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 문건' 막장 드라마 체면 구긴 檢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에게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과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를 적용해 청구했던 검찰의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면서 2014년 말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 유출' 사건은 어이없는 한편의 헤프닝으로 마무리 될 가능성이 커졌다. 검찰은 영장기각에도 영장재청구 고려 없이 불구속기소를 검토하는 등 오히려 덤덤한 모습이어서 어느 정도 영장기각을 예상했었던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올 정도다.

하지만 검찰이 그려낸 '친(親)정윤회파를 몰아내기 위한 친(親)박지만파의 의도적 유출'이라는 '정윤회 문건 유출사건'의 밑그림은 여전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고 있다.

반면 이해하기 힘든 한 편의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검찰이 감수해야 했던 상처는 상당했다. 법조계 인사들은 한결같이 청와대가 세계일보 보도를 명예훼손이라며 검찰의 손으로 넘기는 순간부터 검찰이 언론의 십자포화를 맞으며 상처투성이가 될 상황은 예정돼 있었다고 지적했다.

◈ "청와대 감찰 사안을 검찰 수사에 맡겼다"


세계일보가 지난달 28일 '靑비서실장 교체설 등 VIP측근(정윤회) 동향'이라는 제목의 청와대 보고서를 인용, '비선실세 정윤회씨가 이재만 비서관 등 청와대 실세 비서관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인사방향 등에 간여하고 있다'고 보도하자 당사자들인 청와대 비서관들은 보도 당일 세계일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청와대의 신속한 대응만큼이나 검찰의 반응도 신속했다. 금요일인 28일 소장이 접수되고 주말이 지난 1일 사건을 이례적으로 명예훼손 전담부서인 형사1부와 특수2부에 배당하고 유상범 3차장검사로 하여금 사건수사를 총괄 지휘토록 했다.

이른바 '정윤회 문건'에 대한 국민들의 궁금증은 문건 내용처럼 정윤회씨가 비선실세이며 문고리권력 3인방과 함께 국정농단이 실재했었는지 여부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검찰이 명예훼손 조사를 통해 정윤회씨가 비선실세인지, 국정농단이 실제로 있었는지를 밝혀내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검찰수사는 명확한 범죄혐의가 특정되거나 의심될 때 가능한 것이지만 정윤회씨가 정기적으로 청와대 비서관들과 모여 인사이야기를 나눈 것이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과 비교하더라도 이 사안은 청와대 내부감찰과 그 결과를 통한 인사조치 등으로 마무리될 성질의 것이지 사법적 판단을 요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수사기관이 판단할 수 없는 정치적 책임영역의 문제를 검찰수사에 떠넘기면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이 사건에 대해 "잘 해야 본전이었던 수사였다"고 자조섞인 평가를 했다. 그는 " 가이드라인 수사, 무리한 수사라는 말을 듣게 될 수 밖에 없는 수사였다. 청와대에서 감찰로 해결하면 될 문제를 검찰로 들고 왔다 "고 청와대를 비판했다. 청와대의 추악한 권력다툼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욕만 먹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수사에 착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검찰의 비극이었다.

◈ 대통령의 반복되는 가이드 라인, 수사초기 발목잡힌 檢

충격적인 세계일보 보도 사흘 뒤인 지난 1일 박근혜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정윤회 문건'에 대한 언급을 했다.

박 대통령이 부적절한 행위가 언급된 청와대 비서관들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할지에 언론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발언은 예상 밖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번에 문건을 외부에 유출한 것도(은) 어떤 의도인지 모르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행위"라며 "이런 공직기강의 문란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적폐 중 하나다"라고 규정했다.
"조금만 확인해 보면 금방 사실 여부를 알 수 잇는 것을 관련자들에게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비선이니 숨은 실세가 있는 것같이 보도를 하면서 의혹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언론보도를 지적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문건 내용이 허위임을 전제로 깔고 있었다. 이같은 대통령의 발언은 일주일 뒤인 7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여당 지도부 및 당 소속 예산결산특위 위원들을 초청한 오찬장에서도 반복됐다. "찌라시에나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에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잘라말했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수사 착수 초기부터 '정윤회 문건' 내용의 사실여부를 파악하는데 주력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이 반복되면서 수사의 긴밀도가 느슨해지는 모습이 확연했다.

