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어지고 깨져도…" 범생이 여고생, 아줌마 촬영감독 꿈꾸다

[특별기획 '힘내라 청춘'] ② '대한민국에서 영화하는 여자 김주연입니다'

도전만으로도 칭찬받고, 실패하더라도 박수 받아야 하는 청춘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차갑기만 하다.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너도나도 스펙에 목매며, 바늘구멍 같은 경쟁률을 뚫기 위해 현실의 높은 벽과 싸우며 좌절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 하지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는 청춘들이 있다. 경남CBS는 그런 청춘들을 만나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행복과 삶의 가치에 대해 들어본다. [편집자 주]

우리나라에서 상업영화를 찍은 여자 촬영감독은 딱 두 명이다. 영화가 좋고 영상을 찍는게 좋아 촬영부에 들어가지만 체력과 힘이 많이 딸린다는 이유로 많은 제약을 받는다. 평균 12시간 촬영에 밤샘은 기본. 한여름에는 뙤약볕에서 피부를 그을리고 겨울에는 뼛속까지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싸운다. 꾸미는 것 대신 잠을 택하고, 20kg~ 40kg이 넘는 장비를 들고 뛰어야하는 금녀구역 ‘촬영팀’에서 일하기란 쉽지 않다.

◈ 스카이 꿈꾸던 공부벌레 "친구들과 찍은 캠코드가 인생의 전환점"

대한민국 애엄마 촬영감독을 꿈꾸는 김주연씨
김주연(27)씨는 학창시절 공부밖에 몰랐다.

손 꼽힐 만큼 학교성적이 좋았고, 맏딸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IMF 당시 집안이 어려웠지만, 부모님께서는 무리를 해서 외고에 보낼 정도로 딸에 대한 꿈이 컸다. 아버지는 법조계를 가길 원했고, 어머니도 집안이 대부분 한의사라 한의사가 되길 바랬다.

김 씨 역시 대학은 간판을 보고 가는 곳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스카이는 가야’ 창피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울리는 친구들도 공부를 잘했고, 자율학습이 끝나면 고급 승용차가 서서 아이들을 픽업할 정도로 어머니들의 교육열도 높았다. 그런 환경속에서 김 씨는 마치 대학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고3이 되기 전 결의를 다지기 위해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2학년 마지막 자율학습을 마치고, 친구들과 동해 추암 일출을 보러 가기 위해 막차를 탔어요. 결의를 다지기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는데, 친구가 가져온 핸디캠으로 일출도 찍고 풍경도 스케치하고 각자 인터뷰도 하면서 ‘나는 꿈이 뭐고 00대학 00과를 가겠다’는 식의 다짐을 했죠.”

그 때. 생전 처음 잡아 본 카메라로 촬영하며 그녀는 ‘카메라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의 카메라에 대해 그녀는 “마치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어릴적부터 그림그리기에 재능이 있고 관심을 가져왔던 그녀는 당시 촬영을 할 때 “굳이 연필이나 붓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작은 프레임 안에 담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순간, 그동안 당연하게만 받아들였던 대학진학의 목표가 이미 바뀌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영상을 배우겠다는 결심이 섰다. 각 대학의 영화, 영상 관련 학과들을 뒤지며 준비했다.

당연히 부모님의 반대가 컸다. 학교 선생님도 어의가 없어다는 반응이었다. 영화 영상 관련 학과 진학을 막기 위해 본인의사와 상관없이 어머니와 선생님이 상의해 수시원서를 넣었고, ‘언제 몇시에 면접보러 가라’는 통보를 하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재수 삼수를 해도 한의학과를 간다면 뒷바라지를 해주겠다. 하지만, 니가 원하는 곳에 간다면, 너에게 한 푼도 주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 씨는 자신의 꿈을 접지 않았고, 단국대 연극영화학과 수석으로 80~90%의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부모님께서는 4학년 졸업할 때까지 다시 수능을 보라고 하셨지만.

