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부당국의 대처는 안이하다. 하루만에 주민 대피령을 해제해놓고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CBS는 불산 가스 누출 사고 이후 공장과 그 주변 마을에 드리워진 "재앙의 그림자'와 사지(死地)에 방치된 주민들, 공장 근로자들의 실태를 심층 취재한다. [편집자 주]
| 글 싣는 순서 |
| 1. 재앙이 시작됐다. 2. 감춰진 진실 3. 사지(死地)에서의 하루하루 4. 예견된 인재...대안은 |
탱크 접속 부위가 펌프 압력으로 순간 튕겨져 나오면서 55%의 불산 가스가 분출돼 얼굴과 가슴, 눈 주위에 화상을 입은 것.
박 씨는 병원으로 옮겨져 20일 동안 입원치료를 받고 다시 회사로 복귀했지만 몸은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견디다 못한 박 씨는 결국 회사를 나와야 했다.
2009년 6월 30일 구미4공단 내 '휴브글로벌'에서 일했던 인부 박 씨의 이야기다.
3년 후, 이 공장에서 똑같은 불산 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20톤의 가스가 공중으로 방출됐고 이번엔 인부 5명이 목숨을 잃었다.
3천명이 넘는 주민들이 불산 가스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 사고 공장 주변의 나무와 농작물이 모조리 말라 죽는 등 피해가 확산되자 정부는 마을 일대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다.
2009년 사고 이후 관리 감독이 제대로 시행됐다면 수천명의 사상자도, 주민들이 공포에 떨며 살던 마을을 등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3년 전에도 휴브글로벌에서 불산 가스 누출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 환경노동위원회 심상정 의원(고양 갑)은 국정감사에서 "3년 전 똑같은 사고가 발생했지만 노동부와 구미시 등 유관 기관 어느 곳도 사후 대책이나 관리 감독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관리 감독이 느슨하다보니 현장에서는 안전관리 매뉴얼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경찰 조사 결과 휴브글로벌의 안전관리자는 사고 당시 출장을 갔던 것으로 조사됐다. 인부 5명은 관리자 없이 보호복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고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하대 산업의학과 임종한 교수는 "소규모 업체의 경우 안전사고 대비 매뉴얼 교육이 안 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며 "행정 당국의 관리 감독도 허술하다보니 정보도 부족한 상황에서 사고가 터지면 대처 능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불산 오후 3시에 누출됐는데 환경부 저녁 8시에야 '주민 대피령'
정부의 무능한 위기 관리와 안이한 인식도 구미 사태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된다.
환경부의 <화학 유해물질 유출사고 위기대응 실무매뉴얼>에 따르면 구미 사태와 같은 대규모 화학 유해물질 누출 사고로 인명피와와 환경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유관기관과 상부에 상황을 전파한 뒤 오염 통제선을 설치하고 주민 대피조치를 즉시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사건 발생 3시간이 넘은 저녁 7시 10분에서야 1.4km 이내 50여명의 주민에게 대피를 유도했고, 반경 3km 안의 주만 1천177명에 대한 환경부의 대피령은 저녁 8시에나 이뤄졌다.
이마저도 사고 현장에서 불산이 기준치 이하로 검출됐다는 국립환경과학원의 검출 결과를 토대로 정부는 다음날 새벽 3시 30분 '심각(Red)'단계를 해제했다.
또 환경부와 행안부 등 주무 부처는 지난달 29일부터 나흘 동안 총리실과 청와대에 구미 사태 보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정부의 위기관리대응에 총체적 부실이 있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환경운동연합 등 구미 지역 시민단체는 "이번 사태는 형식적 관리와 안이한 대응으로 벌어진 예고된 인재였다"며 "부실한 관리로 인한 건강성 침해와 사고 위험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마련에 나서라"고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 美, 25년 전 불산 누출시 주민 4천면 긴급 대피…2년간 역학조사
25년 전 미국 텍사스주에서 우리와 비슷한 양상의 불산 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했지만 미 당국이 보여준 발빠른 대응 태세는 우리 정부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1987년 10월 30일 텍사스 주 한 공장에서 30톤에 가까운 불산 가스가 누출되자 해당 공장은 7분만에 가스 누출을 차단했고 주 정부는 두 시간 안에 반경 800m 안의 주민들 4천여명을 모두 대피시켰다.
이후 정부는 2년 동안 사고지점으로부터 반경 4km의 주민을 대상으로 추적 역학 조사를 실시했다.
또한 미국 환경보호청(EPA)는 불산 누출 사건을 계기로 불산가스 안전관리에 관한 연구를 미 의회에 제출해 불산가스 안전관리에 관한 기후프로젝트(Clean Air Act) 법률 개정안을 이끌어냈다.
이 법안을 근거로 미국은 불산을 취급하는 공장에 가스누출 감지 시설 장착, 누출시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응급 희석하는 장치를 의무로 장착하게 했다.
또한 주민 대피를 위해 이상 징후가 감지되면 지역 관청과 소방서에 긴급 알람을 울리게 끔 하는 핫라인도 마련했다.
3년 전 휴브 글로벌 공장에서 불산 가스 누출이라는 똑같은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어떠한 조치나 시정 명령도 내려지지 않고 사건이 종결된 우리 정부의 대응과 여실히 비교되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제 3의 구미 불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긴급상황발생시 신고 단계부터 전문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전문가 풀을 도입하고 정확한 방제 방법을 지시할 수 있도록 화학물질 사고대응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이윤근 소장은 "정부가 공장 주변 마을 주민들에게 해당 물질의 위험성과 사고 발생시 대피 요령 등을 교육시키는 것은 물론, 사고의 원인을 당시 작업중이던 인부의 실수로만 몰고갈 게 아니라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또 "현재 우리나라 응급 구조 체계에서는 화학물질 누출 사고가 났을 때 사고의 위험성을 판단할 기능이 없다"며 "소방방재청이 사고 접수만 할 게 아니라 화학전문인력 풀을 갖춰 해당 물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판단해 지시를 내리는 사고대응시스템을 만들면 피해는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