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기업 커피점에 밀려난 30년의 추억… 리치몬드 홍대점

30년만에 홍대점 폐점 "제과인들의 꿈의 궁전 못지켜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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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리치몬드입니다. 죄송하지만 홍대점은 오늘까지만 영업합니다."

31일 낮 3시쯤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앞 리치몬드 제과점. 이곳에서 쌓아온 추억과 이별하고 싶지 않아 찾아온 손님들 때문에 매우 북적이고 있었다.

손님들은 제과명장(名匠)의 손을 통해 탄생한 케이크와 쿠키의 달콤한 향에 취해 무엇을 사갈지 즐거운 고민을 하는 모습이었다.

리치몬드 제과점이 이 곳 마포구 서교동에 문을 연지 벌써 30년. 하지만 가게 주인 권상범, 김종수 부부는 1월 31일 부로 홍대점을 폐점한다.

100년이고 200년이고 계속 리치몬드를 운영할 생각으로 가게를 가꿔왔다는 김종수 사장은 가게 한켠에 앉아 조용히 리치몬드 홍대점의 마지막 모습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며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예우이며 저 나름의 고별식"이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2011년 4월 건물주는 리치몬드 과자점에 롯데그룹 계열사와 계약해 재계약의 여지가 없으니 계약 만료일이 되면 가게를 비워달라고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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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몬드 과자점은 5년 전에도 한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에 밀려 홍대 앞을 떠날 위기에 처하자 보증금 100%, 임대료 115%를 올려주면서까지 자리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요구에 결국 '폐점결정문'을 가게 앞에 붙일 수 밖에 없었다.

"정성껏 만들어 손님 앞에 내놓는 수많은 기술인들의 자존심이 짓밟힌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화가 났죠. 제과인들의 꿈의 궁전을 지키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리치몬드 홍대점이 사라지는 것은 고객들에게도 아쉬운 일이다. 영업 마지막날인 31일, 이곳에는 평소 손님 수의 3~4배나 되는 손님들이 찾아 마지막을 추억했다.

이날 오픈 때부터 리치몬드 제과점을 찾아 어느새 '30년 단골'이 된 50대 여성은 김 사장을 끌어안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취업한 조카에게 줄 선물을 사기위해 들렀다는 여미경(52)씨는 "너무 대기업에서 작은 것까지 차지해가니 오래된 것들이 없어지고 있다"면서 "홍대나 신촌의 향수가 없어지는 것 같아 나이먹은 사람으로서 섭섭하다"고 말했다.

아내와 딸의 성화로 리치몬드를 찾았다는 김낙찬(51)씨는 "없어진다길래 여기도 커피집이 되겠지 했는데 진짜 그렇다더라"면서 "대형 커피숍에 대항할 수 있는 뭔가가 들어선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어려서부터 리치몬드 제과점을 이용했다는 김성은(27)씨도 "아쉬운 마음에 멀리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프랜차이즈 제과점은 '특별함'이 없는데 반해, 이런 곳에서는 사람이 정성들여 빵을 만들었다는 느낌이 든다"며 애잔한 눈빛으로 가게를 한번 둘러보기도 했다.

가게 주인 권상범 명장은 "모든 사람들이 내 빵을 먹고 더 건강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빵을 만들어왔다"며 "자유경제 체제란 것은 알지만 대기업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고 씁쓸한 마음을 전했다.

그는 또,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공존하는 홍대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산에는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어울려서 사는 아름다운 산이 된다"고 덧붙였다.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많은 눈에도 불구하고 리치몬드 과자점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리치몬드 제과점 사장 권상범 김종수 부부는 '폐점'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각오를 밝혔다.

"처음에는 끝인 줄 알았는데 많은 분들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앞으로도 우리가 꼭 해야하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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