말고 트레이너의 스트레칭 구호를 똑바로 들으라는 겁니다.
온전히 집중력을 쏟아부어 결전에 대비해야 할 시간에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게 이른바 '포 주장'의 눈에는 영 마뜩치 않았나 봅니다. 황송해 하며 서둘러 물러나는 기자의 모습에 제가 더 무안합니다. 그 정도는 얘기해도 괜찮은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기자와 한 마디 할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정신을 더 가다듬고 경기를 준비했습니다.
SK의 거센 반격에 경기는 접전에 접전, 에이스 애런 헤인즈가 부상으로 빠졌다지만 과연 정규리그 3위의 강팀다웠습니다. 죽을 힘을 다했는데도 3쿼터까지 무득점. 일단 득점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팀 최장신으로서 골밑을 사수해야 한다는 일념이었습니다. 그러다 찾아온 4쿼터 기회. 놓치지 않고 8점이나 넣었지만 패색이 짙었습니다.
역시 선형이 형(SK 김선형)은 명불허전이었습니다. 72-72, 동점이던 경기 종료 40초 전 우리 팀에 비수를 꽂는 3점포를 터뜨렸습니다. 70-72로 뒤진 종료 1분15초 전 사이드에서 던진 내 3점슛은 백보드 위쪽 모서리를 맞혔는데 역시 MVP 출신 에이스는 달랐습니다. 분명히 그 순간만큼은 우리 팀의 패색이 짙었습니다.
▲효근이 농구 인생에 가장 극적인 승리
앞서 포 주장은 내 슛이 빗나간 다음 종료 50초 전 상대 200cm 장신 듀오 김민수, 최부경 형을 잇따라 제치는 환상적인 스핀 무브로 동점 득점을 올려줬습니다. 내 어처구니 없는 슛을 만회해준 고마운 점수.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단 선형이 형에게 3점포를 맞은 다음 공격에서 포 주장은 3점을 노렸습니다. 단숨에 동점을 만들려는 시도였지만 빗나갔습니다. 이어진 우리의 전임 주장 이현호 형이 파울로 끊어 주어진 선형이 형의 자유투. 1개만 들어가도 승부는 사실상 굳어질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3점슛을 그렇게도 잘 넣었던 선형이 형의 자유투는 모두 불발,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어 포 주장은 성큼성큼 망설이지 않고 돌파, 민수 형과 박상오 형을 뚫고 레이업슛을 얹어넣었습니다. 74-75, 1점 차에 남은 시간은 16초. 또 다시 파울 작전에 자유투 기회를 얻은 SK. 이번에도 거짓말처럼 SK 박승리 형의 자유투는 모두 빗나갔습니다.
이번에도 차바위 형의 리바운드. 남은 시간 13초, 공은 다시 포 주장에게 갔습니다. 또 다시 포 주장은 지체없이 SK 장신숲으로 들어갔고, 유려하기 짝이 없는 스핀 무브에 이은 레이업슛이 아름답게 림을 갈랐습니다. 76-75, 대역전극. 내 농구 인생, 아니 22살 삶에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인터뷰에서도 동료 챙기는 '포 주장'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경기 후 코트에서 진행된 중계 방송 인터뷰는 내가 하고 있었습니다. 극적인 승리에 생애 첫 PO 인터뷰까지 신이 나서 "축제처럼 즐기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 이날의 히어로 포 주장이 쑥 끼어들더니 빙긋 웃으며 사라집니다. 인터뷰를 해야 할 주인공이었는데 말입니다.(사실 포웰은 지난 1차전 대승을 이끌며 인터뷰를 이미 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부터 다시 3인칭 시점으로 돌아옵니다. 작성자인 제가 기자실에서 이날 주인공들을 마주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포웰은 경기 후 "가로채기를 빼고 모든 부분에서 뒤진 어려운 경기였는데 열심히 선수들이 뛰어준 게 승리 요인"이라고 공을 동료들에게 돌렸습니다. 이어 "다음 경기에서는 이런 모습 없이 한 단계 발전된 모습 보여야 할 것 같다"고 성숙한 답을 내놨습니다. 주장으로서 경기 전 선수들에게 "늘 하는 얘기지만 집중력을 많이 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면서 "1명만 집중력을 잃어도 4명이 무너지는데 PO는 정규시즌과 달리 더 큰 집중력을 요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엄청난 활약을 펼친 탓에 집중된 질문에 포웰은 옆에 있던 효근이와 차바위를 가리키며 취재진에게 "왜 나한테만 물어보느냐"며 반문했습니다. 이들도 함께 활약했으니 질문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정효근이 백보드를 맞는 슛도 쐈지만 잘했다"고 웃으며 어깨를 치기도 했습니다.
국내 선수들과 엄연히 피부 색과 국적이 다른 외국인. 그러나 자기보다 동료들의 인터뷰를 챙기는 그는 여느 국내 선수들과 다를 바 없는 KBL을 대표할 만한 주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들었는데 새로 시작하라고?"
그렇게 팀과 동화된 포 주장은 이제 전자랜드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새롭게 바뀌는 KBL 규정에 따라 현재 외국인 선수들은 기존 소속팀과 재계약이 아닌 드래프트를 통해 다음 시즌에 참가해야 합니다. 2012-13시즌부터 뛴 포웰도 전자랜드가 아닌 다른 팀의 지명을 받으면 떠나야 하는 겁니다.
이런 현실이 서글프기만 합니다. 포웰은 "그동안 각자 팀에서 이뤄놓은 게 있는데 다른 팀에 가면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면서 "트라이아웃 등 모든 부분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적잖은 선수들을 KBL에서 떠나게 할 수 있는 제도"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재계약하면서 매년 10%씩 인상된 연봉도 새로 뽑히면 처음부터 반대로 깎이게 되는 현상도 생긴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효근이는 포웰 주장의 첫 인상에 대해 "첫 프로 시즌에 처음 본 외국인 선수인데 주장까지 맡아서 신기했다"고 말했습니다. 곧이어 "그러나 다른 선수처럼 단지 다른 나라에서 뛰어주는 용병이 아니라 다른 국내 선수처럼 동료들에게 정말 많은 관심을 갖는다"면서 "평소에는 친구처럼, 형처럼 대해주는 진정한 주장"이라고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경기 때는 180도 변합니다. 효근이는 "막상 경기에 들어가면 완전히 달라진다"면서 "끊임없이 집중하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어쩔 때는 잔소리가 지겨울 정도"라고 강조합니다. 이어 "그래서 저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지 생각에 더 열심히 할 때도 있다"고 귀띔합니다.
갓 프로에 데뷔한 신인에게 농구의 진짜 재미를 느끼게 해준 포 주장, 아니 포 형. 한국형 선수가 다 된 포웰은 이제 정든 전자랜드 선수들과 작별을 고할지도, 아니면 적으로 만날지도 모릅니다.
효근이가 포웰과 오늘의 동지에서 내일의 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농구의 재미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을 맛보게 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로 선수로 성장한 것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KBL이니까요.
p.s-포 주장, 집중하는 것은 좋지만 경기 전에 너무 긴장해서 선수들 단속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경험이 적은 신인들의 집중력이 자칫 흐트러질까 취재진과 대화도 마땅치 않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2차전 때 효근이를 본다면 기우가 아닐까 싶소. 4차전 승부처 때 8점을 집중시켰지 않소. 물론 효근이도 당신, 포 주장의 존재를 믿고 신인답지 않은 플레이를 펼치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말이오. 다음 시즌에도 꼭 KBL 무대에서 뛰는 당신을 보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