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정부가 무섭다는 'D의 공포'…쓸 돈도 없는데 웬 물가걱정? ② 빚 위에 선 가계경제…"더 이상 줄일 데가 없다" ③ "정부 못 믿는다"…'각자도생' 나서는 사람들 |
# 딸 하나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30대 중반의 맞벌이 부부. 한달 통장에 곧바로 꽂히는 임금이 8백만 원 가까이 된다. 하지만 통신요금(10만원), 은퇴하신 양가 부모님께 보내는 돈(60만원), 아기 분유와 기저귀(40만원), 식비(40만원), 차량 유지비(20만원), 각종 공과금(40) 정도가 매달 나가는 돈이다. 여기에 대출을 끼고 집을 사면서 생긴 이자가 다달이 50만원씩이다. 돌발변수가 완전히 제거된 고정비가 월 300만원 정도다.
스스로 가계경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편"이라고 평가하는 두 개 사례다. "우리가 이렇게 빠듯한데 부부 양측이 모두 비정규직인 가계는 어떻게 사는지 상상이 안된다"고 입을 모은다. 마이너스 규모가 커질 것을 우려하는 ㄱ씨 사례는 8월을 기점으로 11월 말까지 월평균 5조5,000원씩 늘고 있는 은행 가계대출의 단적인 예다. 그나마도 제도권 안의 얘기고, 마이너스 경제가 이어지다 신용이 떨어지면 고금리 대출 쪽으로 가야한다. 16일 서울시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채무자 5명 가운데 1명꼴로 연이율 20% 이상의 고금리 대출을 이용 중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30대 맞벌이 부부 ㄴ씨는 "어린이 집에 보내는 것은 그나마 무상보육의 혜택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유치원 때부터는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며 "장차 보육비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 정규직 보호를 축소하겠다는 정부 발표까지 생각하면 당장 줄일 수 있는 소비는 다 줄여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ㄴ씨는 그래서 최근 중형 가솔린 차를 처분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휴대폰도 3년째 쓰고 있지만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대기업 정규직조차 빚 위에 서서 가계경제를 꾸리고 있다. 막 사회에 나온 20대, 갓 결혼해 집을 마련한 30대 초반의 가계경제는 '당연히' 마이너스에서 시작한다. 정규직 임금의 60% 정도를 받는 비정규직은 마이너스 규모가 더 커진다. 향후 가계경제에 대한 부담감도 더 클 수밖에 없어서, 소비를 줄이는 수준 역시 커진다.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이 소비 위축에 따른 결과임을 감안하면, 정부의 잇따른 디플레이션 경고 자체는 틀린 게 아니다. 문제는 정부가 경고장만 남발하면서 소비를 늘리라는 주문만 할뿐 소비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쓸 돈'을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가에 대한 얘기는 없고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4%에서 낮춘다', '디플레이션 우려' 식의 겁주기만 있다.
30대 회사원 ㄷ씨는 "디플레를 실감하는 것은 유가가 내려가서 좋은 기업이나 트럭운전사가 전부 아니냐"며 "월급이 제자리인 직장인들은 물가 낮아질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다. 정부 혼자 걱정을 하기는 하는데, 소비를 늘려야 한다면서 ''가계가 쓸 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얘기는 전혀 안하지 않냐"고 볼멘 소리를 냈다.
가계경제 주체들의 일반적인 상황은 '허리 띠를 졸라멜 대로 졸라메고 있다. 따라서 더 줄일 곳도 없다'는 것이다. 집값을 올려 경기를 살리겠다는 '빚 내서 집사라'는 식의 정부 시도는 안그래도 집값 부담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황당한 주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불황 10년'의 저자이자 내가꿈꾸는나라 공동대표인 우석훈 경제학 박사는 "고용 문제와 관련해서는 디플레가 일반 서민들에게 나쁠 수 있다. 경기가 안 좋으면 일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도 비정규직 일자리만 늘어나는 상황을 계속 확인해 오면서, 일반 경제주체들은 굳이 소비를 통해 경기를 일으킬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