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 송 : FM 98.1 (18:00~20:00)■ 방송일 : 2012년 9월 14일 (금) 오후 7시■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출 연 : 김재열 목사(故김용원 선생 유족), 당시 대법원 공무원 OOO씨
▶정관용> 시사자키 2부 시작합니다. 오늘 2부, 초대석, 그리고 짧은 전화연결 하나로 꾸밀 텐데, 그 두 주인공 모두 시사자키의 애청자분들입니다. 인혁당 사건 관련 논란이 뜨겁지요. 저희 시사자키도 몇 차례에 걸쳐서 관련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방송을 들으시다가 많은 청취자들이 저희 방송국으로 직접 연락을 주셨는데요. 그 가운데는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였던 고 김용원 선생의 유족도 계셨고, 당시 대법원에 근무했던 직원도 계셨습니다. 이 두 분을 저희가 만나려고 합니다.
▶정관용> 지난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고 김용원 선생의 조카 되는 분이 저희에게 연락을 주셔서 오늘 이렇게 모셨습니다. 부산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 김재열 목사님이세요. 지금 CBS 부산 스튜디오에 나와 계십니다. 김 목사님, 안녕하세요?▷김재열> 예, 안녕하세요?
▶정관용> 삼촌이시지요, 그러니까, 김용원 선생이?▷김재열> 예, 그렇습니다.
▶정관용> 우선 삼촌이 어떤 분이셨는지 소개해주세요.▷김재열> 작은 아버지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시고 또 경기여고 선생님으로 계시다가 인혁당 사건을 당해서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거지요.
▶정관용> 교사로 계시다가?▷김재열> 예.
▶정관용> 그런데 아무런 활동도 없었는데 그냥 끌려가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떤 연관이...▷김재열> 그런 것은 제가 이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여름방학, 겨울방학이면 작은 아버지 집에서 생활을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 제가 일년에 몇 달은 지켜볼 수 있었는데요, 이제 작은 아버지가 가끔 술을 잡수시면 야, 이거 유신헌법 이것 말이야, 대통령이 이제 죽을 때까지 하려고 하는 것이 유신헌법이다, 총통이다, 말이지. 이제 이런 이야기를 어릴 때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지만...
▶정관용> 물론이지요.▷김재열> 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관용> 구체적으로는 어떤 연고로 어떻게 해서 이렇게 엮이게 되셨는지 그 과정은 잘 모르시겠군요.▷김재열> 예.
▶정관용> 75년 그 당시에 우리 김 목사님은 몇 살이셨어요?▷김재열> 제가 58년생이니까 만 17세, 우리나이로 18세이고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정관용> 고등학교 2학년?▷김재열> 예.
▶정관용> 그러면 작은 아버지께서 끌려간 그 날이나 이런 것 다 기억하세요?▷김재열> 끌려간 것은 모르고 제가 이제 시신을 인수하러 서대문 형무소에 갈 때 작은 어머님은 이미 뭐 집에서 초죽음이 되신 상태로 실신하셨고, 또 저희 조카, 그러니까 작은 아버님의 아들이 있고, 또 딸이 둘인데요, 아들은 민완이고, 딸도 제 사촌동생들은 효숙이하고 정진이라고 하는데, 그때 뭐 너무 어렸지요.
▶정관용> 그랬겠지요.▷김재열> 그래서 이제 서대문 형무소로 이제 유가족들이 갔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제가 사실 아마 제일 좀 정신적으로 또 혹은 생각이 좀 안정이 되었던지 제가 인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신을.
▶정관용> 아, 그러니까 작은 어머님하고도 같이 가시기는 했어요?▷김재열> 아니요, 작은 어머님은 집에 쓰러지셨지요.
▶정관용> 아예 같이 못 갔고?▷김재열> 예, 방화동 집에.
▶정관용> 그러면 조카들하고 같이 갔어요?▷김재열> 아니요, 그건, 아예 완전히 애기니까 갈 수도 없었고.
▶정관용> 그러면 혼자 가셨어요?▷김재열> 아닙니다, 우리 다른 작은 아버님들하고 갔는데 어르신들이 이제 술을, 너무 이제 속이 상하고 하시니까 술도 많이 잡수셨을 거고. 그러나 그건 뭐 어떤 술이 좋아서 먹은 게 아니라 어찌할 수 없이 한잔씩 잡수신 것이고.
