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진당 자체는 3년 전인 2011년 12월 창당됐다. 그러나 정책 내용이나 구성원들의 연속성 등을 감안하면 2000년 1월 창당된 민주노동당이 효시다. 해산심판의 원인 제공자인 이석기 의원 등 '경기동부연합' 세력 역시, 2001년 9월 '군자산의 약속' 뒤 합류한 다른 자주파(NL) 세력과 달리 거의 민노당 창당과 동시에 입당해 터줏대감 노릇을 했다.
앞서 민주노총 중심으로 1997년에 건설국민승리21이란 정당이 생기기도 했으나, NL의 참여가 없어 정당의 구성이나 성격, 영향력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국민승리21은 1999년 11월 민노당 창당준비위로 전환되면서 자진해산했다.
통진당은 그동안 2번의 대선과 4번의 총선을 완주했다. 대선에서는 3%대의 득표율로 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총선의 경우 의미있는 성과를 낸 편이다. 의석수는 4년마다 부침을 반복했다.
그러나 해산당하기 직전 통진당 의석수는 5석 뿐이었다. 정의당이 분당돼 이탈하는 등의 격변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에 앞서서도 통진당은 분당-합당을 반복했다.
당초 평등파(PD) 중심으로 창당됐지만, 2001년 '군자산의 약속' 뒤 NL 세력이 대거 합류하면서 당내 역학구도가 바뀌어갔다. 이에 따라 NL·PD 간 알력도 증폭됐고, 17대 대선 직후인 2008년 2월 결국 PD 세력이 떠나가는 '1차 분당'이 발생했다.
계기는 '종북노선 청산' 문제였다. 2008년 2월 당대회에 심상정 의원은 보안법 위반 유죄가 확정된 NL파 당직자들의 제명안을 담아 당 혁신안을 상정했다. 그러나 NL 계열 대의원들이 수적 우세를 앞세워 제명안을 파기하는 등 자파 이기주의로 일관하면서, 심상정·노회찬·조승수 등 PD 계열의 이탈을 초래했다.
갈라진 두 정당은 18대 총선 때 '반토막'(민노당)과 '0석'(진보신당)의 저조한 성적을 냈다. 진보 정치권 내에서는 통합 논의가 계속 이어졌고, 이 결과 심상정·노회찬·조승수 등 '진보신당 탈당파'와 NL 중심의 민노당이 분당 3년여만인 2011년 12월 통진당으로 합당했다. 친노계 국민참여당도 가담했다.
이를 통해 이듬해 19대 총선에서 역대 최고성적을 냈으나, 다시 쪼개지기까지는 고작 10개월밖에 안 걸렸다. '2차 분당'의 원인은 비례대표 경선 부정에 따른 갈등이었다. 당시 당내 진상조사위는 물론, 검찰 수사에서도 모든 정파에서 두루 경선 부정사례가 있었음이 확인됐다.
그러나 다른 정파들과 달리 유독 민노당계만, '비례대표 의원직 사퇴' 등 정치적 책임을 지자는 진상조사위의 결정을 거부했다. 여기에 '머리끄덩이녀'를 비롯한 민노당계의 폭력 행위까지 발생해 여론이 등을 돌렸다. 이후 2012년 10월 PD계와 친노계가 떨어져 나가 7석 의석의 정의당(현재 5석)을 창당한다.
통진당은 이후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의혹, 북핵과 3대 세습에 대한 무비판 행태 등으로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경기동부연합 세력의 수장으로 통하는 이석기 의원은 금배지를 단지 2달만에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이 때 같은 야당에서조차 "상식 이하"(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라는 비판이 나왔다.
민노당 창당멤버 출신의 한 정치인은 "엄연한 합법 정당을 해산한 박근혜정권의 행태는 분명한 잘못"이라며 "하지만 통진당 자신들이 이런 상태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