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로 예정된 건보 개편을 위한 기획단 전체회의를 하루 앞두고 1년 7개월 동안 준비해온 개혁 작업을 송두리째 없던 일로 만들었다.
정부가 마련한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안은 ‘송파 세 모녀’처럼 저소득층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부담을 줄여주는 대신, 이자와 배당 등의 소득이 많은 고소득 직장 가입자와 소득이 있는 피부양자의 건보료를 올리는 내용이었다.
연말정산 파문에 놀란 청와대와 정부가 45만 명의 반발을 우려해 백기를 든 것이다.
건보료 개편 백지화로 인해 지역 가입자 가운데 인하 대상인 602만 가구, 그러니까 저소득자와 실직자, 은퇴자의 혜택은 무기 연기됐다.
문형표 복지부 장관은 28일까지만 해도 건보료 개편 발표를 2월로 미루겠다고 했으나 29일 갑자기 백지화를 발표한 것이다. 28일 밤 갑자기 복지부 간부들을 서울로 불러 긴급 회의를 열었다.
청와대의 백지화 지시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연말정산 대란으로 집중 포화를 맞은 청와대가 이번엔 건보료 폭탄이냐는 불만을 너무 크게 의식한 조치로 해석된다.
문제는 박근혜표 4대 개혁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개혁 작업이 건보료 개편 백지화로 크게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5만 명으로부터 더 거둬 602만 가구에게 도움을 주는 건강보험 개혁을 하지 못할 정도면 박 대통령의 4대 개혁이 뒤뚱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박 대통령은 2015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올해가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골든 타임이라며 공공 부문과 금융, 노동, 교육의 4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연말정산 파문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건보 개편안 하나 처리하지 못하면서 정권의 명운을 좌우할 정도로 어려운 노동과 공공부문을 개혁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아주 크다.
행자부는 정치권의 증세 논란에 놀라 주민세와 자동차세 인상을 없던 일로 하려 하고 있다.
당장 4월로 예정된 공무원연금 개혁안이 원안대로 국회를 통과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이 나오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어떻게든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처리하겠다고 벼르고 있으나 당청관계가 원만하지 않을뿐더러 청와대가 국정수행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해버렸다.
이한구 의원(새누리당)은 “이런 식으로 가면 공무원연금이 개혁되더라도 원안에서 크게 후퇴한 누더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무원연금 개혁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사학연금과 군인연금 개혁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조차 군인연금 개혁에 대해서는 정부와 다른 입장이다.
특히 노동 개혁은 노동자의 희생과 고통을 전제로 하는 것인 만큼 이런 상황에서 노동개혁 추진의 동력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강하다.
“그 어떤 욕을 먹더라도, 민심이 이반하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개혁은 해야만 지지율이 오르고 역사에서 평가를 받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자꾸 어렵고 힘든 길을 피해가는 것 같다”는 게 여당의 한 개혁론자의 평가다.
국정수행의 동력이랄 수 있는 지지율이 급전직하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그럴지라도 개혁에 대한 자세와 청사진이나 실행 로드맵, 국민공감대 형성 등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개혁 주체 세력도 없다.
개혁이란 ‘역사의 순교’를 각오하고서야만 추진할 수 있다.
국민은 개혁의 수혜자로 개혁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하등 관심이 없다.
개혁의 당위성에 대한 국민 설득이 힘든 이유가 바로 국민의 무관심과 개혁 거부 정서 때문이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지금 개혁을 하지 않으면 큰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연세대 경제학과 유병삼 교수는 “우리 경제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구조개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인제 최고위원(새누리당)은 “국정의 총체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점인데 걱정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