▶정관용> 그 터지는 속을 달래시느라고?▷김재열> 그럼요. 그래서 제가 이제 시신 인수하는데 서명을 하고 시신을 인수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정관용> 고등학교 2학년인데?▷김재열> 예, 저는 그때 까까머리 검은 교복을 입고 당시 서대문 형무소... 저는 부산에 살아서 서울 지리를 잘 몰랐습니다.
▶정관용> 그러면 김 목사님 아버님이 제일 큰 형인가요?▷김재열> 예.
▶정관용> 그리고 그 밑으로 형제가 어떻게 됩니까?▷김재열> 작은 아버님, 돌아가신 작은 아버님 위로 저희 아버님까지 네 분이 더 계셨지요. 고모님들도 물론 계셨고.
▶정관용> 그러니까 고 김용원 선생의 바로 윗 형님들도 같이 가시기는 했는데 그분들이 그런 상태였군요?▷김재열> 예, 뭐 전혀 어떤 마음을 추스르시지를 못하시고... 속이 너무 상하셔서...
▶정관용> 시신을 직접 그러면 사인만 한 게 아니라 직접 보셨을 것 아닙니까?▷김재열> 아, 예, 봤지요. 제가 얼굴을 확인했고.
▶정관용> 어떻든가요? ▷김재열> 시신을 인계받을 때 보니까 이건 관이 아니고 무슨 옛날 시장의 생선상자 같은 아주 얇은 궤짝 있지 않습니까? 그런 합판으로 만든 엉터리 관이었어요.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되신 작은 아버님 얼굴을 마지막 볼 수밖에 없었던 저는 지금도 그 모습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온 몸이 보라색이었고.
▶정관용> 보라색?▷김재열> 예, 온 몸이. 그리고 마치 호랑이 줄무늬 모양 같은 흔적도 몸에 있었고요. 저는 그때만 해도 그런 것이 고문 흔적이라고는 생각을 미처 못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얼마나 심한 고통과 고문을 당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관용> 4월 8일 대법원 판결이 있었고, 4월 9일 새벽에 집행이 되지 않았습니까? 언제 가신 거예요?▷김재열> 4월 9일 바로 갔지요.
▶정관용> 바로? 바로 통보를 하던가요?▷김재열> 예, 죽었으니까 이제 시체 인수해가라.
▶정관용> 바로 통보를 하던가요?▷김재열> 예, 그런데 그날 또 난리가 난 것이 일부 시신은 인수를 다른 어떤 유가족 분들은 못 받으셨어요.
▶정관용> 왜요?▷김재열> 화장. 화장을 해서 유골만 주고 저희 작은 아버지는 우리가 고향 선산에 바로 모시겠다, 하니까 허락을 해주어서 시신을 넘겨받고. 그리고 이제 그 당시에도 경부고속도로가 있었거든요. 75년도인가요. 그래서 경부고속도로, 하여튼 서대문 형무소에서 저희 고향 경남 함안 군북까지 가는데 계속 시커먼 지프차, 그게 앞에서 영구차를 선도하고 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장례식 치르고.
▶정관용> 며칠 전에 저희가 민주통합당 유인태 의원 연결해서 이야기 들었더니 시신을 다 화장해가지고, 일방적으로. 그래서 화장한 유골만 줬다, 이랬는데.▷김재열> 그런 분들이 많고.
▶정관용> 그런 분들이 있었군요.▷김재열> 저희 작은 아버지는 저희에게 시신을 넘겨주고 일체 뭐... 고속도로 가다가 제가 기억나는 것이 경부고속도로 내려가면서 오줌이 마렵지 않습니까? 휴게소를 못 들어가고...
▶정관용> 쉬지도 못하게?▷김재열> 갓길에 세우고 갓길에서 볼일 보라고 그랬어요, 그때도.
▶정관용> 그렇게 해서 곧바로 그러면 장지로 간 겁니까?▷김재열> 예, 바로 매장했습니다.
▶정관용> 아, 장례식 같은 것도 못하고?▷김재열> 예.
▶정관용> 왜, 그건 못하게 했어요?▷김재열> 예.
▶정관용> 바로 가서 매장해라, 이렇게 된 거군요?▷김재열> 예. 그거 뭐 삼일장이니 오일장이니 그런 것 자체가 없었고...
▶정관용> 그러게요.▷김재열> 여하튼 바로 모셨습니다, 시신을, 저희 선산에.
▶정관용> 그런데 어떤 분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화장을 하고 어떤 분은 그나마 시신을 넘겼을까요?▷김재열> 글쎄요, 그건 제가...
