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성의 인물한국사]을사년스런 하늘-이완용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주말 저녁에 보내드리는 시사자키에서는 굴곡 많았던 우리 현대사 속에서 명멸해 갔던 인물들을 복원해 내는 시간입니다. 서해성의 인물 한국사, 오늘은 일제 당시 대표적 친일파로 알려진 이완용의 궤적을 추적해 봅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오늘은 왜 이완용을 선택했나?


◑ 서해성>
을씨년스럽다는 말뜻을 아는가.
이 말은 을사년스럽다가 원말이다. 우리 민족들은 실질적으로 나라를 빼앗긴 을사년의 울분과 상처와 우울을 두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이러한 말이 나왔겠는가. 실로 아마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망하고 고구려가 마찬가지로 망한 뒤 1,200년 만에 처음 느낀 비참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한다. 하물며 세계 최강국 원(몽골)이 침략해왔을 때도 우리는 맞서 싸웠고 비록 치욕적인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통치체계를 완전히 내주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 끔찍한 참화를 당하기는 했지만 임진란에는 일본과 맞서 싸워 마침내 적들을 물리쳤다. 그런데 정확하게 1백년전 우리는 정부 차원에서 온전한 전투 한번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국토와 국민을 일본제국주의 메이지왕의 손에 내어주어야 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이완용이다. 을사늑탈이 있은 지 올해로 1백년이다. 인간으로서 이완용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것은 새로운 흥미를 줄 것이라 확신한다.


◎ 사회/정범구 박사>
흥미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 서해성>
이완용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일본에 나라를 갖다 바친 게 아니다. 그가 걸어온 삶의 괘적은 생각보다 치밀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좋은 문벌에서 장성했으며, 상당기간 동안 나름대로 애국심 비슷한 것을 가지고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그는 학문, 물론 유학에 밝았으며, 불교에도 심취했다.


얼핏 생활에서 배은망덕했을 듯한데 그는 적어도 지극한 효자-나라를 팔아먹은 자에게 효자라는 말을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으나-였으며, 우리 생각에 을사늑탈과 고종양위, 경술년 국치에 도장을 찍은 자이니 마땅히 황실-고종 순종-과 관계가 당연히 나빠야 할 듯한데, 죽을 때까지 아주 관계가 좋았다. 그의 처세는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아첨을 떠는 스타일은 결코 아니었다.


이완용은 결코 흥분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며, 말씨도 많지 않았고 술도 거의 한 잔 이상하지 않는, 호방함이나 자유분방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한없이 부도덕했으면 좋겠는데 실상 33살에 기생을 들였다가 죽자 이후 부인 조씨와 해로했으며, 관직에 있으면서 생각보다 돈 문제 따위로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또 젊은 시절에 인간 말종으로 성장한 결정적 흠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게 없다. 도리어 엘리트가 가야 할 지극히 정상적인 궤도를 달렸다. 요컨대 악마는 없다는 것이다. 악마가 태어날 때부터 알아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성적이어서일까 다만 두통과 현기증에 평생 시달렸다고 한다. 고민형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스스로 심심함을 모른다고 했다. 틈이 나면 글을 읽고 글씨를 썼다. 간단히 말해서 전형적인 조선선비라고 여기면 어떨까 싶다. 알려진 대로 그는 이른바 명필이었다. 덕수궁 경소전과 숙목문, 덕수궁 중화문의 살량문, 창덕궁 함원전, 고종 국장 때는 일대기를 기록한 행장과 시책문을 썼다.


이처럼 궁궐의 여러 전각을 비롯해서 독립문 편액, 하물며 일본왕도 이완용의 글씨를 요청할 정도였다. 언젠가 이문열이란 작가가 이완용이 명필이라고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여기에 이완용의 비밀, 또 예술이나 학문의 열쇠가 들어 있다고 여긴다. 잘라 말하지만 그는 명필이라고 볼 수 없다. 문자향 운운하는 따위의 형식미가 빼어나다고 해서 예술이 완성되는 게 결코 아니다. 이완용의 함정은 여기 있었다.


