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치사사건의 담당검사였다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되는걸까요.
아마도 첫째 이유는 해당 사건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고, 또 박 후보자가 그 사건을 축소은폐하는데 일조했다고 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게 둘째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죄송하다'고 하면 좋았을텐데 박상옥 후보자는 고의로 당시 사건의 담당 검사였다는 경력을 누락했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습니다. 대법관 후보자가 솔직하지 못하면 과연 누가 솔직해야되는건가요.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에 경찰은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이던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하다가 숨지게 했는데요.
온갖 물 고문, 전기 고문 등으로 죽은 박종철의 사인을 두고 경찰은 그 유명한 "탁 치니억하고 죽었다"라고 표현해 부도덕한 권위주의 정권을 향한 거대한 공분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영화 '남영동 1985'와 '변호인'에 등장하는 고문 모습은 박종철 치사사건과도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공안당국이 조직적인 은폐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돼 6월 민주항쟁의 중요한 기폭제가 됩니다.
그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 중 1명이 박 후보자였습니다. 또다른 1명의 검사는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였지요. 그런데 1차 수사가 부실하다는 지적을 받자 2차 수사가 진행됩니다.
박 후보자는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1,2차 수사에 모두 참여합니다. 그런데 1차 수사팀은 당시에 고문 경찰관 2명으로부터 고문치사 공범이 3명 더 있다는 진술을 받고도 무슨 이유에선지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2차 수사에서는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사건 축소 조작에 가담한 혐의가 없다고 무혐의 처리를 내리게 되는데 결국 나중에 사실이 모두 드러나면서 강 치안본부장은 구속되고 맙니다.
박 후보자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시 수사팀 일원으로 최선을 다해 수사했고, 수사 과정에서 외압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당시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 말이 사실이고 진심이라면 그렇게 능력도 안되는 분이 무슨 지금 와서 대법관을 하겠다고 그러시냐고 저같은 필부가 주장해도 되는 것 아닌 지 모르겠습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오는 11일 열릴 예정입니다.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똑똑히 지켜보겠습니다.
아래에 박종철의 학교 후배인 전상훈 이지스커뮤니케이션즈 대표가 쓴 글을 첨부합니다. 박상옥 후보자님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박종철 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님. 저는 박종철입니다. 1987년 1월14일을 기억하시죠.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던 저는 1월13일 자정, 신림동 하숙집에서 10여명의 경찰에 연행되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갔습니다. 욕조와 침대 책상 그리고 달빛도 겨우 스며드는 작은 창문이 있는 509호 조사실에서 11시간 동안 수배된 선배의 은신처를 자백하라는 윽박질을 받으며 갖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저는 야수와도 같은 경찰관들의 모진 고문에 결국 연행된지 11시간만에 숨을 놓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죽은 직후 전두환 정권은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발표로 고문살인을 은폐했지만, 부검의사와 언론인들의 용기있는 증언으로 고문에 의한 죽음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과 치안본부는 저를 고문한 경찰관이 2명이라며 두 번째 축소 은폐조작을 했습니다. 저는 하늘에서 비통한 마음으로 제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며 울부짖었습니다. 다행히 저의 울부짖음이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 두 명의 경찰관에게 닿았는지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들은 검찰 수사과정에서 자신 외에도 여러 명의 경찰관들이 고문에 가담했으며, 치안본부 경찰 지휘부가 진실의 축소은폐를 했다는 진실을 수사검사에게 밝혔습니다. 저는 검사들에게 다시 한 번 울부짖었습니다. 저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검사님들께서 밝혀달라고...서울지검 신창언 부장검사, 안상수 검사 그리고 박상옥 검사, 세 분의 검사님께 피울음의 호소를 했습니다. 그러나 검사님들은 냉담하게 고문경관 두 사람의 증언과 저의 피울음을 외면하고 2명의 경관만 기소하고 수사를 종결지었습니다. 후보자가 속한 검찰 수사팀은 신속한 수사를 통해 2명의 경찰관(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이 고문에 참여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이들 2명만을 구속기소하였습니다. 