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강제철거는 강정마을 주민과 반대단체들이 지난해 10월 25부일부터 천막에서 군 관사 공사 저지 투쟁을 벌인 지 99일 만이다. 그동안 해군은 5차례에 걸쳐 강제 철거를 위한 행정대집행 계고장을 강정마을회에 전달했고 1차례 행정대집행을 연기했다.
군 관사 문제로 소강상태를 보였던 해군과 반대 주민 간 충돌이 또다시 벌어지면서 강정마을 갈등 해소를 위해 제주도가 제안한 해군기지 진상규명과 정신건강실태조사는 사실상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강정마을을 둘러싼 갈등이 9년째 이어지는 가운데 해군이 다시 주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제 철거에 나섬으로써 갈등이 더욱 심화해 올해 연말 완공 예정인 해군기지 건설공사도 순탄치 않아 보인다.
◇ "군 관사 건립, 주민동의 받아야"…"불가피한 조치"
해군은 지난해 10월 14일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마을 9천407㎡ 부지에 전체면적 6천458㎡, 72가구(지상 4층·5개동) 규모의 군 관사 건립 공사를 시작했다. 관사는 애초 616가구 규모로 지을 계획이었지만 주민 반발과 토지 매입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이를 72가구로 축소했다.
긴급상황이 발생할 경우 5분 안에 해군기지에 도착해야 하는 주요 지휘관과 고속정 탑승 요원 등 작전필수대기요원 72명과 그 가족들이 거주할 최소 규모의 거주지라는 게 해군 측의 설명이다.
강정마을 주민과 해군기지 반대단체들은 해군이 군 관사 건립 공사를 시작하자 11일 후인 같은 달 25일 공사장 출입구에 농성천막을 설치, 99일간 공사 저지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해군이 주민동의를 전제로 강정마을 내 군 관사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했으면서 약속을 어겼다"며 반발, 다른 지역에 짓도록 요구했다.
이에 따라 제주도는 지난 15일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강정마을 외곽 지역에 있는 부지를 찾아내 대안으로 제시했다.
도는 해군본부에 해군기지에서 5분 이내 거리에 있으면서 강정마을에 속하지 않는 사유지를 군 관사 건립 대체 부지로 제안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고, 해군이 수용하면 군 관사 건립이 조속히 추진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행정지원을 하겠다고도 했다.
대체 부지로 제안한 사유지에서 해군기지까지 거리는 2.3㎞로, 차량으로 이동하는 데 2∼3분 걸린다. 토지 소유자는 도에 팔 의사가 있음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과 '비용'이었다.
국방부는 30일 제주도가 제시한 제안을 검토한 결과 제주해군기지가 완공되는 올해 12월에 맞춰 군 관사 건립을 마무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수용 불가 결론을 내렸다.
토지수용과 각종 인허가 절차, 대체부지 안 분묘 이장 등 여러 절차를 진행하는데 최소 3년가량 걸릴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또 대체부지 인근마을 주민 전체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필요하고 2014년에 반영된 예산 불용액과 대체부지 매입비 등 추가 예산 소요에 대해 제주도가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아 제안을 수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방부는 "더 이상 공사를 미루면 연말까지 군 관사를 건립할 수 없는 물리적 한계에 도달했다"며 "이는 군 관사 건립에 찬성했던 다수 주민의 의견을 존중하고, 정부가 제주도민에게 약속한 국책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 제주도, 해군기지 갈등 절충 능력 도마에
지난 23일 예정됐던 농성 천막에 대한 행정대집행이 한 차례 연기되면서 군 관사를 둘러싼 갈등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은 해군의 강제 철거로 여지없이 빗나갔다.
강정마을회와 해군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원희룡 제주지사의 절충 능력은 한계를 드러냈고, 해군은 강정마을 주민과 대화하며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의지가 있는지 진정성에 의문을 품게 됐다.
원 지사는 지난달 19일 제주도청에서 열린 새누리당 현장 최고위원회에서 "해군이 법만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강정)주민들과의 갈등을 지혜롭게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여당에서 힘을 실어달라"고 요청했다.