어떤 재능 있는 사람들이, 어떤 지식인들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자기 합리화를 통해 적절히 정당화하면서 변절하고 타락해 가는지를 이완용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이를 데 없는 매국친일파였음에도 일본 옷조차도 즐겨 입지 않았다. 경술년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뒤에도 대개는 집안에서 한복을 입었으며, 외출할 때는 양복을 차려입은 것으로 전한다. 또 경술 병탄-그의 입장에서는 일한합방-전까지는 실질적으로 일본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다만 미국에 공사원으로 나갈 때 잠시 경유했을 따름이다. 일본어도 거의 하질 못했다. 도리어 영어는 조금 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이완용에게 조선인으로서 무엇인가를 지켜내고 있다는 믿음을 준 중요한 근거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배신을 위로하는 요소로 최소한 작동했으리라는 것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 이완용의 삶을 추적해 가보자. 먼저 이완용은 어디서 태어났나. 성장기에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 서해성>
1858년(철종9) 6월 7일 경기도 광주 낙생 백현리 우봉 이씨의 빈한한 선비 이호석의 장남으로 출생해 10살이 되던 해 1867년 집안의 먼 친척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간다. 향촌에서 대처인 안국동으로 나온 것이다.


이호준에게는 기생에게서 얻은 4살 위의 서자 윤용이 있었다. 완용과 윤용은 평생을 거의 갈등 없이 지낼 뿐 아니라 함께 동행하게 된다. 윤용은 나중에 아우이나 적자인 완용의 임종까지 지킨다.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양아버지인 이호준의 부인은 여흥 민씨로 대원군의 부인과 같다. 고종의 비(妃) 또한 마찬가지로 민씨, 곧 민중전이다. 이호준은 대원군과는 친구이자 사돈이었다. 피차 서자와 서녀를 혼인시킨 사이였던 것이다.


성장기에 보인 이완용의 태도는 조신하고 또 제어된 모습이다. 가령 양부모와 친아들 사이에서 설령 어떤 문제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해가 갈만한 데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저 애늙은이여서만은 아니었을 게다.


이완용은 양부모 집에서 이른바 냉정함과 동시에 사람들 사이의 역학의 이해, 곧 정치를 배운 듯하다. 이미 그의 삶 자체가 그걸 이해하지 않고는 존재키 어려운 구조였다. 동시에 향촌에서 올라온 촌뜨기로서 서울 적응이라는 게 상당한 정치적 긴장도를 요구했을 게다. 여기에 양반들이 지니고 있는 체통과 감정을 쉬 드러내지 않으면서 의사를 전달하고 자신을 관리하는 법을 체득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 효도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이완용이 그토록 조선적인 전통을 강조하는 듯한 삶을 산 것은 자신의 출신 배경에 대한 콤플렉스와 함께 적자여야 한다는 의식 같은 게 강박했으리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완용은 장단에서 우봉 이씨의 시조의 분묘를 찾아내 이를 다듬는 일까지 했다. 나중에 나라를 넘겨준 뒤 집이 백성들 손에 불타버리자 신주와 위패가 함께 불에 타버린 일을 일생에 가장 애석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두 아버지를 무리 없이 탈 없이 섬겼다. 그리고 두 나라 임금을 섬겼다. 두 임금도 아니고 두 나라 임금을 모두 감동시킨 신하였다. 믿기 어렵게도 나라를 빼앗긴 뒤에도 조선의 두 황제는 이완용을 신하로서 가장 아꼈으며, 일본왕-천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나중에 받은 그 숱한 훈장들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구한말은 격동이 시대였다. 숱한 정치인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내쫓겼다. 그런데 이완용은 관직에 나아간 뒤 자심한 홀대나 귀양 따위는 단 한번 없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왕실의 부마인 박영효조차 결코 그러하질 못했다.


