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미힐미'부터 도용까지…이충호 작가의 못다한 이야기

[노컷 인터뷰] "문제제기는 누구나 할 수 있어야…대다수 이면합의로 마무리"

3월 10일 오후 서교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충호 작가. (사진=유연석 기자)
그는 베테랑이다. 한 직업에 23년 동안 종사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고, 예술 노동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90년대, 소년지의 인기 작가였던 그는 출판만화 시대를 떠나보내고 웹툰에 뛰어들었다.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도 그는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펼쳤다. 그 결과 그의 웹툰은 인기를 모으며 드라마화까지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모두 아는 SBS 수목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이하 '하지나') 원작자 이충호 작가의 프로필이다.

시장의 변화에 살아남을 정도로 노련한 작가인 그가, 지난 1월 갑작스레 여론의 심판대에 섰다. MBC 수목드라마 '킬미, 힐미'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킬미, 힐미'가 '다중인격자의 두 인격과 사랑에 빠지는 한 여자의 로맨스'라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비난의 화살은 모두 그를 향했다. '하지나'의 제작사조차 '당황스럽고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난색을 표하며 '이충호 작가의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선을 그었다.

홀로 모든 비난을 감내해야 했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최종 입장문에서는 도리어 만화계 전체의 문제로 이야기를 확장했다. 방송·영화 등의 콘텐츠들에 웹툰의 아이디어가 도용되는 일이 있고,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으로서 많은 만화가들이 작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게 힘쓰겠다고 선포한 것. 마치 성명서와도 같은 그 공식입장이, 이충호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샘솟게 했다. 왜 그는 끝까지 '킬미, 힐미'를 향한 쓴 소리를 멈추지 않았을까. 만화계 '아이디어 도용'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가 진짜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늦은 점심, 홍대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충호 작가는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막 연재를 끝낸 참이라 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하지나'도 어느새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3월의 어느 날,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 처음, 어떻게 아이디어 도용을 의심하게 됐나요?

사실은 '하지나'의 드라마 판권계약을 하던 당시에 '킬미, 힐미'라는 드라마가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 사업대행사 쪽에서 기획서를 구해서 줬어요. 기획서를 보고 '제 만화를 봤구나'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사업대행사 측에서도 '하지나' 드라마 제작을 전제로 판권계약을 했으니 가만히 있는 거지, 우리 원작의 드라마 판권계약 없이 '킬미, 힐미'만 나왔다면 소송을 진행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7개의 인격으로 바꿨을 뿐, 우리 작품의 핵심 아이디어인 이중인격자인 한 남자의 두 인격과 여자의 삼각관계라는 설정이었으니까요.

▶ 바로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아직 제작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소송을 할 수는 없었어요. '하지나' 제작사에서도 드라마를 만들 거였고요. 드라마('킬미, 힐미')가 어떻게 나오는지 그 결과물을 보고 문제제기를 하자는 게 사업대행사의 입장이었고 그 판단이 옳다고 생각해서 저는 따랐죠. 또 '하지나' 제작사 쪽에서는 본인들이 MBC에 어필을 할 테니 참아달라고 했었고요. 그래서 사업대행사와 저는 '킬미, 힐미'가 어떤 모양새로 나올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소문에 의하면 기획서와 달리 실제 드라마는 많이 바꾼다는 이야기도 있었거든요.

▶ 제작사에서는 어떤 입장이었나요?

제작사는 드라마 자체로 승부를 하고 싶어 했어요. 아이디어 도용 이슈 같은 것이 터졌을 때 순수하게 드라마로 승부가 되지 않으니, 드라마가 방송되더라도 원작자 분은 참고 기다려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어쨌든 저도 드라마가 잘 되길 바라는 입장이어서, 그 입장에 찬성했고, 그렇다면 두 드라마가 후반부로 접어들었을 때쯤 문제제기를 하겠다고 했어요. 원래 계획은 그랬습니다.

▶ 그런데 지난 1월 SNS에 올린 글로 이슈의 중심에 섰어요.

