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은 처음부터 정치적 의도를 깔고 급조된 주먹구구식 설계였다. 박정희 정권은 남북 대결에서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고 가장 뒤진 분야인 사회보장에서 북한을 뒤쫓으려 의료보험을 급히 추진했다.
1963년 의료보험법을 처음 만들긴 했으나 추진은 한참 뒤인 경제개발이 매듭지어져 가는 1977년에서였다. 이 때 500인 이상 사업장 486개를 선정해 소속 직장인들을 의료보험 조합에 가입시켰다. 그 뒤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에게로 의료보험 조합이 확대됐고 다시 300명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됐다. 여기서 배제된 직장인이 아닌 국민을 대상으로 해 다시 지역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고 1989년 7월에 이르러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이 구색을 갖추고 시작됐다. 간단히 이야기해 가난한 지역 자영업자나 농어민을 빼고 의료보험을 시작한 뒤 나중에 우겨넣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재정을 쏟아 붓지 않되 보험의 운영은 안정적으로 하려니 봉급을 일정 수준 타가는 사람들만 따로 묶어 보험조합을 만든 것이다.
◇ 국민 건강보험이 낙하산의 천국으로
직장인이야 소득이 뚜렷이 기록돼 있으니 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걷으면 되었으나 지역보험의 자영업자들은 보험료 책정이 애매했다. 그래서 집과 자동차 등 재산을 따져 보험료를 부과한 것이다. 이러다보니 빚에 허덕이는 가난한 농민이 도시 직장인보다 훨씬 비싸게 보험료를 내는 등 문제점이 많았다.
전국에 370여개의 조합이 분산되어 관리되는데다 지정병원도 달라서 의료보험 카드가 있어도 병원이 해당 조합의 지정병원이 아니면 비보험으로 진료를 받아야 했다. 주민번호만 대면 어느 병원이나 이용하는 지금과는 크게 달랐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조합에는 무수히 많은 권력기관이나 군 출신의 낙하산 인사들이 자리를 잡았고 경직성 운영경비만 잔뜩 들어가는 불합리한 구조였다. 그래서 조합을 통합하자는 의료보험 통합론이 등장했다. 그러나 낙하산 자리에 탄탄한 기득권을 쥐고 있는 세력들은 통합론자들을 숙청해 귀양을 보내거나 옷을 벗겨 내쫓았다. 민주화 이후 1998년에 이르러서야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의료보험통합이 합의되고 1998년 10월에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이 출범하며 통합주의 방식의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된 배경이다.
하지만 아직도 통합된 제도 내에 지역가입자, 직장가입자의 형평이 맞지 않고 국민 모두가 만들어가는 보험임에도 보험료가 면제되는 부유층이 많다는 불평등의 문제가 남아 있다. 노숙자는 보험료를 내도 120만 고소득자는 보험료에서 빠져나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번에 많이 버는 사람이 보험료를 많이 내도록 보험료 부과를 ‘소득 중심’으로 바꾸려 한 것이다. 소득이 꽤 됨에도 가족의 직장보험에 피부양자로 들어가 무임승차하는 사람도 걸러내 보험료를 부과하려 했던 개편안이다. 그대로 진행되면 전체 지역가입자 80% 가량인 600만 세대 이상의 건보료가 지금보다 낮아지고, 봉급 외에 추가 소득이 많은 일부 '부자 직장인'이나 연금 등의 소득이 많은 '고소득 피부양자' 등 45만 세대 가량은 건보료가 인상될 전망이었다.
◇ 미국 대통령이 부러워하고 한국 대통령이 흔든다
주무 장관은 국민 여론 상 불만이 생기니 최근 통계자료로 시뮬레이션이 더 필요하고,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해야 한다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다.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 개편은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다. 2년 반을 연구했고 연구에 사용된 자료가 2011년 통계지만 최신 통계를 넣어 돌리는 데 1주일이면 충분하다. 어떤 전문가는 2,3일이면 끝낼 수 있다고도 한다. 여론 형성? 길게 잡으면 30년이 된 논의인데 무슨 여론이 필요하다는 걸까?
장관이 고민한 것이 연말정산과 서민층 간접세 등의 증가로 곤두박질 친 대통령 지지율이라는 해석이 훨씬 설득력 있다. 어쩌면 고민이 아니라 압력이었을 수도 있다.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마저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지지율 추락 국면에 현 정권의 기본 지지층인 고소득 계층의 불만이 생기지 않도록 건강보험의 개편을 미뤄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건강보험을 개발도상국형 77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어서 선진형으로 바꿔야 한다. 조금만 걷어서 조금만 나눠주고 혼합진료에 치료위주로 구성된 건강보험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 덜 내고 안 내는 사람들이 모두 적정하게 참여하면 건강보험료 수입은 35조 이상 더 걷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래야 서민 노약자에게 충분히 지원하고 보장성이 높아진다.
우리나라 건강보험 제도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엄청 부러워할 만큼 전 국민에게 혜택이 두루 돌아가는 그것도 저렴한 가격에 수준 높은 의료서비스가 돌아가는 우수한 시스템이다. 제도의 개편을 통해 유지해 가야만 한다. 이미 조짐은 안 좋다. 건강보험의 2007년 보장률이 65%였는데 2011년엔 63%이다. OECD 최저수준이다. 저출산·고령화로 내는 사람은 줄고 타 쓰는 사람은 많아지니 당연하다.
2013년 자료로 우리는 건강보험료로 소득의 5.89%를 낸다. 독일은 15.5%, 일본은 9.48%이다. 그나마 우리는 소득 적은 봉급생활자들과 직장 없는 지역 자영업자들의 부담이 너무 크다. 이렇게 적게 내도 어떻게든 유지가 된 것은 저급여 때문이다. 낮은 의료수가로 진료 받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병원이 죽겠다 하고 병원 적자를 채우려니 급여 비급여가 뒤섞여 혼합진료가 이뤄진다. 예방에 더 투자해 진료를 줄이는 방안도 빨리 마련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국민의 눈을 가리려는 꼼수의 척결이다. 이런 식으로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룰 수는 없다. 백지화된 개편안을 살려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