양부 이호준의 배려로 좋은 스승들을 각지에서 모셔다 공부한 이완용은 1882년(25세)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한다. 증광별시란 나라의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치르는 과거다. 당시는 임오군란이 평정되고 민중전이 장호원에서 환궁한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어쩌며 과거의 성격부터가 이완용과 잘 맞아떨어진다고나 할까. 조정백관은 5년 이상 급료가 밀리고 구식군졸들은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 격분해서 일어난 게 임오군란이었다. 민중전의 척족들이 백성을 내다버리고 청군은 등에 입고 시아버지를 납치해가도록 애걸하고 권력을 쥐게 된 그 임오군란이 이완용에게는 기회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인정전에서 시험에 응시한 사람들을 알현하고 이완용의 집에는 악사까지 보내주어 축하해주었다. 이는 고종의 등극에 이완용의 양부가 한 역할과 무관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조카 김명수가 정리한 ''''一堂記事''''에서 ''''무릇 천도에 춘하추동이 있어 이를 變易이라 하며, 인사에 동서남북이 있어 이 또한 변역이라 한다. 천도와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이는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고 했다.


이 말은 어렵게 들리지 모르지만 간단한 내용이다. 대세에 순응하라, 그리고 큰 힘을 따르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지난 20세기 내내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 또는 출세한 사람들에게 이는 ''''지도이념''''이었다.


◎ 사회/정범구 박사>
나중에 나라를 일본에 갖다 바칠 때는 총리대신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어떤 일을 했나.


◑ 서해성>
과거에 합격한지 4년 만에 규장각 대교(정7품-정9품)로 관직에 들어섰다. 곧바로 중앙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두 달도 안되어 홍문관 수찬(정6품), 1년 뒤 1887년 홍문관 응교(정4품)이 되었다. 육영공원-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뒤 미국의 지원으로 만든 어학교육기관으로 옛 대법원 자리에 있었음-에 입학해 개화에 적극적 관심을 보이고 또 서양문물을 익혔다. 그 무렵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시강원 겸사서가 노릇도 했다. 세자가 소학 제2권을 마치는 날 고종으로부터 어린 말 한 필을 하사 받는다. 이후에도 그는 어린 말 두 필을 더 받는다. 이는 두 황제에게 총애를 받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 과정에 그는 몇 번의 상소를 하는데 이는 김옥균 지석영 등 일파에 대해 징치하라는 것이었다. 개화에 반대했다기보다 임금과 권력을 향한 무한충성의 대열에 적극 참여했던 것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완용이 친러파 또는 친미파라고 하던데 육영공원에서 공부한 일과 관계가 있는가.


◑ 서해성>
물론이다. 그가 육영공원에 공부한 일은 중요하다. 관리들이 공부하는 좌원 14명, 양반자재들로 구성된 우원 21명이었다. 순 영어교육이었다. 종교(기독교)는 강의할 수 없었다. 여기서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이완용은 초대 미국주재조선공사관 참찬관으로 임명받게 된다. 참찬관은 전권공사 다음 서열이다. 공사관에서 함께 일했던 알렌과의 오랜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지원으로 30대에 학부대신도 되며, 알렌을 통해 경인철도와 운산광산 채굴권 등을 팔아넘기는 것도 다 이때 맺은 관계에서 출발하고 있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정동파, 손탁호텔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그룹의 좌장이 되는 것도 육영공원에서 배운 덕분이었다. 그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미국을 꼽았다. 당시 서재필이 미국에서 망명 중이었으므로 권력을 쥔 자로 아마도 친미파 원조가 이완용이 아닐까 싶다. 아관파천의 주도세력 또한 이들이었다. 그가 독립협회 활동의 주요멤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완용은 두 번에 걸쳐 미국에 건너가게 된다. 둘 다 공직으로 간 것이었다. 우리나라 첫 번째 미국 공사관원은 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번역관 이채연 서기관 이하영(참군인이라는 이종찬의 부친/그는 일본인 상점 점원 출신으로 나가사키로 오가는 배에서 한낱 의료 선교사에 지나지 않았던 알렌을 만나 출세와 매국의 길로 내달렸다.), 이상재(박정양의 식객) 등 10명이었다. 이들이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 신임장 제정했을 때의 일화 등은 유명하다.


1888년 몸이 아파 귀국한 뒤 정3품 통정대부로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되었다. 당상관이 된 것이다. 이어 전보국 회판이자 이조참의 겸직, 사흘 뒤 교섭통상사무 참의를 하고 이윽고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로 2년 동안 근무했으나 대개의 미국파들이 그런 것처럼 개신교 등으로 개종하지 않는다. 동도서기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이또의 동양평화론에 동조하는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또도 영국유학생이 아닌가. 1890년 귀국해서 승정원 우부승지, 며칠 뒤 내무참의, 승정권 좌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이듬해 종2품 가선대부로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검교사서, 교환서 총판, 이조참판, 육영공원 책임자인 변리사무, 한성부 좌윤, 공조참판 등 요직을 역임한다. 고작 34살이었다.