▶정관용> 그건 모르시겠어요?▷김재열> 예.
▶정관용> 하지만 넘겼다 하더라도 장례식도 못 치르고 그냥 곧바로 매장이다. 이건 뭐 참 어처구니가 없네요.▷김재열> 예.
▶정관용> 그때 이제 다른 작은 아버지나 이런 분들께서 너무 속이 상해서 술까지 드시고 이랬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형 판결나고 집행되리라고 예상하셨어요?▷김재열> 아닙니다.
▶정관용> 전혀?▷김재열> 솔직히 어린 저도 설마 작은 아버지가 무슨 뭐 큰 중죄를 지은 것도 아니거든요. 다만 이제 그 당시에 30대 지식인들이 유신헌법 뭐 이런 것에 대해서 뭐 시국 토론 비슷하게 모여서 할 수도 있었겠지요. 왜 못합니까. 그런데 어쨌든 엮여서 뭐 그 이전에, 10년 전에 인혁당 사건 그것이 60몇 년도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이제 작은 아버지를 재건위다.
▶정관용> 그랬습니다.▷김재열> 인혁당 재건위. 그거 순 엉터리지요, 그거.
▶정관용>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집행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다가... 대법원 판결 있다는 건 알고 계셨고?▷김재열> 예.
▶정관용> 그런데 집행되자마자 연락이 왔고?▷김재열> 예.
▶정관용> 아이고. 김 목사님 잠깐만 계시고요, 그 당시에 대법원에 근무했던 직원분 가운데 한분도 또 저희 방송국으로 연락을 주셔서 지금 저희가 전화로 좀 만나보겠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셔서 공무원은 아니시지만, 아직 동료들이 계셔서 익명을 원하셨어요. 그냥 한번 연결합니다. 여보세요?▷OOO> 예, 안녕하세요?
▶정관용> 75년 그 당시에 대법원에서 어떤 일을 하셨던 분이지요?▷OOO> 저기 우리 법원은 저희 일반 직원들은 재판 업무에 보조 역할을 하지요. 대법원 대법관들이 재판하기 위해서 기록을 만들어준다든가 하는 그런 보조 업무를 했지요.
▶정관용> 기록 만들고 하는 등등의 사무보조?▷OOO> 예, 사무보조이지요. 원래 법원에는 일반직이 있고 왜 법관직이 있지 않습니까?
▶정관용> 그렇지요. ▷OOO> 그러니까 우리 일반직은 그렇게 했지요.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러면 직접 인혁당 사건 관련 기록을 이렇게 묶거나 복사하거나 그런 일도 하셨어요?▷OOO> 수도 없이 봤지요.
▶정관용> 그 자료...▷OOO>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건이 그러니까 대법원에 오기까지는 검찰을 거쳐서 와요.
▶정관용> 물론이지요.▷OOO> 기록이. 그 검찰에서 넘어올 때부터 야, 이것 도대체 누구한테 배당이 될까, 어느 법관에게 배당이 될까, 이게 상당히 관심사였고요.
▶정관용> 왜 그랬습니까? 그때 그게 왜 그게 관심사였어요?▷OOO> 그게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유, 그 당시는 참... 그 당시에는 법원에 정보부원들이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통해서도 그런 정보도 듣고 그랬지만 중요한 건 어쨌든 그 사건이 곧 온다, 오게 되어 있다, 하면 이제 누구한테 배당이 될까. 배당은 그 당시에 어떻게 했느냐 하면 추첨을 해서, 화투장 가지고 추첨을...
▶정관용> 화투장으로 추첨을요?▷OOO> 예,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래서 1번이 나오면 1번 판사, 2번이 나오면 2번 판사, 그런 식으로 했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배당했는데 이것은 굉장히 정치적인 사건이라 과연 배당이 누구에게 되느냐, 이것이 상당히 관심사였지요. 그 정도 사건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신경을 썼던 그런 거였습니다, 어쨌든요.
▶정관용> 당시 대법관들이 뭐 너도 나도 이 사건을 맡기 싫어했나요, 혹시, 분위기가?▷OOO> 당연하지요. 당연했고요, 이것을 누구도 맡으려고 안 하고, 심지어 어느 대법관은 아예 그 며칠 결근도 했어요.
▶정관용> 아이고.▷OOO> 제가 기억을 분명히 하는데, 결근을 하신 이유가 이 사건 때문에. 배당이 된다고 하니까, 그분한테 배당이 된다고 하니까 아예 결근을 해버렸어요.