검찰은 문건에 등장하는 청와대 비서관들의 휴대전화를 확보하고 문건에서 회합장소로 거론되는 중식당을 압수수색하는등 일견 발빠른 대처를 했지만 청와대 자료나 휴대전화는 모두 임의제출 형식으로 넘겨받았다. 심지어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경정이 청와대 근무 시절 사용한 컴퓨터도 압수수색 형식이 아니라 넘겨받았다. 청와대 비서관들이 부적절한 행위의 당사자로 지목된 이상 얼마든지 증거조작의 가능성이 상존했지만 적극적인 증거확보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증인 소환에서도 청와대 이재만 비서관을 주말에 비공개 소환하고 정윤회씨 소환 뒤에는 조사실이 있는 층의 언론출입을 통제하는 등 문건작성과 관련된 박관천 경정, 조응천 전 비서관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모양새였다.

◈ 부실한 수사과정, 초라한 성적

내용조차 애매한 사건을 맡아 발목에 족쇄까지 찬 채로 제대로 된 수사결과를 내놓을 리가 없었다. 검찰은 수사 초기 대통령의 발언대로 '정윤회 문건' 내용을 허위로 규정지은 다음에는 본격적인 유출자 색출작업에 나섰지만 정확한 유출경로를 파악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결국 박관천 경정이 경찰로 파견 복귀 초기 잠시 머물렀던 서울경찰청 정보분실에 근무하는 최모 경위와 한모 경위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영장은 기각됐다. 영장이 기각된 직후 최 경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면서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게 됐다. 최 경위는 유서에서 동료였던 한 경위에게 거짓진술을 하라고 청와대가 회유했음을 암시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검찰이 허위 문건 작성자로 박관천 경정을 지목하고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려 했지만 여기서는 대통령이 제시한 가이드 라인이 문제가 됐다. 대통령과 검찰이 허위이자 '찌라시'로 규정한 문건을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있느냐는 반론이었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박 경정에 대한 구속영장은 발부됐다.

이 쯤에서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왔지만 검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박관천 경정이 '정윤회 문건'이나 '박지만 미행 문건'을 스스로 조작했다는 해명을 국민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배후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박 경정의 배후로 상관이었던 조응천 전 비서관을 지목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결국 검찰은 박 경정 구속 10여일만에 일사천리로 조 전 비서관에 대한 영장청구를 결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법원은 검찰의 영장청구를 기각했다. 범죄혐의사실의 내용, 수사 진행 경과 등을 종합해 볼 때 "구속수사의 필요성과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 전 비서관이 검찰의 두차례 소환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조 전 비서관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까지 이뤄진 시점이었다.

혐의내용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다 도주 및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뤄진 검찰의 영장청구는 무리수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최 경위에 이어 검찰이 왜 이렇게 무리수를 연발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검찰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을 따름이다.

한달여간 2개 부서를 동원하고 검찰이 얻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전 정권에서도 권력편향적이라는 비판은 숱하게 받아왔지만 그래도 나름 체제안정에 이바지 한다는 자기만족감은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여권 내부권력다툼의 뒤치다꺼리만 하다 조롱만 당한 셈이 됐다. 대한민국 최고 사정기관의 체면이 여지없이 깎인 것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이같은 소모적인 사건이 박근혜정권 내내 반복될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한 검찰 인사는 "과거에는 검찰이 질서를 바로세운다는 자존감이라도 있는데 이제는 난장판이 된 집안청소만 죽어라 하고도 욕만 먹는 천덕꾸러기가 된 느낌"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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