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와 축구, 농구, 배구 등 한국의 4대 프로 스포츠에서 유일하게 외국인 선수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를 정복하지 못한 종목이 있습니다.(엄밀히 따져 따로 리그가 펼쳐지는 여자프로농구(WKBL)까지 5대 스포츠일 겁니다.)
바로 남자 프로농구(KBL)입니다. 지난 1997년 출범 뒤 18번의 정규리그 MVP 투표에서 단 한번도 외국인 선수가 영예를 안은 적이 없습니다.
프로야구와 축구, WKBL, 남녀 배구 등은 모두 외인 MVP가 배출됐는데 유독 KBL만 굳게 문호가 닫혀 있는 모양새라고 할까요?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맥도웰-힉스도 못 받은 MVP
KBL 정규리그 MVP는 프로 원년 강동희 전 동부 감독(당시 기아)을 시작으로 죄다 국내 선수 일색입니다. 이상민 삼성 감독(당시 현대), 서장훈(은퇴 · 당시 SK), 조성원(당시 현대)·김승현 해설위원, 김병철 오리온스 코치(이상 당시 동양), 김주성(동부), 신기성 WKBL 부천 하나외환 코치(당시 TG삼보), 양동근(모비스), 주희정(SK · 당시 KT&G), 함지훈(모비스), 박상오(SK · 당시 KT) 등입니다.
이들의 MVP 자격이 없었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충분히 팀에 엄청난 기여를 했고 리그에서 가장 값진 선수라 할 만한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전부 외국인 선수를 뛰어넘는 활약을 펼쳤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만약 이상민 감독의 현대 시절 '영혼의 파트너' 조니 맥도웰이나 김승현 위원의 동양 시절 단짝 마르커스 힉스를 언급한다면 얘기는 다를 겁니다. 모두 당시 KBL을 씹어먹을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팀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MVP로도 전혀 손색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2011-2012시즌부터 외국인 선수상을 폐지한 이후에도 이런 기조는 이어졌습니다. 윤호영(동부), 김선형(SK)에 귀화 선수 문태종(LG)이 MVP를 차지했습니다. 외국인 선수는 3년 연속 베스트5 외에는 수상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습니다.(아마 귀화 선수 문태종도 외국인 신분이었다면 받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2011-12시즌 외국인 선수들은 KBL이 계량하는 거의 전 부문을 석권했습니다. 득점과 리바운드, 도움, 가로채기, 블록슛, 덩크슛, 자유투까지 3점슛(김효범, 당시 SK)을 빼고 모두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MVP 경쟁은 국내 선수의 몫이었고, 다음 시즌 애런 헤인즈가 팀 동료 김선형과 경쟁했지만 11-84, 압도적 표 차로 물러났습니다.
▲외인 MVP, KBL만 없네?
다른 종목은 어떨까요?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외국인 정규리그 MVP가 한번 이상은 있었습니다.
사실 정규리그 MVP는 해당 종목 기자단의 투표로 이뤄지는 게 보통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외국 선수보다는 아무래도 국내 선수에게 표를 던지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때문에 보통 MVP는 국내 선수들의 전유물로 여겨지지만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업적은 국내 기자들의 표심까지 바꾸기도 합니다.
가장 먼저 프로화한 야구는 지난해까지 33년 역사상 2명의 외인 MVP가 배출됐습니다. 지난 1998년의 타이론 우즈(당시 OB, 현 두산)와 2007년의 다니엘 리오스(두산)입니다.
우즈는 당시 42홈런으로 1992년 장종훈 현 롯데 코치의 신기록(41개)을 깼고, 타점왕(103개)까지 올랐습니다. 가장 큰 잠실을 홈 구장으로 쓰기에 더 값진 결실이었습니다. 리오스는 22승을 거두며 정민태 현 한화 코치의 1999년 이후 처음으로 20승 고지를 밟았습니다.(물론 리오스는 이후 일본에서 금지약물이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WKBL도 딱 1명이 있었습니다. 2005-06시즌 타미카 캐칭(당시 우리은행)이었습니다. 당시는 외국인 선수상 제도도 있을 때였지만 캐칭은 무지막지한 존재감으로 터부를 깼습니다. 경기당 26.3점, 14.7리바운드 14.7개, 3.1가로채기, 1.6블록슛의 전방위적 활약으로 정규시즌 3연속 우승을 이끌며 외국인 선수상과 베스트5까지 휩쓸었습니다.
▲농구-배구, MVP 다 뺏길라?