▶정관용> 그러니까 법원 전체 분위기가 이 사건이 좀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고 조작되었다, 이런 분위기가 있었나요?▷OOO> 조작은 나중의 이야기이고요, 하여튼 이 사건은 정치적인 사건인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으니까 정치적인 사건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으니까 서로 맡기 싫어했지요.
▶정관용> 결국 누가 맡았는지, 뭐 지금 기록이 다 있으니까요.▷OOO> 예.
▶정관용> 누가 맡았습니까?▷OOO> 정확히 제가 좀 기억은 못하고, 너무 오래 됐지요. 정확히 기억은 못하고... 그래서 결국 그 판결은 전원합의체에서 했어요. 전원합의체에서 했고... 전원합의체에서 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렇게.
▶정관용> 그렇겠군요.▷OOO> 사안이 너무 힘들어가지고 전원합의체에서 결론을 맺었지요. 그리고 제가 그때 당시에 그 현장을 똑똑히 기억해요, 그거는.
▶정관용> 어떤 현장이요?▷OOO> 4월 8일 재판하던 날. 그때 이제 이 사건 때문에 우리 선생님이 아시나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 미국인 선교사가 있었어요. 오글 목사하고 시노트 신부. 이분들이 참 유명한 분들이었는데 이분들이 이제 결국 나중에는 이분들이 다 추방당합니다, 한국에서. 추방당하는데 이분들이 이제 거기 왔어요, 법정에.
▶정관용> 법정에 와서?▷OOO> 예, 그래서 좀 소란스러웠는데, 대법원에서는 그 당시에 그분들을 쫓아내거나 하는 조치를 안 취했어요. 그것도 참 이례적이기는 한데, 그래서 그날 전원합의체에서 그 당시에 대법원장이 판결만 읽고 나갔어요. 나가고, 그때부터 이제 좀 어수선했지요, 법정이.
▶정관용> 그렇겠지요.▷OOO> 굉장히 시끄러웠는데,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니까 아, 사형집행했다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대법원이, 그 당시에 송무국 형사과 그 분위기가 굉장히 심각했어요.
▶정관용> 그랬겠지요.▷OOO> 아, 이런 법은 없었으니까 이건 큰일 났다, 큰일 났다, 이런 식으로.
▶정관용> 큰일 났다?▷OOO> 예.
▶정관용> 그러니까 대법원도 곧바로 사형집행하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네요?▷OOO> 그렇지요. 그거는,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요. 원래 재심기간까지도 다 허락하잖아요.
▶정관용> 그렇지요.▷OOO> 그런데 이거는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이게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재판하고 2심을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것을 다루지가 않는데 신문도, 그러니까 엄청나게 조작되고 그 변론 기회도 없었던.
▶정관용> 그렇지요. ▷OOO> 그래서 실제로 강신옥 변호사는 이 인혁당 사건 맡았다가 구속되었잖아요.
▶정관용> 맞습니다.▷OOO> 그러니까 왜 요즘 언론들은 그 당시의 이 재판제도까지, 그걸 왜 이야기를 안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정관용> 고등군법회의, 군법회의에서 다 유죄판결하고 대법원에 와서는 그냥 형식적으로 간 거네요?▷OOO> 예, 대법원은 그 당시에 그건 뭐, 그 당시에 법이 그런 것이 있었으니까 대법원에서는 법률 심의만 하잖아요.
▶정관용> 그렇지요. ▷OOO> 그리고 지금 그 가족분이 이야기하셨잖아요. 그 당시에 그 상황, 그것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었어요. 그날 아침에 정보부 직원들이 와서 이렇게 이렇게 했다, 라는 이야기를 다 해주더라고요.
▶정관용> 집행했고, 어떻게 어떻게 했다?▷OOO> 예, 아, 자기들이 아, 시끄러웠어, 하면서... 예,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정관용> 알겠습니다. 이렇게 방송국으로 연락도 주시고 또 전화에 응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OOO> 예, 감사합니다.
▶정관용> 김재열 목사님, 지금 쭉 들으셨지요?▷김재열> 예.
▶정관용> 그러니까 법원도 이렇게 뒤숭숭하고 그저 그냥 끌려갔던 그런 상황이네요.▷김재열> 그 시대가 그랬겠지요.