제가 웹툰 작가이긴 하지만 SNS나 이런 인터넷 세계에 익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세계에 익숙하지 않아서 미숙했어요. 사적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이고 거친 글을 썼습니다. 그 공간에 팔로워가 1000명 조금 넘는 정도에요. 대부분 팬이나 지인들이 저와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편한 공간입니다. 또 만화를 영상으로 끌고 갔던 경험치가 많지 않은 사람이라, 그 파급효과를 몰랐죠. 동시에 비슷한 작품이 방송되고 있고 누구나 이슈 포인트가 없을까 바라보고 있을 때, 먹이거리를 던져준 꼴이었어요. 그래서 원하지 않는 순간에 링 위에 올라가게 됐습니다. 사실 그 직후에도 제작사 쪽에서는 시끄러워지길 원치 않으니 조용히 계시고, SNS 글도 삭제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사실관계를 확인을 위한 입장발표만 한 차례 하고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어요. 여론이 제게 불리하다는 걸 알았지만 '하지나'와의 의리를 위해 참았습니다.

▶ 그때 제작사 쪽에서 이충호 작가를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해요.

저도 당황했어요. 공교롭게도 지성 씨가 인터뷰한 부분을 링크한 바람에 지성 씨 팬 분들이 분노도 하고 그랬죠. 지성 씨에 대해 문제를 삼자는 게 아니라, '킬미, 힐미'를 만든 사람들에게 내가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다고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사실 지성 씨나 '킬미, 힐미' PD분께서 인터뷰를 하실 때 그 뒤에 '하지나'가 나온 것을 놓고 우리가 오리지널리티(독창성)가 있는데 뒤따라 나온 게 거슬린다는 뉘앙스였어요. 원작자 입장에서 그 부분이 화가 났습니다. (SNS 사건) 이후에 제작사나 방송사나 제게 연락을 한번쯤은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오지는 않았어요. 주변에서는 이 사안과 관련해서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긴밀하게 되지 않은 것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윤태호 작가는 제작사, 사업대행사, 원작자가 어떻게 이렇게 따로 놀 수가 있냐면서 '형 이거 잘못된 거 아니야? 왜 이랬어?'라고 묻기도 하고 그랬어요.

▶ 그럼 '하지나' 제작단계에서 제작사나 방송사와는 교류가 많이 없었나요?

제작사와 직접 대화는 안하고 사업대행사가 연결해서 이야기를 나눠요. 작가에 따라서는 긴밀한 경우가 있고 저처럼 매니지먼트를 중간에 끼고 하는 경우도 있죠. 제작사나 방송사 관계자들과 만나서 밥을 먹거나 작품 관련 도움이 필요해서 만난 적은 있는데 직접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어요.

3월 10일 오후 서교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충호 작가. (사진=유연석 기자)
▶ 제작사와 입장이 달라진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건 제 주변 전문가의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원작과 별개로,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어쨌든 '킬미, 힐미'가 먼저 기획된 거니까 '하지나'는 후발 주자였던 거죠. 판권을 사서 명분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그렇다보니 저와 함께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하고 이의제기를 하기에는 껄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원작자인 제 입장에서는 2011년에 그린 작품이니까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요.

▶ '하지나'의 원작자인데 그러면 드라마화 과정에서 참여도는 어느 정도였나요?

작가 경우에 따라 달라요. 기본적으로, 원작에서 파생된 2차 콘텐츠는 새로운 창작물로 보고 있어요. 또 다른 창작자인 PD나 작가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죠. 그건 그분들의 세계고 새로운 창작물인데 제가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하는 게 오버라고 생각해요. 떠나보내는 순간, 내 자식은 아닙니다. 새로운 창작물이고, 저는 그냥 원작자로 그것을 누리면 되는 것이지, 영상물의 성패가 저의 실패사례나 성공사례가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 SNS 글 이후에 많은 논란이 있었죠. 그것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도 있을 것 같아요.

일단 '킬미, 힐미' 측에서 제가 노이즈 마케팅을 했다고 주장하는 기사가 많이 나왔는데요. 그건 정말 화가 나는 일입니다. SNS 글을 쓴 시점이 '하지나' 방송 시작 전이었어요. 이미 배우 현빈과 한지민이 출연을 하면서 '별에서 온 그대' 이후에 최대 기대작이라는 기사가 쏟아져 나올 정도였죠. 드라마가 잘되느냐, 되지 않느냐를 판단하기 전에 남긴 글입니다. 그런데 '킬미, 힐미' 측에선 그 이후에 그 쪽 드라마 시청률이 더 나오니까 제가 앞에 쓴 글과 뒤에 자신들의 시청률 승리를 묶어서 노이즈 마케팅을 했다고 하는 겁니다. 시점상으로 논리적 오류가 생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아주 건강한 방법으로 마케팅을 할 수 있는 '핫'한 드라마의 원작자인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할 이유가 없었어요. 오히려 이번 사건으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구인지 되묻고 싶어요.