대체부지를 내놓은 제주도의 제안에도 군 관사 공사를 강행하겠다며 강경입장을 보였던 해군은 지난달 21일 태도를 돌변, 이틀 뒤 예정된 행정대집행을 한 차례 연기한 데 이어 군 관사 건립 등과 관련한 제주도의 제안에 대해 추가 검토와 협의를 진행하는 등 제안을 수용하는 듯한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해군의 입장변화에 군 관사 갈등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닷새 뒤 해군은 입장을 다시 바꿨다.
정호섭 해군참모차장이 제주도청을 찾아 원 지사와 면담을 했으나 결국 서로 간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고 해군은 예정된 강정마을 부지에 군 관사 공사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제주도는 국방부의 행정대집행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없어 사실상 행정대집행을 바라만 보는 처지에 놓였다.
원 지사는 "그간 군 관사 문제해결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했음에도 행정대집행이 시행돼 유감스럽고 안타깝다"는 말을 전할 뿐이었다.
군 관사 건립에 필요한 예산이 기획재정부 예산으로 편성돼 제주도와 해군, 강정마을회가 협의를 통해 예산을 집행해야 한다는 기재부 조건사항을 마지막 희망으로 삼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도 해군은 "'협의'란 말은 해석하기 나름이고, 제주도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며 일축하고 있다.
해군이 필요한 군 관사 예산은 모두 128억원이며 이 가운데 30억원의 예산이 지난해 집행됐다. 국회 예산결산위원회는 군 관사 예산을 정부 원안대로 반영하되 국방부 예산으로 편성하지 않고 기재부 예산으로 편성해 조건이 이행될 때마다 예산을 넘겨주는 수시배정예산으로 편성했다.
그러나 해군이 행정대집행을 강행함으로써 지난 2013년 11월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이 강정마을주민에게 "해군은 앞으로 주민들과 진정성을 갖고 대화하고 소통함으로써 그동안 추진과정에서 비롯된 불신과 오해를 해소하고 화합과 상생의 길로 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 말은 공염불이 됐다.
강정마을회는 "해군은 주민과 상호 공존하고 상생할 의지가 없음을 또 한 번 여실히 보여준 것이며 행정대집행을 수수방관하는 도지사의 모습에 (군 관사 문제를 우선해결하겠다는) 약속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고 말했다.
◇ 강정마을 갈등 해소 방안 줄줄이 차질
해군이 행정대집행을 통해 강정마을 부지에 군 관사 공사를 강행하면서 지난 9년간 어어져 온 강정마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제주도가 제안한 해군기지 진상규명과 정신건강실태조사 등은 줄줄이 차질을 빚게 됐다.
제주도는 지난해 9월 제주해군기지 추진 과정의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가칭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지원 조례안(이하 진상규명조례)' 제정을 추진했다.
진상규명조례는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건설하는 제주해군기지 추진 과정에서 제기됐던 각종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강정주민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진상조사는 제주해군기지 유치 당시 마을총회의 적절성 여부, 환경영향평가의 적절성 여부, 절대보전지역 해제의 적절성 여부 등이 주된 내용이다.
도는 조례 추진에 앞서 강정마을 주민에게 의견을 물었고 주민들은 지난해 11월 11일 오후 서귀포시 강정마을 의례회관에서 총회를 열어 마을에 들어설 예정인 군 관사 건설사업이 철회되면 해군기지 관련 진상조사를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주민들은 건설이 진행 중인 군 관사를 포함해 앞으로 마을과 주변 지역에 해군 관사 건설이 이뤄지지 않는 것을 진상조사의 전제 조건으로 달았다.
그러나 이번 대집행으로 해군이 군 관사 공사가 강행할 예정이어서 사실상 해군기지 진상규명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최근 제주도가 제안한 강정 주민들에 대한 정신건강실태조사 역시 마찬가지다.
도는 해군기지 건설 공사로 9년째 찬·반 갈등이 이어져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강정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정신건강실태조사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마을 주민들이 찬·반으로 나뉘어 반목하는 상황이 지속된 데다 반대하는 주민들이 군 당국 등을 상대로 오랜 기간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체포와 연행 등을 당하기도 해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조경철 강정마을회장은 당시 "마을회에서 요구한 사항들이 100% 이뤄지는지 지켜본 뒤 결정하겠다"며 정신건강실태조사 등을 수용할지에 대해 확답을 하지 않았다.
국방부의 강제철거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조 회장을 비롯한 24명의 강정마을 주민과 활동가 등은 경찰에 연행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