▶정관용> 그렇게 돌아가시고 가족분들 그래 도대체 어떻게 사셨대요?▷김재열> 제가 이제 방학 때마다 작은 집에 가서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는데, 작은 어머님은 그 당시에는요, 아이템플이라는 일일 시험지가 있었어요. 아이들 이렇게 채점해주고 집집마다 배달하고 수거하고 점수 매기고. 그러니까 저도 사실 방학 때는 같이 답안지를 보고 채점 매긴 적도 있습니다만, 작은 어머님이 고생하신 것은요, 정말 이건 어떤 책을 써도 흔히 하는 말로 몇 권은 써야 할 겁니다.
▶정관용> 그렇겠지요. 그 어린 자식들 데리고 참...▷김재열> 예.
▶정관용> 그 자녀들은요, 잘 자랐습니까?▷김재열> 예, 참 감사하게도 민완이는 뭐 대학 이름을 밝혀서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정관용> 뭐 마음대로 하세요.▷김재열> 서울대학교 졸업했고요.
▶정관용> 그래요?▷김재열> 또 효숙이도, 정진이도 이화여대 마치고, 연세대학교 마치고 지금 아주 좋은 가정을 잘 이루고 서울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정관용> 혹시 그 자녀들이 진학 후에 뭐 취업하고 이런 등등의 불이익 당한 건 없어요?▷김재열> 제가 직접 경험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여하튼 저희들 가문 전체가요, 어려움이 많았지요. 왜냐하면 저희 사촌 가운데는 경찰 공무원에 합격을 했는데 결국 취소되었지요, 신원조회에서. 그리고 저희들 여권이 안 나왔습니다.
▶정관용> 그랬겠지요.▷김재열> 가족들 전체가.
▶정관용> 어디까지요? 가족들 전체라면 몇 촌까지요?▷김재열> 뭐 저희들, 부산에 있는 저희들도 그러니까 사촌들인지 뭐 어디까지인지는 그건 잘 모르지만.
▶정관용> 그러면 언제부터 여권 같은 게 나오고 그랬습니까?▷김재열> 그게 제가 뭐 해마다 신청한 것은 아니라서 모르지만 김대중 대통령 시대 이후로 기억합니다.
▶정관용> 그때 이후로?▷김재열> 김영삼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사실은 인혁당 사건 이게 억울하니까 좀 도와달라고 청와대에 민원을 넣고 그랬거든요. 그래도 전부 반송당했어요.
▶정관용> 아, 김대중 정부 이후 조금 변화가 있었다?▷김재열> 예.
▶정관용> 어휴, 다행인 게 그래도 그 자녀들이 잘 자라서 가족까지 이루고, 정말 그건 다행이고요. 그 김용원 선생의 형님들, 그러니까 우리 김재열 목사님 아버님이나 다른 작은 아버님들, 그분들은 어땠대요?▷김재열> 뭐 대표적으로 이제 저희 아버님은 그 이후로 이제 중풍을 맞으셔가지고 한 8년을 누워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고요. 그리고 뭐 여하튼 한 마디로 가문이 망한 것입니다. 가문이 망했다고 생각하시면 되고.
▶정관용> 그렇겠지요.▷김재열> 물론 이제 그 이후에 그 다음 세대들이 열심히 살아서 나름대로 이제 다 잘 살고, 또 기쁨으로 살고 있지만, 저는 목사가 되었고요. 인혁당 사건은 정말 우리 가문에는... 이건 뭐 사실 지금 한 세대가 지났지 않습니까?
▶정관용> 예, 32년 전이니까요.▷김재열> 37년. 한 세대가 지났기 때문에 저희들도 이제는 잊고 싶은데, 며칠 전에 박근혜 후보가 왜 판결이 두 개다, 말이지, 그런 어처구니없는... 아니, 대통령 후보를 한다는 분이 어떻게 판결이 두 개라고 말을 합니까? 그걸 또 어제인가 이 CBS를 들었거든요. 박효종 교수라는 분하고 어느 무슨 논설위원 하시는 분하고, 그런데 그분들도, 참 내 말하는 것 보니까 어처구니가 없더라고요.
▶정관용> 재심해서 2007년에 다 무죄로 판결났지 않습니까? 그때 느낌이 어떠셨어요?▷김재열> 저는 그날 현장에 있었습니다. 2007년 1월 21일로 제가 기억하는데요. 그날 서울중앙지법에서 이제 무죄판결을 받고, 이건 뭐 여담입니다만, 그날 점심을 그 당시에 철도공사 사장하시던 이철 씨가 사신 걸로 저는 기억합니다.
