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문구를 보면 “그래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야지”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바쁜 일상에 나도 모르게 또다시 하루를 대충 산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하루를 쓰다’라는 365명이 손으로 하루씩 쓰는 2015년 달력 만들기 프로젝트를 보게 됐다. 사진에는 전 국사편찬위원장이자 기독교계 원로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4, 이만열’을 쓴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당신(이만열 명예교수)께서 가장 의미 있는 날을 7월 중에서 고른다면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던 4일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냉전시대 남북 대치 상황에서 당시의 신선한 충격은 6.15공동성명이나 10.4공동성명에 비할 데 없었던 강도였다고 하시면서 (호외가 발행되었던 기억도 나누어주셨습니다.) 퇴행하고 있는 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염려와 충고를 아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글을 보고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전율을 느꼈다. 일생을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남북 화해를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만열 명예교수에게 ‘7월 4일’은 그 어떤 날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루’인 것이다.
내가 무심코 지나치는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가장 귀한 하루일 것인데, 이러한 중요한 하루들 365개를 모아 달력으로 만든다니. 이 글을 올린 지인에게 곧바로 메시지를 보내 프로젝트 기획자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프로젝트 진행 초기 때 내게 취재를 요청했었는데 거절당했단다. “이게 무슨 소리람. 나를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것 아닌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그날 저녁 아내와 이야기하던 도중 떠올랐다. 그는 아내의 지인이었고, 지난 6월께 아내를 통해 내게 취재를 요청했던 것, 그때 내가 ‘지금 체육팀에 있어서 내 분야도 아니고, 월드컵 때문에 바빠서 시간도 안 된다’며 거절했던 게.
5개월이 지난 뒤 이번에는 내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최 작가님이시죠? 저는….” 그렇게 지난 5일 오후 종로 어느 카페에서 ‘하루를 쓰다’ 기획자 최성문 작가를 만났다. 미안한 마음을 품은 채.
◈ "시작은 노숙인 자활 위해"…"초기에는 ‘이게 뭔데’ 반응뿐"
‘하루를 쓰다’ 프로젝트 시작은 노숙인의 자활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도시 빈민과 노숙인에게 무료급식을 하는 단체 ‘바하밥집’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최 작가는 ‘어떻게 하면 이들의 자활을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올해 초 ‘365명의 하루를 담는’ 이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노숙인들을 시작으로 월별로 ‘하루’를 받을 그룹을 정하고, 밥집 측에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밥집의 반응은 ‘그게 뭔데?’였다. 기존에 이런 달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최 작가의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밥집 한편에 먹과 붓·종이를 비치한 책상을 설치하고, 노숙인들에게 ‘숫자와 서명을 써 달라’며 참여를 요청했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노숙인들이 하나둘씩 숫자를 써 나갔다. 이름을 공개하기 꺼리는 이들은 '머털이'·'야호'·'아줌마' 등 자기만의 필명을 적었다.
1월을 노숙인과 자원봉사자들로 채운 최 작가는 다음 달들을 채울 그룹을 만나러 붓과 종이를 챙겨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2월은 ‘외국인 노동자’, 3월은 ‘SNS 친구들’, 4월은 ‘문화·예술인’ 5월은 ‘어린이’, 6월은 ‘탈북 새터민’, 7월은 ‘평화를 꿈꾸는 사람들’ 등 다양한 그룹의 사람을 직접 만나야 했다.
붓으로 글씨를 써 달라고 하면 상당수가 '이게 뭔데'라는 반응이었다. 노숙인을 돕는다는 좋은 취지가 담겼으니 마냥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이게 될까'라는 의문을 품은 것이다.
그렇게 1월부터 9월까지 364명의 글씨를 받으러 돌아다녔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과 이야기는 블로그(http://haru365.tumblr.com/)
와 페이스북 페이지 ‘아트랩꿈공작소’에 하나씩 올렸다.
처음에 글씨를 요청받고도 거절했던 사람들이 뒤늦게 참여하고 싶다고 연락할 정도였다. ‘이게 뭔데’라며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던 프로젝트가 이제는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 기금 마련 넘어, 하루의 소중함 깨닫게 하는 예술 작품
이 프로젝트가 알려지면서 언론도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대다수가 ‘노숙인 자활 기금 마련을 위한 달력 제작 프로젝트에 연예인 등 유명인이 참여했다’는 주제로 보도했다. 보도는 매우 고맙지만 최 작가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도 있다. 의도한 것의 절반만 보도됐기 때문이다.
“노숙인 자활 기금을 마려하는 것 외에 이 프로젝트의 또 다른 의미는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시간’을 되찾아주는 거예요. 하루를 쓰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하루’의 소중함을 상기시켜주는 활동인 거죠.”
사실 ‘하루를 쓰다’의 ‘쓰다’는 글씨를 쓰다의 'write'가 아니라는 게 최 작가의 설명. ‘사용하다, 참여하다, 베풀다’ 등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처음에 작가의 요청으로 무심코 참여했던 사람들도 프로젝트가 마무리 되가는 지금은 그 의미를 느끼고 있다.
“예를 들면 내가 너를 위해 오늘 하루를 ‘쓴다’, 이런 중의적인 의미가 들어간 거죠. 어떤 분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는 ‘좋은 취지네. 20분 정도만 투자하자’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여러 사람들의 ‘하루’가 모이고 그 이야기들을 읽을수록 ‘내가 엄청난 일에 참여했구나’라고 말하시더라고요.”
“하루라는 것이 나만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누군가도 하루를 사는구나. 나만 슬픈 게 아니구나. 누군가의 하루는 더 버겁구나. 내가 깨고 다가가야 할 하루를 알게 된 거죠. 인간은 자기중심적이잖아요. 나만 사는 것 같다니까요. 하지만 똑같은 하루를 누군가도 살고 있는 거죠. 사람도, 동물도, 자연도 모두가 하루를 살고 있구나. 그런 우주적인 의미를 느낀 거죠. (웃음)”
때문에 달력을 구매하는 사람도 ‘소중한 하루’를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하루를 비워뒀다. 구매자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10월은 ‘광장 시민’ 그룹이 참여했어요. 그 마지막 날인 ‘31일’을 구매자가 쓸 수 있도록 비워뒀죠. 우리는 모두가 이 땅의 시민이잖아요. 그러니 달력을 사자마자 자기의 하루를 적어야 해요. 그러면 이 달력은 365명만 참여하는 게 아니에요. 1,000명이 사서 하나씩 쓰면 1,000명이 참여한 게 되는 거죠.”
그는 단순히 달력 만들기로만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려 하지 않는다. 또 다른 예술로 승화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저는 예술의 역할이 예쁜 것을 예쁘다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발견되지 않은 아름다움의 가치를 만들어 주는 것이죠. 하루를 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도 제작하고, 365개 손 글씨를 모두 동일한 크기의 액자에 담아 전시도 할 거고요, 노래도 만들고 영상도 만들 겁니다.”
실제로 '하루를 쓴다'라는 제목의 노래가 작사가 김수형, 작곡가 양소영, 가수 송정미, 해금연주자 김주리 등 여러 재능 기부자의 도움을 받아 완성될 예정이다. 또 예술가들의 작품과 365개의 숫자를 전시하는 '하루를 쓰다‘ 전시회를 오는 19일부터 내년 1월 11일까지 서울 양재동 코트라오픈갤러리에서 연다.
달력 판매 순수익금 전액은 바하밥집을 통해 노숙인 자활기금으로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