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당 매출 하락은 컵밥 탓? '컵밥 판매 금지'
10년 넘게 노량진 고시학원 앞에서 노점을 꾸려오던 박 씨(52). 떼돈을 번 건 아니지만 큰 아들 대학도 보내고 근근히 생활을 버텨올 수 데에는 컵밥의 공이 컸다.
컵밥 가격은 2000원에서 2500원. 시간과 돈에 쪼들리는 노량진 고시생들에게는 10분이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컵밥이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던 박 씨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매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던 '컵밥'을 한 달 전부터는 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세금도 내지 않는 노점에게 손님을 뺏긴다고 생각한 인근 식당 주인들은 '노점상 컵밥 판매 금지'를 동작구청에 요청했다. 이에 구청은 떡볶이 등 분식은 되지만 '식사류는 판매금지'라는 안을 내놨고 지난달부터 일제히 '컵밥 단속'에 들어갔다.
김 씨는 단속을 피해 컵밥 대신 주먹밥을 내놨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김 씨는 "밥을 팔면 구청 단속반이 그릇이나 집게 등을 수거해간다"며, "더 이상 얼굴 붉히기도 싫어 오전에만 장사를 한다"고 말했다.
김 씨 노점과 얼마 안 떨어진 한 음식점 주인은 "우리는 비싼 세금에 종업원 인건비도 줘야한다"며 "다들 노점만 힘든 줄 아는데 식당이야말로 남는 게 없다"며 언성을 높였다.
◈ 노점은 NO! 대기업은 OK?
산 넘어 산이라더니 노점과 식당 주인들 더욱 힘겨운 상황을 맞게 됐다. 지난달 초부터 GS25 편의점에서1950원짜리 컵밥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
김 씨는 "재벌빵집이 난리더니 이젠 재벌컵밥까지 나타났다"면서 "우리는 중소상인도 아니고 생계형 노점"이라며 앞날에 대한 막막함에 한 숨을 연신 내쉰다.
식당들도 마찬가지다. 노점을 막았더니 자신들보다 위에 존재하는 대기업에서 같은 제품을 출시하면서 노량진 노점에 취한 '컵밥 금지령'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GS25 관계자는 "사업 성격상 소비자들의 다양한 입맛과 편의를 채워줄 의무가 있다"며 "대학가 주변에 컵밥이 인기가 많은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을 뿐 중소 상인들의 생계를 위협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현재 대학가 주변을 중심으로 프랜차이즈 '컵밥집'도 꾸준히 느는 추세다. 현대백화점도 식품 코너에 컵밥 상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바쁜 직장인들이나 용돈이 빠듯한 학생들이 서서 간편히 해결하는 길거리 노점의 대표 메뉴는 결국 대기업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셈이 됐다.
윤철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국장은 노점과 상인들의 갈등에 대해 "오랫동안 누적된 문제"라며 "노점을 양성화시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 국장은 이어 "값싸고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는 기업의 속성상 특정 상품만 갖고 지적하긴 힘들다"면서도 "그로 인해 골목상권이 침해된다면 재벌빵집 규제처럼 사회적 합의 또한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