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마치 죄인처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리고 되뇌었다.
"미안합니다." "고마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2009년 5월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노제 풍경이다.
서거 뒤 일주일간 전국에서 추모객 400만 명이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인 봉화마을을 찾았다.
올해도 대한민국은 그를 추모하는 열기로 가득하다.
우리는 왜 아직도 인간 노무현에게 미안해 하고, 그를 그리워하나.
노 전 대통령 서거 3주기를 맞아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평전 작가 김삼웅 씨가 '노무현 평전'을 냈다.
지은이가 평전을 쓴 것은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다.
노무현 평전은 노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그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 이상을 찾는 데 주력한다.
그래서 정치인 대통령 정치학자 사상가로서의 노무현에 앞서 '인간 노무현'을 먼저 짚는다.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빈농의 막내로 태어난 노 전 대통령. 그는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가난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때문에 성적은 우수했지만 종종 선생님을 찾는, 꽤 잘 사는 부모를 둔 아이들과는 패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평전은 '노무현이 뒷날 비판적인 법조인, 거리의 변호사, 반독재 정치인이 된 것은 어릴 적의 불평등과 차별,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심에서 비롯되었지 싶다'고 전한다.
1966년 2월 부산상고를 졸업한 그는 막노동판을 떠돌며 사법고시의 꿈을 키운다.
그는 공사판에서 일하면서 쉬는 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흥에 겨우면 곱사춤을 추었다.
뒷날 국회의원이 돼서도 술자리 흥을 돋우고자 그 춤을 추곤 했다.
왜 하필 곱사춤일까. 탈춤인 곱사춤이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정신,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평전은 이렇게 전한다.
'곱사등이(민중)의 비애와 한을 잊지 않고자 하는 그만의 다짐이요, 그 한을 풀어주고자 하는 살풀이였을까. (중략) 그 역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곱사등이와 동병상련인 비주류, 변방이었다.'
1975년 사법고시 합격 이후 인권 변호사로 활약하던 노 전 대통령이 1988년 총선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2002년 대통령이 되기까지. 평전은 그의 삶의 궤적이 특별히 진보적이거나 개혁적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단지 그동안 짓밟혀 온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과 공화제의 본 뜻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가 생전에 남긴 말에서도 '노무현의 꿈'을 엿볼 수 있다.
"사람사는 세상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도, 소외된 사람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누구나 당당하게 인간적 존엄을 누릴 수 있는 세상, 공동체 안에서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 배려하고 연대하고 잘못된 제도를 개선하는 일들에 참여하는 세상"이라던 그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