1893년 8월 생모가 사망해서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다.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동학혁명이 일어난다. 이완용은 동학혁명과 그 여파로 인해 벌어진 숱한 권력투쟁에서 벗어나 있다가 도리어 진급하게 된다. 이어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승리해서 청나라를 압박하는데 3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포기하게 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현저히 약화된다. 이를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 정동파 그룹이었다. 미국 러시아 영국 등 공사관이 밀집한 곳이 정동이며, 그 회합의 거점이 손탁호텔이었다. 미국공사 실, 서기관 알렌,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이었다. 친러파 이범진(미남에 춤을 잘 춰 민중전의 눈에 들었음. 민중전에게는 점쟁이 신령군이 소개했음. 이위종의 부친) 민영환, 친미파 서재필, 서광범, 이완용 등이 조선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정동파를 영어파, 왕비파라고도 부른다. 민중전을 중심으로 왕실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민중전이 시해(을미사변/명성황후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추존된 것이다.)되고 이윽고 아관파천이 일어난다. 왕이 자기 궁을 버리고 외세의 품으로 도망한 것이다. 5.16때 장면(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이나 12.12때 노재현(미8군 영내로 피신)의 도망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시해가 있었을 때 이완용 등 정동파들은 미국공사관 알렌의 방으로 몸을 숨긴다. 이때 이범진이 민중전에게 쫓겨났던 엄상궁과 짜고 설밑에 고종을 일반가마에 태워 아관으로 빼온다. 이로부터 조선은 러시아 천하가 되고 이완용(외부대신 겸 학부 농상공부 서리) 등이 완전히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김홍집 등은 맞아죽는다. 왕실과 국가의 안위는 사라지고 정권쟁탈극이 극에 달한 것이다. 이 시기에 이완용은 각료활동과 독립협회 일을 틀어쥐게 된다.


◎ 사회/정범구 박사>
독립협회 주요멤버였단 말인가.


◑서해성>
우리 역사는 불행히도 지나치게 ''''애국적''''이어서 이완용을 독립협회의 주요 활동가로 기록하거나 묘사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적어도 사실과 다르다. 기록을 빼버리기보다는 이완용이 왜 나라를 팔아먹는 데까지 이윽고 이르렀는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른 까닭이 있었겠지만 1896년 독립협회 발기인 명단에 서재필은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독립협회 자체가 이완용이 대신으로 있던 외부건물에서 발기했다. 이상재 민상호 이채연 남궁억 등 14인이었다. 독립협회 보조금도 이완용이 가장 많이 냈다. 당일 전체 모금액이 510원인데 이완용 이윤용 형제가 100원씩을 냈던 것이다. 쌀값에 기준해서 계산하면 오늘날 2백만 원이 넘는 돈이라 한다. 이들은 거의가 정동파였고 이완용은 위원장이었다. 창립총회에서 이완용은 연설을 했는데, 폴란드처럼 남의 종이 되지 않으려면 뭉쳐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미국을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역설했다. 아직까지는 철저한 외세의존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믿기 어렵게도 이런 일도 있었다. 아관파천을 끝내고 왕이 환궁한 뒤에도 러시아가 왕을 보위하자 일본이 모스크바 의정서에 입각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이완용은 조선정부는 이 협상에 간여한 바 없다, 따라서 이는 조선의 자주권과는 무관하다는 회답을 보낸 일이 있다. 그 뒤 러시아가 본색을 드러내면서 조선 장악의 일환으로 군사교관 등을 파견하겠다고 했을 때 이완용은 외부대신직을 걸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학부대신으로 밀려났다.