▶ 어차피 웹툰 '지킬박사는 하이드씨'도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설정을 가져온 게 아니냐는 반박도 있었어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1886년 출간됐고, 저자인 로버트 루이슨 스티븐슨은 1894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니까 1964년에 저작권이 소멸됐고요. 저작권 권한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누구나 책을 낼 수 있고 원작 그대로 만화를 그려도 이의제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창작물들이 당당하게 변주를 하는 것이고요. 심지어는 괴기소설과 로맨스만화라는 큰 차이가 있어서 아예 다른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작품을 언급하면서 '너도 마찬가지'라는 프레임을 만드는 건 큰 오류고 상식부족이라고 봅니다.

▶ 웹툰 연재 이전에 이중인격 설정이 겹치지 않기 위해 사전 작업을 한 게 있나요?

'지킬박사는 하이드씨'를 그리기 전에 이중인격 관련 작품들은 나름 많이 찾아봤습니다. 2007년에 '두 얼굴의 여친'이라는 영화도 있었는데 그건 그냥 다중인격인 여자주인공을 남자주인공이 좋아하는 이야기였어요. 어디에도 다중인격자의 인격들과 삼각관계에 빠지는 내용은 없었어요. 다중인격자의 두 인격과 한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삼각관계 로맨스는 제게 오리지널리티가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SNS는 글자 수에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삼각관계를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어서 간략하게 쓴 글인데, 그것을 빌미 삼아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정리하는 입장발표를 블로그에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유감표명을 한 SNS 글들을 다시 끄집어내서 문제를 삼더라고요.

▶ 그 최종 입장발표문을 두고도 계속 많은 이야기가 오갔죠?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은 보도와 '킬미, 힐미' 측의 답변을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제가 '대가를 원한다'는 기사에 '킬미, 힐미' 측의 '대가 왜 주나?'라는 대응이었어요. 제 입장발표문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마구 만들어낸 이야기들 아닌가요? 입장발표문 앞부분의 아이디어 도용에 대한 문제제기와 뒷부분의 '만화가협회장으로서 많은 만화가들이 작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다'라는 말을 뒤섞어버린 거죠. 제가 대가를 원한다면 법적인 준비를 해서 소송을 하지, 입장발표문에서 대가를 달라고 하겠습니까.

▶ 아이디어 도용을 문제 삼아 저작권 소송을 한다면, 승소 가능성은 있나요?

현재로서는 애매한 상황입니다. 변호사와 이야기를 해봤는데 아이디어 도용과 표절의 경계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디어 도용만 가지고는 표절 판정을 받기 쉽지는 않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 표현이라든가, 이런 지점에서의 디테일이 아이디어 도용과 합쳐졌을 때 표절로 인정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안타깝게도 승소한 사례가 많지 않죠. 겉으로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대개 작가가 제작사 쪽에 소송을 걸 경우, 이면합의로 마무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만화계에는 승소 사례는 없는 거죠.


▶ 그 이면합의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나요?

저작권 소송을 했을 때, 저쪽에서는 명예훼손으로 더 큰 액수로 소송을 거는 거예요. 개인 대 자본의 싸움이 되는 거니까 작가는 위축될 수밖에 없죠. 소송 절차가 복잡하기도 하고, 불편한 상황 속에서 연재도 해야 되니까 그쪽에서 합의를 제안하면 합의금을 받고 끝내는 겁니다. 제작사 쪽에서는 해외사업도 해야 되는데 그걸 움직일 수 없게끔 만들면 사업 진행이 안 되잖아요. 도덕성에 타격을 입을 수도 없으니까 적당히 타협해서 합의금을 주고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게 덮어버리는 거죠.

3월 10일 오후 서교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충호 작가. (사진=유연석 기자)
▶ 이제 드라마도 후반인데,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법적 대응은 검토할 계획인가요?

