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생연후살타! 허정무 인터뷰가 인상 깊었죠"

[신년바둑기획④] 한국기원 박치문 부총재 인터뷰

한국 바둑계가 드라마 '미생' 등의 영향으로 새해를 맞아 활기를 띠고 있다. 한국 여자바둑리그가 새롭게 출범했고 전국소년체전에 바둑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것으로 보인다. CBS 노컷뉴스는 새해를 맞는 한국 바둑계의 표정을 모두 4차례에 걸쳐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미생은 재밌지만, 장그래로 살긴 싫어요!"
② '꽃보다 바둑'…여성 프로기사들의 24시
③ 바둑에 푹 빠진 초딩들…"시간 가는 줄 몰라요"
④ "아생연후살타! 허정무 인터뷰가 인상 깊었죠"

한국기원 박치문 부총재가 한국기원의 주요사업과 바둑의 비전을 설명하고 있다. 윤성호기자
◈ 39년간 바둑해설 쓴 한국기원 박치문 부총재

"텅 빈 바둑판은 요염하게 빛나고 그 위로 폭풍전야의 정적이 흐른다. 외나무다리에 선 승부사들은 묻곤 했다. 그곳 망망대해의 어디에 나의 삶이 존재하는가. 이제 나의 칼을 품고 대해로 나가려 한다. 나는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두 적수는 무심한 눈빛으로 판을 응시한다." <만화 '미생'의 기보해설 中>

드라마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끌었던 만화 '미생'에는 장그래와 오 과장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조훈현 9단과 녜웨이핑 9단이 펼친 '제1회 응씨배 결승 최종전' 등 여러 기보와 함께 해설도 실려있다.

해설의 재미는 장그래 이야기만큼이나 쏠쏠하다. 어떤 독자들은 "바둑돌 하나에 담긴 의미가 어쩌면 만화 '미생'보다 더 광활하고 웅대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유려한 해설을 쓴 사람이 바로 한국기원 박치문 부총재다. 그는 1975년 조선일보에서 시작해 세계일보를 거쳐 중앙일보에서 바둑 전문기자(국장급)를 접기까지 39년간 바둑해설을 썼다.

박치문 부총재는 지난해 3월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이 한국기원 총재로 취임하면서 이사 겸 상근부총재로 임명됐다.

15일 서울 한국기원에서 제134회 연구생입단대회가 열리고 있다. 윤성호기자
◈ "바둑은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게임"

박 부총재를 지난 15일 서울 성동구 홍익동에 있는 한국기원에서 만났다. 먼저 바둑에 대한 그의 철학을 물었다.

"바둑은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최선이란 것은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뀌죠. 그러니까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이게 최선'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은 절대 고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도는 물과 같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막히면 돌아가고 때로는 구정물도 포용하며 어떤 그릇에도 담기는 융통성이 물의 덕이다.

바둑의 정석은 약 3만 개에 달한다. 스승은 제자를 처음 가르칠 때 '이 정석들을 모두 외우라'고 한다. 그리고 제자가 그 많은 정석을 다 익히면 이번에는 거꾸로 '다 잊어버리라'고 가르친다. 기본기를 충실히 다졌다면 그다음에는 정석에 얽매이지 말고 매 상황 거기에 맞는 최선의 한 수를 창의적으로 생각해 내라는 뜻이다.

그는 바둑으로 사회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틀에 얽매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우리 바둑인들이 볼 때 이념대결에 집착하거나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죠"

허정무 전 국가대표 감독
◈ '아생연후살타'…"허정무 인터뷰 인상적"

바둑 전문기자 시절 인상 깊었던 인터뷰를 묻는 말에는 지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출전을 앞둔 허정무 전 국가대표팀 감독과의 인터뷰를 꼽았다. 허정무 전 감독은 아마 4단의 실력을 갖춘 바둑 고수다.

"당시 허 감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바둑 격언은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고 했어요. 제아무리 공격이 화려해도 먼저 뚫려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허 감독의 축구 스타일이 수비를 중시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안정적이라는 뜻입니다. 또 허 감독이 볼 때 '당시 우리 선수들의 개인기와 골 결정력이 상대팀보다 떨어졌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어요."

허정무 감독이 이끈 남아공월드컵대표팀은 아르헨티나, 그리스, 나이지리아 등 강팀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결국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아생연후살타'라는 격언은 이창호 9단의 방어적 바둑전술에 어울린다. 또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꼽히던 유창혁 9단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박치문 부총재는 특히 "'아생연후살타'라는 격언은 바둑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한 번 새겨볼 만 하다"면서 "요즘 같은 위험사회에서는 스스로 생존의 기반을 두텁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은 "가계부채를 줄이고 무리한 부동산·주식 투자 등을 피하며 다가오는 장기경기침체에 대비하라"는 경제전문가들의 조언과도 맥이 닿아 있다.

15일 서울 한국기원에서 제134회 연구생입단대회가 열리고 있다. 윤성호기자
◈ "바둑은 집 많이 가진 사람이 오히려 양보하죠"

박 부총재의 바둑이야기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명쾌함이 있다.

고수들의 바둑에는 유독 반집 승부가 많은 것은 바둑 만의 미학 때문이라는 것도 그의 생각이다.

"바둑은 집을 많이 가진 사람이 오히려 양보하는 게임이에요. 집이 적어 바둑이 불리한 사람은 공세적으로 나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집이 많은 자는 강하게 맞대응하지 않고 집을 좀 내어주면서 양보하죠. 바둑이 유리한 자에게는 무리하지 않고 타협할 수 있는 선에서 양보하는 것이 승리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바둑의 판세가 나중에는 엇비슷해져서 반집 승부가 많이 나는 거죠. 어쨌든 바둑에서는 강자가 양보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하지만 바둑과 현실은 정반대다. 우리 사회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갑의 횡포가 끊이질 않고 있다.

바둑계에서는 '한 때 1,200만 명에 달했던 바둑팬들이 이제는 700만 명으로 줄었다'며 걱정이 태산 같다. 그만큼 올해 박치문 부총재 앞에도 무거운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 젊은 바둑팬이 크게 줄어든 만큼 바둑이 소년체육대회 정식종목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을 계기로 '유소년 바둑 보급 사업'에 대대적으로 나서야 한다.

또 세계바둑연맹(IGF)의 의장국으로서 '바둑 세계화 사업'을 통해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중국에 빼앗긴 '세계 1위' 자리를 탈환하는 것도 시급하다. 이를 위해 '바둑진흥법'의 입법도 추진되고 있다.

바둑전문기자로서 그는 완생(完生)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바둑행정가로서는 아직 미생(未生)이다. 바둑으로 다져진 삶의 지혜가 그의 바둑행정에는 어떻게 구현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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