KBL이나 WKBL이 외국인 선수상을 따로 마련하면서까지 토종 MVP를 보장한 것은 리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일 겁니다. 종목의 특성상 운동 능력이 월등한 외인들이 발군의 활약을 보일 것은 당연지사, 어쩌면 MVP를 계속 뺏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비슷한 처지의 프로배구는 지난 시즌 뒤 외국인 선수상을 신설하기로 했습니다. 조명을 많이 받는 공격을 외인들이 독점하고 MVP 수상이 잦아지자 후보를 국내 선수로만 한정하기로 겁니다. 남자부는 10시즌 중 7번, 여자부는 4번 외인 MVP가 나왔습니다. 국내 리그인데 외인들이 MVP를 받는 주객전도의 상황을 두고볼 수만은 없었을 겁니다. 다만 올 시즌 전 이사회에서 고심 끝에 현행 제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KBL 역시 외국인 선수상을 폐지하면서부터 MVP 논란이 차츰 불거지고 있습니다. 올 시즌에는 올스타전 MVP를 놓고도 말들이 있었습니다. 기록 면에서 압도적 활약을 펼친 리카르도 라틀리프(모비스) 대신 김선형(SK)이 MVP에 오르자 투표 방식에 대한 지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물론 기록보다 볼거리가 중요한 올스타전인 만큼 기자들의 판단도 달랐을 겁니다.)
사실 외국인 선수들도 서운하기는 할 겁니다. 국내 선수 못지 않게, 혹은 더 열심히 뛰고 팬들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서비스를 하는데 이른바 '용병'이라는 상황 때문에 주변인 취급을 받는 게 못내 아쉬울 겁니다. 최정상급 선수 데이본 제퍼슨(LG)도 외국인 선수상에 대한 라틀리프의 의견에 찬성 의사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실제 MVP 선정에 대한 유권자로서 기자들도 생각이 복잡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과연 기록만을 놓고 한 표를 행사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역할을 고려해야 할 것인지. 또 국내 선수에 기우는 인지상정에 기대야 하는지, 아니면 'KBL도 변할 때가 왔다'는 생각에 사상 첫 외국인 MVP의 가능성을 열어놔야 하는 것인지.
일견 그들의 리그에서 받지 못한 상을 왜 한국에서 받으려 하는지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쇄국주의의 틀을 깨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양동근이냐, 라틀리프냐' MVP는 과연?
현재로서는 정규리그 우승팀인 모비스에서 MVP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후보로는 주장 양동근과 라틀리프가 있을 겁니다. 양동근은 올 시즌 평균 34분59초, 리그에서 가장 많이 뛰며 11.8점, 4.8도움, 1.8가로채기를 기록 중입니다. 출전 시간 10위(28분56초) 라틀리프는 리바운드 1위(10개), 득점 4위(19.9점), 블록슛 2위(1.7개)를 달리고 있습니다.
누가 MVP에 올라도 손색이 없는 활약. 양동근은 비시즌 농구 월드컵과 인천아시안게임 출전에도 3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왕성한 활동량을 보였습니다. 라틀리프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의 달리는 빅맨으로 타 감독들로부터 공포의 대상으로 통합니다. 유재학 감독은 올스타전의 아쉬움도 있기에 "라틀리프의 MVP 수상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양동근이 받아도 라틀리프가 불만은 없을 것"이라고 황희 정승과 같은 답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정규리그 MVP는 비단 해당 시즌뿐 아니라 이전 시즌부터 리그에 대한 공로도 부지불식 간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이 정도로 고생을 했으니 기특하다'는 인식이 알게 모르게 투표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곧 떠날 선수라면 굳이 투표를 해야 하나 멈칫 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KBL은 올 시즌이 지나면 외국인 선수에 대한 전면적인 재편에 나섭니다. 올 시즌까지 뛰었던 선수들은 원 소속팀과 재계약을 떠나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새로운 팀을 구해야 합니다. 보수 총액도 그동안 받았던 인상분 없이 출발선에서 시작합니다. 적잖은 선수들이 타 리그로 떠날 것이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이제 KBL 정규리그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3일 경기 뒤 4일 휴식을 취하고 5일 10개 팀이 일제히 최종전을 치릅니다. 이후 MVP 및 신인왕 등에 대한 투표가 진행될 겁니다. 과연 올 시즌도 MVP는 외국인 선수들에게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을까요? KBL에 새로운 역사가 쓰일 수 있을까요?
때문에 올스타전 MVP 논란이 적잖게 신경이 쓰였던 게 사실입니다. 지난달 15일 울산 경기 때 라틀리프에게 정규리그 MVP에 대한 질문을 던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규리그 MVP라면 조금 다를 겁니다. 이벤트 성격이 짙은 올스타전이 아니라면 시즌 내내 열심히 진중하게 뛰어준 라틀리프도 충분히 당당한 후보입니다.
단, 만약 다음 시즌에도 KBL에서 뛰게 된다면, 그런 애정이 이어진다면 가능성은 조금 더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KBL이 단지 타 리그에서 더 높은 몸값을 받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의 추억만을 남기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이런 생각에도 원천적으로 투표가 불가능해질 수 있는 상황이 생길 확률도 어쨌든 배제할 수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