되게 애매하고 민감한 부분이 있어요. 마음의 분노가 컸고, 제 핵심 아이디어가 도용당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보니, 거의 90% 정도 소송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강풀 씨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형님, 제가 보기에는 좀 신중하셔야 된다. 형님이 그냥 개인만화가 이충호가 아니라,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이기 때문에 이것이 만화계 대 드라마계의 충돌로 보일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서 '소송에서 패하면 어떡하실 거냐. 그렇게 되면 그것이 형님 개인의 패배가 아니라 만화계의 패배가 되고 곧 경계가 될 거다. 그러면 앞으로는 누구도 문제제기를 못하는 경계라인을 만들게 되는 건데, 그 게임에는 올라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충고를 듣고 소송하고자 하는 마음이 50% 아래로 내려가버렸어요. 게다가 윤태호 작가 같은 경우에도 '드라마제작사, 사업대행사, 그리고 형 이렇게 셋이 함께 소송을 한다면 모를까, 혼자 링 위에 올라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언을 하고 있는데, 사실 사업대행사는 모르겠지만 드라마 제작사의 태도는 저도 잘 모르겠고 예측도 안 되고요. 솔직히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위치고 상황입니다. 심경이 복잡해요.

▶ 그러면 만화계 작가들은 이런 갈등에 대해 어떤 생각인가요?

작가들이 문제제기를 하는 것 자체에 대해 여론의 압력을 받는 것은 굉장히 불편한 일이라는 데는 대부분 같은 의견입니다. 윤태호 작가의 말을 빌리면 세련된 방식이라는 전제하에서 문제제기는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의심을 받은 상대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대응하면 되는 거고요. 왜 문제제기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 이렇게 공격을 받아야 하는지 용납이 되지 않는 상황이에요. 분명히 제 작품을 보고 만들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으로 문제제기를 했는데, 어째서 저나 강경옥 씨 같은 나름 만화계의 중견작가들이 이런 엄청난 여론의 공격에 시달려야 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 문제제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져야 한다고 보나요?

세련된 방식의 문제제기가 아니었다는 점에서는 제 실수가 분명 있었지만, 그 문제제기 방식에 대해선 분명히 유감도 표명했죠. 그렇다면 그 뒤에는 건강한 시선으로 왜 이런 분쟁이 생겼는지를 합리적으로 검증하고 전문가들과 함께 논의를 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부분은 뒷전이고 드라마 제작사라는, 자본의 힘이 만드는 여론전으로 무차별적이고 건강하지 않은 방식을 이용해 개인인 작가를 괴롭히는 폭력적인 측면이 너무 강하게 드러나 버렸거든요. 분명히 굉장히 불편한 방식이고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중도적 입장에서, 또는 약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여론이 더 많이 나오고 자리잡아주었으면 감사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만화계가 더 강해지고 세련돼져야할 필요도 있겠죠.

▶ 그럼 '킬미, 힐미'에 대한 작가님의 합리적 의심은 어떤 것이었나요?

드라마나 영화 제작자들이 새로운 창작의 한계를 느끼고 아이디어를 위해 웹툰을 보는 것은 최근의 트렌드이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만화계 쪽에서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상 쪽에서 웹툰을 '핫'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죠. '킬미, 힐미' 작가분과 제작사는 그 드라마를 구상하고 기획한 시점이 2012년이라고 인터뷰나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습니다. 그런데 제 웹툰인 '지킬박사는 하이드씨'가 2011년 작품입니다. 그분들은 우리가 오래전부터 준비를 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2012년이란 시점을 밝힌 것 같은데, 공교롭게도 그들이 주장하는 그 오래전 2012년이 제 작품 발표 1년 후라는 거죠. 의심이 갈 수밖에요. 시점 적으로 1년 뒤이고, 영상을 만드는 분들이 아이디어 공급과 원작판권 확보를 위해 당연히 웹툰을 찾아보는 대한민국이라는 장소 안에서 벌어진 일이니까요. 확신할 순 없지만 웹툰이 '핫'한 시점에, 불과 1년 사이를 두고 대한민국에서 기획을 했다면 합리적으로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아니냐는 겁니다.

▶ 세부적으로 '킬미, 힐미'의 어떤 부분이 그런 도용과 연관돼 있다고 보나요?

