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56년 치러진 제3대 대선에서 당시 진보당 창당을 준비하던 조봉암 후보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30%의 득표율을 보였다. 2대 대선 때 얻은 79만 여 표의 3배 가까운 216만 여 표를 획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난히 3선에 성공했지만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에 커다란 위협을 느꼈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1958년 1월 13일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발표했다.
평화통일론을 내세운 조봉암 등이 북한 간첩들과 접선해 공작금을 받았으며 공산당 동조자들을 국회의원에 당선시켜 대한민국을 음해하려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정권은 한 달 만인 2월 25일 진보당의 정당등록을 전격 취소했다. 입헌 이래 우리나라 최초의 정당 해산이었다. 그리고 조봉암 등 간부들을 줄줄이 기소했다.
그러나 1심 재판 결과 대부분의 사실이 조작됐음이 밝혀졌다. 대부분의 간부들은 무죄를 선고받고 당수인 조봉암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이 선고됐다.
그러자 시위대가 법원 청사에 난입해 1심 판사를 비판하며 '간첩' 조봉암을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등 사회적 분위기가 얼어붙었고 이후 법원 판결의 기류도 바뀌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평화통일론 등 통일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잦아들었고, 혁신정당의 활동도 위축됐다.
사건 49년 만인 2007년 9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는 이승만 정권에 의한 비인도적이고 반인권적인 인권 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라고 결론짓고 국가의 사과와 명예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이어 2011년 1월 16일 대법원은 조봉암의 재심사건 선고 공판에서 대법관 13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조봉암의 누명이 벗겨진 지 3년 만이자 조봉암의 진보당이 해산된 지 56년 만인 2014년 12월 19일 또 하나의 진보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