그 무렵 독립협회 1회 토론회가 열렸다. 이 일로 이완용은 평남관찰사로 좌천되는데 이때 독립신문 논설에 그가 자주 등장한다. 독립신문은 그가 뛰어난 관리이며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대군주 폐하께 충성 있는 사람들은 다 섭섭히 여긴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립신문에 이완용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이완용을 뛰어난 대신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함께 친미 정동파였던 서재필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독립협회에 관한 한 그를 떼어놓고 말하기 어렵다. 그는 2대회장이기도 했다. 1898년 만민공동회도 이완용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자 그를 독립협회에서 떼어놓기 위해 전라북도 관찰사로 발령이 난다. 그 뒤 공금20만냥을 유용했다는 이유로 면직된다. 이에 이완용은 소송을 제기했으나 끝내 유용여부는 재판을 통해 밝혀지지 않았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완용이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 서해성>
믿고 싶지 않지만 이는 사실이다. 김홍집 내각이 물러난 뒤 박정양이 총리를 맡은 정권에서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입각한다. 관직 9년 만이었고, 38세였다. 윤치호가 협판이었다.


그는 황제의 칙령 145호로 소학교령을 공포한다. 심상과 3년, 고등과 2년(3년)으로 장동 정동 계동 묘동 등 4개 관립소학교가 개교한다. 이어 학부대신 명의로 학부령 1호 한성사범학교 규칙과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 규칙을 공포한다. 또 후쿠자와 유키치와 유학생 파견에 관한 계약을 체결해서 게이오 의숙에 학생을 보내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한론''''이라는 조선 침략의 이념적 배후였다. 이광수는 그를 실로 존경해 마지 않았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런 이완용이 언제부터 친일거두로 나서게 되었는가.


◑ 서해성>
이 무렵 부친이 사망해 다시 3년상을 치르고 관직에 오르니 러일전쟁이 끝나 있었다. 동학혁명(이로 말미암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소용돌이를 다 피한 것이다. 순전히 효도하느라(?). 1904년 궁내부 특진관을 거쳐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이완용의 친일은 본격화된다. 우리는 이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을사늑탈에 찬성한 한 것은 알려진 대로 유명한 것이다. 이완용은 생각과 달리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아 나라를 팔아넘기는 일에 나선 것이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오랜 동안 자신을 지배해온 가치체계가 이를 가능케 했다고 보는 게 옳다. 대세 순응론. 그의 외세 의존적 사고는 기본적으로 대세순응론이라고 볼 수 있다. 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각축 속에 미국이 태프트 가쓰라 밀약을 통해 조선지배를 손들어주는 정세 속에 이완용은 나머지 싸움은 부질없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늑탈은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에 이뤄졌다. 한 가지 언급해 둘 것은 그 최종책임은 어쨌든 고종에게 있으며, 조선(대한제국)의 군주 고종은 이에 대해 실질적으로 제대로 된 어떤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슬픈 일이다. 적어도 그에게 투쟁을 통해 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는 없었던 듯하다. 이미 대세이니 왕실의 명목이라도 지키면 다행이라고 여긴 듯하다. 그는 이또에게 다만 외교권의 형식만은 자신에게 남겨달라고 애걸하다가 권한을 박탈당했다. 정치권력은 일종의 사회적 신념체계여야 마땅한데 그들은 신념도, 제 나라를 빼앗아가는데 저항할 용기도 없었다. 이것은 소유권 문제로만 봐도 놀라운 일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런 이완용이 3.1 운동 당시 민족지도자에 낄 뻔했다는데.


◑ 서해성>
사실이다. 손병희가 3.1운동 민족대표자 중에 이완용을 넣기 위해 접촉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때 이완용은 세상이 나를 친일매국노라고 하는데 이제 와서 민족대표자가 되면 뭐라 하겠는가 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손병희는 이완용이 밀고할까봐 내심 걱정을 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완용은 그런 식으로 체통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문제는 손병희나 당시 민족대표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 대중의 역량을 조직화하기보다는 단지 명망성에 의지해 일을 진행하려 했으며, 명망성도 그렇지 이완용을 설득하려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의 정치사회적 인식과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지 안타깝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가 실력양성론의 원조라고 하는데.