수사팀 막내인 청년검사 박상옥도 당시의 긴박했던 수사과정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검찰의 1차수사 결과는 진실을 외면했을뿐 아니라 은폐에 가담한 것이었습니다. 훗날 정치인이 된 안상수 검사는 <안 검사의 일기(1998)>에서 당시 범정부 관계기관대책회의로부터 진실은폐를 종용받았고, 어쩔 수 없이 축소은폐에 가담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 검사는 2000년대 이후 언론인터뷰에서 박종철 사건 수사시에 검찰이 외압에 굴복해 축소은폐에 가담했노라고 증언했습니다. 박 후보자님께서도 안상수, 최환 검사의 증언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조직적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하고 수사팀 검사들이 축소은폐에 가담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두 번 죽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박상옥 후보자님은 대법관 후보자에 지명된 후 “당시 수사팀 일원으로 최선을 다해 수사했고, 수사 과정에서 외압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저는 후보자의 이 해명이 모든 정황상 진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후보자께서는 당시 비록 검찰수사팀의 가장 후배였지만, '검사'라는 막중한 직을 맡고 있지 않았습니까? 일개 검찰 서기가 아니라 최고학부를 거쳐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엘리트들만 갈 수 있다는 서울지검 검사로 임명된 ‘정의의 사도’ 청년검사 박상옥이 검찰 수사과정에서 자행된 축소 은폐조작을 몰랐다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수사팀 검사도 불과 3명이었습니다. 3명이 합의하지 않고서 어찌 축소은폐를 할 수 있다 말입니까. 검찰의 은폐조작 가담에 두번째 죽음의 고통을 맛본 저는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다시 울부짖었습니다. 마침내 교도소에 수감된 2명의 경관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담당 교도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고, 이 증언은 당시 같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재야인사 이부영 씨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부영 씨는 교도소 밖의 동료 재야인사 김정남 씨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김정남 씨는 함세웅 신부에게 이 놀라운 사실의 발표를 부탁했습니다.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고 강론한 ‘광주민주항쟁 제7주기 미사’의 제2부 미사에 김승훈 신부가 강단에 섰습니다. 김승훈 신부는 3120자로 적힌 방대한 분량의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또박또박 읽었습니다. 이 성명에서 조한경과 강진규 외에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호 경사가 고문살인에 가담했음이 폭로되었으며, 치안본부장 이하 대공분실 간부들이 축소은폐 조작에 가담했음을 밝혔습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검찰은 2차 수사에 돌입, 3명의 고문경찰관을 추가로 구속했습니다. 이때도 박상옥 검사는 수사팀에 참여하였습니다. 1차 수사에서 신뢰를 잃은 검찰의 일원으로서 명예회복을 위해 얼마나 절치부심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1차 검찰 수사가 원천적으로 부실덩어리였음에도, 2차 검찰 수사 또한 부실덩어리였습니다. 3명의 고문 경찰관을 추가로 기소했을뿐, 은폐조작의 몸통이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주요 간부들을 구속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강민창은 사건 발생 1년 후인 1988년 1월에 은폐조작의 책임을 지고 구속기소되었습니다. 물론 강민창은 최종적인 몸통이 아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수뇌부 모두가 몸통이었지만 이를 밝혀내지 못하고 28년이 흘렀습니다. 박 후보자님, 왜 후보자께서는 국회임명동의안에 제출한 경력사항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검사였다는 것을 빼놓으셨습니까? 제가 고문으로 죽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두환의 폭압적 군사독재 체제를 해체시킨 6월항쟁이 일어났고, 국가권력에 의한 고문살인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검사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면 검사로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길 경력이 아니던가요? 박 후보자님께서는 다음 주 국회 청문회에 서게 됩니다. 저는 후보자님께 다시 한 번 묻고자 합니다. 박상옥 검사님, 1987년 당시 고문 경관을 5명에서 2명으로 축소은폐하는데 가담한 사실이 있습니까? 치안본부장 등 경찰 지휘부가 은폐조작을 지시한 것을 수사과정에서 인지하였음에도 덮어둔 것은 아닙니까? 박상옥 검사님, 1987년 당시 정권 차원의 축소은폐조작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힘 없는 수사팀 막내검사였기 때문에 검사동일체 원칙에 따라 검찰 지휘부의 은폐조작 지시를 따르는 것은 불가피했다고 변명하시는 건 아닙니까? 대법관은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사회 구성원을 보호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정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등불과도 같은 직위입니다. 후보자께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실만을 증언해주실 것을 촉구합니다. 2015. 2. 4. 박종철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