'다중인격자인 한 남자의 두 인격과 한 여자의 삼각관계'라는 유니크한 아이디어를 그들이 사용했다는 측면을 외부에서도 기사로도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킬미, 힐미' 5화의 경우는 '지킬박사는 하이드씨'의 1화처럼 오리진이 신세기, 차도현 두 인격과 키스를 하거나 하려합니다. 8화, 9화의 경우는 기사 검색을 해봐도 '차도현 대 신세기, 오리진과 삼각관계'라는 기사들이 뜹니다. 누가 봐도 7개의 인격과 상관없이 차도현, 신세기 두 인격의 대립이고, 오리진과의 삼각관계 이야기였다는 거죠. 그래서 표절과 소송 여부를 떠나 핵심아이디어를 그들이 알고도 도용했다고 확신할 순 없어도, 먼저 유사한 핵심아이디어를 만들어낸 작가 입장에서 뒤에 나온 창작물에 대해 합리적 의심만큼은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 만화계에서 이런 사례가 빈번한가요?

영화에서 무단으로 가져간 핵심 아이디어에 대해 소송을 했다 패한 경우도 있고, 방송 전에 너무 빨리 문제제기를 해서 패소한 경우도 있는 걸로 알아요. 우리들끼리 SNS에서 표절이냐, 아니냐 내부적으로 이야기하다보면 (안건이) 들어가거나 올라옵니다. 작가 개인들이 끊임없이 의심을 하고 기분 나빠하는 사례들은 자주 있는 게 사실이죠.

▶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이기도 한데, 이런 갈등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부분은요?

먼저 방식을 세련되게 하자는 이야기를 주변 작가들과 합니다. 저처럼 SNS로 감정적인 글을 쓰지 말고, 조용히 변호사를 통해 법적 문제를 먼저 알아보는 태도를 취하자고요. 협회 내부적으로 이런 갈등과 관련된 TF팀을 만들고자 윤태호 부회장 등 만화계 쪽 전문가들과 논의 중이에요. '별에서 온 그대'와 강경옥 작가간의 소송을 담당했던 이영욱 변호사가 팀장을 맡아주기로 했고요. 유사한 사태가 터졌을 때의 교육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23년차 작가인 저도 세련되게 대응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했다가 예측불가능하고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버렸으니까요. 그리고 아이디어 도용과 표절 사이의 경계를 조금은 우리가 먼저 다듬을 필요가 있겠죠. 작가마다 의견이 다르고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유니크하고 핵심적인 아이디어인 경우에는 도용만 가지고도 표절 사례를 만들 수 있도록 만화계가 더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현재의 법적인 해석을 떠나서 '이야기업계'의 미래를 위해서.

▶ 갈등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웹툰과 영화, 방송 등이 손잡는 일은 늘어날 것 같아요.

이러한 일부 사례들이 웹툰과 영상 간 협력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저를 비롯해서 어떤 만화가도 원치 않아요. 그래서 영상화의 경험이 풍부한 강풀 작가 같은 친구가 제게 신중하라는 충고도 해준 것이고요. 이건 개인적인 바람에 불과합니다만 드라마 쪽 관계자들과 만화계 사람들, 또 법조계의 전문가들이 함께 공청회를 한다거나 자리를 만들어서 조금 더 합리적이거나 서로 간에 조심하는 부분을 만들어나간다면 더 건강한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아이디어 도용에 있어서 만화계 쪽에서 피해의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몇 차례 미묘한 방식으로 아이디어 도용을 당했고, 패소하거나 승소의 사례 없이 합의로 끝난 것밖에 없으니까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작은 사례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사실이에요.

▶ 웹툰 작가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서요?

아직까지는 제 개인 사례에 대해 윤태호, 강풀 등 동료들의 조언 수준이지만, 곧 있을 예정인 만화계 쪽 언론이 기획한 만화계 대담 등을 통해서 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만화계 전반의 아이디어 도용 문제를 짚어 나갈 생각입니다.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인 윤태호 작가와 TF팀을 맡아줄 이영욱 변호사, 또 업계 전문가 등과 먼저 대담 등을 통해 의논을 해나갈 거고요. 이사회에는 이미 영상화 경험이 풍부한 강풀, 이종규, 신영우 이사 등 여러 작가들이 함께하고 있으니 다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해 나갈 생각이에요. 경험이 많은 그들의 의견이 중요할 겁니다. 우호적으로 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고 잘 만들어갈 수 있느냐도 무척 중요한 일이니까요. 또 만화계 전반적인 도용과 표절, 이런 부분에 대한 분노와 피해의식, 어떻게 세련된 방식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지도 이야기를 나눠야 할 거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도 함께 모여서 다 같이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대응책을 만들려고 해요. 저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만화계의 행보를 우호적인 시선으로 지켜봐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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