▶정관용> 이철 씨도 인혁당...▷김재열> 민청학련 사건.
▶정관용> 예, 민청학련 사건 연루자니까요.▷김재열> 예, 고생하셨지요. 그리고 이제 점심을 제공하시고 우리가 같이 눈물도 흘리고 그렇게 했지요.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리고 국가가 그래도 좀 배상을 했지요, 그 가족 분들께?▷김재열> 예, 뭐 어쨌든 작은 어머님은 이제 가족별로 여덟 가족이 다 보상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런 보상보다, 아마 작은 아버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저희 가문은 훨씬 더 좋은 집안이...
▶정관용> 당연한 일이지요.▷김재열> 전체가 다 잘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관용> 당연한 이야기지요. 참 잊고 싶은데 자꾸 못 잊게 한다, 몇몇 사람들이, 그 이야기신데...▷김재열> 예, 그렇습니다, 솔직히.
▶정관용> 박근혜 후보가 혹시 유족들이 허락한다면 만나겠다, 이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만나실 생각이 있으세요?▷김재열> 제가 직접 당사자는 아니지만...
▶정관용> 아, 물론.▷김재열> 사과를 하려면 어떤 진실함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사람의 얼굴을 보던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속을 알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정말 진정한 사과라면 진정성이 있어야 되는데, 지금의 박근혜 후보는 어떻게 보면 마치 여왕이 백성들에게 시혜를 베풀 듯이 그런 어떤 자세나 모습이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관용> 진실함이 느껴져야 만나더라도 만나겠다?▷김재열> 예, 그리고 사실은 인혁당 사건의 그 발단은 유신헌법이 만들어준 겁니다.
▶정관용> 물론이지요.▷김재열> 그래서 유신체제는 영구집권을 위한 잘못된, 우리 아버지, 그 당시 대통령의 판단, 잘못된 판단이었다, 라고 사죄를 하고, 정말 그 당시에 멀쩡한 지식인, 중산층 시민들을 사형시킨 죄를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진심을 보일 때, 제 생각에는요, 이제 저희 작은 어머님도 내일 모레 팔순입니다.
▶정관용> 그렇지요.▷김재열> 이 팔순을 바라보는 여덟 분의 어머님들이 그렇게 형식적으로 또... 뭐 위로한다? 누구를 위로한다는 말입니까, 지금? 누구를 위로한다는 겁니까, 지금? 그러니까 진정한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그것까지는 제가 뭐 면담을 할지 안할지 그건 제가 당사자가 아니니까 또 모르겠지만, 박 후보가 진짜 지도자가 되려면은요, 자기 부친의 망령에서 깨어나고 그 겉옷을 벗어야 됩니다. 제가 볼 때는 아직도 박정희의 어록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 같아요.
▶정관용> 어제 내놓은 발언이 수차례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딸로서 죄송스럽다고 이야기를 해왔고,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오히려 더욱더 민주화에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었다, 이런 것이 사과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느냐. 사과는 사과로 받아들여달라, 라는 발언이 있었습니다.▷김재열> 그러니까 그것부터 틀린 말 아닙니까. 마치 일본 왕이 말이지, 무슨 금석의 어쩌고 하는 그런 말처럼, 일본 천황이. 그러니까 당사자에게 직접적인 사과, 직접적인 사죄를 해야지, 무슨 뭐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정관용> 그렇지요. 당사자에게 직접적 사과, 그리고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하다?▷김재열> 예.
▶정관용> 작은 어머님 곧 팔순이시라는데 건강하세요?▷김재열> 뭐 그나마 다행스럽게 신앙도 있으시고 또 아들딸들이 이제 잘 챙겨주고 있지요. 며느리, 사위가 다 잘 챙겨주고 있어서...
▶정관용> 그래요.▷김재열> 그나마 다행이신데...
▶정관용> 정말 다행이네요.▷김재열> 몸은 굉장히 허약하십니다. 안타까울 정도로.
▶정관용> 아이고. 조카이신 김 목사님도 같이 그 아들딸들하고 팔순잔치 좀 크게 잘 해주세요.▷김재열> 예, 우리 정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관용> 고맙습니다.▷김재열> 예.
▶정관용> 부산에서 목회하고 계신 김재열 목사, 특히나 또 저희 방송국에 직접 연락까지 주셔서 두 배로 감사드리겠습니다. 2부 마무리 짓겠습니다. 잠깐 뉴스 듣고 35분에 다시 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