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된 손학규의 꿈, 민주당 5년 그가 남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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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 민주당을 살려 주십시오"

16일 민주통합당 서울 지역 경선장. 손학규 후보는 마지막 연설이라는 것을 예감한 듯 담담하게 호소했다. 야권으로 들어온 지 5년. 그는 치열하게 정치를 했고, 꽉 찬 시간을 보내왔다.

민주당 대표를 두 번이나 역임하고, 대선 경선에도 두 번째 출마했지만 결국 과반을 얻은 문재인 후보에게 18대 대통령 후보직을 넘겨줬다.

1947년 경기도 시흥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손 후보는 여야를 두루 거치며 좌와 우를 넘나드는 폭넓은 정치 스펙트럼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시절 고 조영래 변호사, 고 김근태 상임고문과 함께 '운동권 3인방'으로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빈민 운동과 노동 운동을 벌였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한 뒤 1988년부터는 인하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학자의 길을 걸었다.

1993년 경기도 광명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당선돼 정계에 입문한 뒤 탄탄대로를 달렸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거쳐 2000년 3선에 성공한 후 2002년에는 경기도지사에 당선돼 당시 한나라당의 잠재적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뿌리 깊게 박힌 그의 야권 DNA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결국 탈당을 결심하고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하게 했다.

많은 야권 인사들이 그의 입당을 환영했지만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늘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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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손 후보는 대선 완패 직후인 2008년 위기에 처한 대통합민주신당 대표직을 맡았으며, 2010년 두 번째 대표로 선출돼 당원들로부터 또다시 부름을 받았다.

"대선 패배 이후 독배를 받아든 심정으로 민주당을 맡아 지켰다"고 그는 회고한다.

'독배'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2011년 재보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텃밭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을에 출마를 요구받아 사지에서 살아남았다.

그해 연말에는 '혁신과 통합' 등 시민사회와 야권세력을 아우르는 민주통합당을 창당시키며 통합의 과업을 완수하고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마지막 연설회에서 그는 "사람들은 말한다. 손학규는 바보라고. '통합 안 하고 그냥 있었으면 민주당 후보가 됐을텐데 왜 괜한 고생해 이 지경이 되었느냐. 그 고생하고 누구 좋은 일 시켰느냐'고 한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저는 야권 대통합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대선에 출마한 손 후보는 경선 초반 기세를 잡아 결선투표에서의 반전을 꿈꿨지만 제주 경선에서의 패배 이후 모바일 투표에 대한 문제제기에 앞장서면서 부침을 겪었다.

하지만 경선 중후반까지 대의원, 투표소 투표에는 문재인 후보를 앞서 나가며 탄탄한 당심을 확인했다.

"반성하지 않는 세력으로는 정권교체를 이룰 수 없다"며 친노 진영과 문재인 후보에 대해 거침없는 각을 세우기도 했다.

결선투표 좌절로 대통령 꿈은 멀어졌지만 손 후보가 경선 과정에서 남긴 것은 적지 않다.

'저녁이 있는 삶', '맘(mom) 편한 세상'이라는 구호로 경제민주화를 위한 탄탄한 정책을 내세워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굵직한 정책발표회만 수 차례 열어 문 후보가 "후보가 되면 정책을 빌리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선거에서 중립을 지킨 민주당 한 의원은 "손학규는 내용적으로 보면 가장 진보적이고, 완성된 정책을 준비해 왔다. 하지만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심해지면서 그의 오랜 정치 이력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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