◑ 서해성>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완용은 3번에 걸쳐 담화형식을 글을 발표한다. 물론 지원하는 글이 아니라 자제하라는 것이며 협박이었다. 그 가운데 3번째 글이 지방자치 참정권, 집회와 언론문제 등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지식 정도에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한다면 동정도 가히 얻을 수 있다고 하며 가장 급한 것은 실력 양성이라고 했다. 이것이 이광수 등의 실력양성론의 원조가 된 것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완용이 헌병보조원 제도를 도입했다고 하는 등 그밖에 이완용에 관한 이야기를 몇 가지만 더해 달라.


◑ 서해성>
정미7조약으로 그나마 몇 안 되는 군대가 의병으로 이어지자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모집해 토벌작전에 투입하면 된다는 발상을 내놓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뜻)를 제안한 것이다. 이는 아카시이의 기획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완용의 제안으로 나온 것이다.


이완용이 며느리와 사통했다는 말을 당시 삼척동자도 다 알았다는데 사실은 아닌 듯하다.


이완용이 이또의 죽음으로 크게 상심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다. 그는 배를 타고 대련만까지 가서 선상 조문을 했다. 일본거류민들의 분노 때문에 뭍에 상륙하지는 못했다. 이 중에는 유길준도 끼어 있었다. 서울에 돌아온 뒤 이완용은 3일간 가무 등을 금지했다.


합방제안은 일제가 아니라 이완용이 먼저 한 것이 사실이다. 비서 이인직(''''혈의 누''''를 쓴 작가. ''''혈의 누''''라는 말은 ''''피눈물''''이란 우리말을 일본식으로 쓴 것이다. 영화 소설 등에서 이런 식의 제목이 이때 등장한다. 전형적인 일본식 어법이다.)을 통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고마쓰는 이인직의 스승이었다.)에게 합방을 제안했다. 나중에 고마쓰는 ''''그물도 치기 전에 고기가 뛰어들었다''''고 이를 표현했다. 일진회나 송병준 등이 먼저 제안을 한 것을 반대했다가 이완용 자신이 공을 차지한 것이다. 형식상 합방은 대한제국 내각총책임자인 총리가 제안한 것이다.


그때 금산군수 홍범식, 선비 이희철, 김석진 등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참고로 일본은 1945년 패전에 책임을 지고 군인 등 500여명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가해자임에도 뻔뻔스럽게 어떤 반성도 없는 자결을 택했고, 조선은 나라를 잃어버린 뒤 통치계급 중 고작 세 사람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최고 통치계급 중 누구도 죽음이나 저항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 시간에 소개한 적이 있지만 우당 이회영 선생의 투쟁은 더욱 거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완용은 지금의 명동성당 인근에서 이재명 의사의 칼을 맞은 까닭에 폐 기흉과 해소, 폐렴 등이 생겨 나중에 사망했다. 조선에 사람 있다는 표시라고나 할까 한 가닥 위안이 되는 대목이다. 일본왕은 이완용에게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추서했다. 장례행렬의 맨 앞에 서는 명정은 총독부중추원부의장정2위대훈휘후작이공지구였다. 조선 왕실에서 맡은 직위는 총리에 이르렀음에도 총독부 허수아비 기관인 중추원 부의장 벼슬을 저승사자에게 알리는 만고에 길이 용서 받지 못할 추악한 장례식이었다.


그가 조선정부에서 받은 것은 훈1등이었으며, 훈장으로 이화대수장, 대훈금척대수장 등이 있다. 그 전에 일본으로부터 욱일동화장 등도 수여 받았다. 장례식은 고종 황제 국장 이래 최대였다고 한다. 저승 가는 길마저 ''''대일본국 천황폐하''''를 위해 바쳤던 것이다.


후손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집안 손자뻘 되는 사람이 역사학자 이병도다. 79년 증손자 이석형이 묘를 파헤쳤다. 이때 명정이 온전했는데 원광대에 보관중인 것은 이병도가 빼내와 태워버렸다고 한다. 지금 서양식으로 지은 서울 옥인동 사무소가 이완용의 바깥채다. 후손 중에는 해방 뒤(62년) 일본으로 건너가 국적을 취득한 자도 있다. 홍익대 건축과를 나온 종손 이윤형이 92년 땅을 찾겠다고 소송을 해 되찾아갔다. 그는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지냈고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연맹 회장)와 가까웠다.


▶진행:정범구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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