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6시간 주 30시간 일하는 회사…'가능해?'

보리출판사의 파격적인 실험, 3월부터 '6시간 노동제' 시행

지난달 18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에 따르면, 지난 2010년 대한민국의 1인당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193시간으로, 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했다.

한국에 이어 그리스와 칠레가 2,000시간을 넘었다. OECD 평균 노동시간은 1,749시간으로, 우리나라보다 400시간 이상 적다.

이처럼 '오래, 많이' 일하는 게 당연한 미덕인 대한민국에서, 30여 명 규모의 한 작은 회사가 그 '당연함'을 거스르고 '우리는 3월부터 하루 6시간, 주 30시간만 일하겠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 한 출판사의 파격적인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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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보리출판사(윤구병 대표) 홈페이지에 '6시간 노동제 안내'라는 글이 올라왔다.

내용은 "하루 6시간, 주 30시간 노동을 기본 노동시간으로 주5일 근무한다"는 것. 한 달에 18시간 내로 연장 근로를 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노사가 합의했을 때만 한다.


근무 시간이 줄었다고 해서 임금을 삭감한 것도 아니다.

쉬지 않고 일해도 살기 힘든 무한 경쟁 시대에 보리출판사는 어떤 까닭으로 '6시간 노동'이라는 결정을 내렸을까. 보리출판사가 올린 글을 살펴 보자.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노동이 인간의 의식주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꼭 필요한 노동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도리어 인간의 삶에는 도움이 안 되지만 돈벌이에는 도움이 되는 반 생태적인 유해 노동 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

그 결과로 인간다운 삶의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기대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연과 생명계 전체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서도 불필요한 노동은 하지 않는 게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는 길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사회 변혁의 길에 선뜻 앞장서려는 사람이 없다. 노동자가 잔업, 철야까지 해서라도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처절한 생존 투쟁에 내몰린 셈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제 가족과 다른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는 것과 다름 아닌 상황이다."

이처럼 '6시간 노동제'라는 파격적인 선언에는 '무한 노동'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보리출판사가 먼저 시작하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 나무 한 그루 베어 낼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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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더불어 사는 더 나은 세상이라는 정신은 보리출판사 창립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보리출판사 홈페이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문구는 '나무 한 그루 베어 낼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자',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수익이 나면 다시 책과 교육에 되돌리자'이다.

자기들의 책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면 출판하는 의미가 없다는 다짐인 셈이다.

1988년 아이들 그림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보리 기획'으로 출발한 보리출판사는 지금까지 아기들을 위한 그림책부터 어린이, 청소년, 어른을 위한 책들을 펴냈다.

책에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생명을 존중하고, 세상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이웃과 더불어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 속에서 행복하게 살 길을 일러 주자는 철학을 담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출간된 책이 '올챙이 그림책', '보리 어린이 도감 시리즈', '보리 국어사전' 등이다. 특히 아동 서적과 관련해서 보리출판사 책은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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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서적뿐 아니라 농민·노동운동 등과 관련한 서적을 펴내기도 했다. 헬렌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용산참사 사건을 다룬 <떠날 수 없는 사람들>, 전통 민간요법으로 가난한 이들도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한 <약 안 쓰고 병 고치기> 등을 출간했는데, 한눈에 봐도 잘 안 팔릴 것 같은 이 책을 보고 있노라면, 보리출판사가 출판사의 사사로운 이익이 아닌 공동의 이익을 위한 길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철저한 준비와 토론의 결과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는 열린 생각을 가진 한 대표자의 결정이 아니다. 지난해 5월부터 직원 모두가 '6시간 노동제'를 두고 공부하고 조별로 토론하는 과정을 거쳤다.

6시간 노동제를 50여 년 동안 시행했던 미국 켈로그의 이야기를 다룬 <8시간 VS 6시간-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를 교재로 삼고 전 직원이 공부했다.

조별 토론 후 12월에는 전 직원 토론회가 열렸고, 올해 1월에는 관리·기획·디자인·편집 부서가 고루 참여한 TFT를 구성했다. 이후 사측과 노조의 협의 결과 '6시간 노동제'가 시행된 것이다. 경영자의 열린 생각과 내부 구성원의 역량이 합쳐진 결과물인 셈이다.

이제 보리출판사는 6시간 노동제가 확립되기 전까지 1개월간 예비시행 기간과, 6개월간 평가 기간을 두어서 이 제도가 정착되기까지 수정, 보완하는 과정을 계속 거칠 예정이다. '다함께 살기 위해 내린 결정, 6시간 노동제'를 반드시 정착시켜 한국사회에 좋은 선례를 만들 생각이다.

그리고 이 제도가 다른 노동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오는 일방적인 자랑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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