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는 '주도세력'이라는 표현으로 RO의 실체를 사실상 인정하고 이를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의 주된 이유로 삼았다. 하지만 한 달 뒤 대법원 판결에서는 RO의 실체를 인정할만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해 결과적으로 최고 권위의 두 사법기관이 엇갈린 결과를 내놓게 됐다.
법조계에서는 헌재의 정당해산 결정이 대법원의 최종 판단 전에 너무 성급하게 내려지면서 정당 해산의 명목이 훼손됐으며, 사법적 혼란이 가중됐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RO실체 및 5월 회합의 성격...헌재와 대법원 판단 달라 논란 예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2일 이 사건 관련 상고를 모두 기각하면서 2심 판결처럼 내란선동죄만 유죄로 보고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가 내란음모를 무죄로 판단한 근거는 RO(지하혁명조직·Revolutionary Organisation) 조직의 실체가 증명되지 않았고, 피고인들이 회합에서 내란 실행을 논의했을 뿐 합의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RO에 대해 "제보자의 진술을 뒷받침할만한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하고, 회합 참석자 130여명이 언제 가입하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실체를 부정했다.
이는 지난해 12월 19일 선고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부분이다.
당시 헌재는 결정문에서 "이석기를 비롯한 내란 관련 회합 참석자들은 경기동부연합의 주요 구성원"이라고 규정했다. 헌재는 이른바 '주도세력'이라는 표현으로 RO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법무부 입장을 받아들여 사실상 그 실체를 인정했다.
그러면서 "주도세력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고 당시 정세를 전쟁국면으로 인식했다"며 "그 수장인 이석기의 주도 하에 전쟁 발발시 북한에 동조해 폭력수단을 실행하고자 회합을 개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도세력으로 표현된 RO의 활동이 당 해산 판단의 핵심 근거로 작용한 것이다.
2013년 5월 회합의 성격에 대해서도 대법원과 헌재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재판부는 "내란음모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공격의 대상과 목표, 실행 계획 등을 공통적으로 인식할 정도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며 "일회적인 토론을 넘어 내란의 실행행위로 나아가겠다는 확정적인 의사의 합치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토론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들이 생각나는대로 갖가지 폭력 행위에 대해 논의를 했지만 합의라고 볼만한 것이 없고, 심지어 회의적인 반응도 가끔 나타나고 있다"며 "회의 참석자들이 회합 이후 국가기간시설 파괴 등 폭력적 방안을 실행하기 위한 추가 논의를 했거나 준비행위를 했다고 볼만한 증거도 없다"고 덧붙였다.
5월 회합이 난상토론 수준에 불과했을 뿐 내란을 실행하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재판부는 특히 "특정범죄와 관련해 단순히 의견을 교환한 것도 모두 음모죄가 성립한다고 하면 음모죄의 성립 범위는 지나치게 확대돼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내란음모죄 남용의 위험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반면 헌재는 5월 회합을 "북한에 동조해 대한민국 존립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이라고 규정하며 "통진당의 진정한 목적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강한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내란 관련 회합의 개최 경위와 회합이 이석기 등 핵심 주도세력에 의해 개최된 점, 회합을 주도한 이석기의 경기동부연합 수장으로서 지위 등을 종합하면 회합은 당의 활동으로 귀속된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헌재가 대법원 판단과는 다르게 RO의 실체를 사실상 인정하고, 회합 성격을 규정한 꼴이어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의 정당성이 훼손됐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당 해산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결정을 내릴 때에는 증거능력과 각종 판단에 있어 사실심에 바탕을 둔 엄격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법조계의 대체적인 중론이다.
그런데 법리 판단의 최고 기관인 대법원에서도 인정되지 않은 RO의 실체와 역할 등을 헌재가 자의적으로 수긍해 당 해산 명령의 근거로 삼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것이다.
수도권 현직 고등법원 판사는 "형법이 증거능력이 가장 엄격하게 다뤄지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당 해산 결정에 있어서는 그 이상의 엄격함이 있어야 한다는 반론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판사는 "대법원은 형사 재판이고, 헌재는 민사의 하나인 행정 소송으로 분류되는 만큼 서로 다른 분야로도 볼 수도 있다"면서도 "증거능력은 오히려 정당 해산 결정에서 더 까다롭게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대법원 판단이 내려지기도 전에 서둘러 당 해산 명령을 결정한 헌재의 조급함을 두고도 뒷말이 나오고 있다.
한상희 건국대학교 로스쿨 교수는 "헌재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대법원 판단 전에 당 해산 결정을 서두르면서 판결 정당성을 상당부분 잃었다"며 "불과 한 달을 왜 기다리지 못했는지, 헌재의 결정이 대법원 법리 판단과 일부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헌재의 명확한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