◈ 그토록 하고 싶었던 촬영…"여자라서 안돼! 여자니까 안돼!"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없다보니, 대학시절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학부 특성상 연극부와 영화부도 병행해야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할 수가 없었다. 방학에는 과외와 시급제 아르바이트를 끊임없이 했다.

그러나 돈보다, 사람들의 편견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학과에서 조차 당시에 제가 촬영을 하고 싶다고 하면 비웃었어요. 무슨 여자가 촬영을 하냐는 반응이었죠”

신입생 때 선배들이 출품이나 과제를 위해 촬영부원을 급히 구한다고 해서 달려갔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기도 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토록 촬영이 좋아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학했지만, 1년 내내 단 한편의 촬영작업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처음엔 촬영부가 아니면 다른 파트 일은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마음을 바꿔 먹었다.

주변에서는 '스무살 여자애가 까불까불 대고, 얼마나 할 수 있겠어?'라고 말했지만,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촬영장에 갈 수만 있다면, 제작팀이든 조명팀이든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하면 무조건 달려갔다. 악착같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선배들의 속옷을 빨기도 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그렇게 악착같이 촬영장을 뛰어다니며 1학년을 다 보낸 겨울. 그녀를 눈여겨 보던 선배의 대학원 졸업 작품에 촬영팀 막내로 참여하게 됐다.

“당시 16mm SR2 카메라를 접했을 때, 필름 들어가는 소리를 현장에서 듣는데 그 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지요.”

“파인더는 촬영감독만 볼 수 있었어요. 근데 처음으로 기회를 얻게 된거죠. 작은 프레임 안에 미세한 가이드라인이 있고, 파인더에 내 눈을 대고 귀로는 필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상상하던 일을 처음 겪게 됐어요.”

“뭔가 하고 싶은게 생기면 하고 봤어요. 일단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생각해보면 그 때가 지금의 저보다 열정이 열배정도는 됐던 것 같아요.”

촬영장 모습2
10번의 촬영. 한겨울 촬영이라, 허벅지까지 동상이 걸렸고, 잠도 못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지만 마냥 좋았다. 카메라를 만질 수 있고, 카메라 옆에 있고, 보고 만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2학년때도 촬영장에 갈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닥치지 않았고, 점차 촬영기회가 늘면서 촬영의 감도 익어갔다. 3학년이 되었을 때, 실습작품의 촬영감독이 됐다.

“한남대교에서 강을 바라보는 남녀배우 정면을 찍고 싶었다. 학생 때는 지미집이나 크레인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다리 밑에 사람 한 명 들어가는 공간에 매달려 찍었어요.”

당시에는 위험한지도 몰랐고, 무작정 찍고 싶었다.

4학년 2학기.첫 상업영화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40차례 현장 촬영팀에서 일했지만, 촬영 3회를 남기고 엎어졌다. 영화사가 없어진 것이다.

◈ "쇠독이 오르고 손이 헐고, 다 까져도 현장에 있는 자체가 좋아요"

촬영팀은 보통 촬영감독과 1st, 2nd, 3nd, 막내로 이루어진다.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촬영팀을 관리 운영하는 1st(포커스 풀러)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십여 년의 시간이 걸린다. 촬영 장비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2nd(클래퍼)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5~6년. 필름의 로딩과 엔딩 및 필름 관리를 담당하는 3nd(로더)가 되는 것도 녹녹치 않다.

김 씨는 잡일하는 막내로 3개 작품, 로더로 3 작품을 거쳐 최근 세컨드가 됐다. <우리동네>, <고고70>, <김씨 표류기>, <호우시절> 등 개봉한 영화와, 중간에 엎어지거나 아직 개봉하지 않은 작품을 포함해 7편에 이름을 올렸다. 메인팀이 아닌 촬영B팀까지 포함하면 15편 정도다.

영화판의 속성상 단계를 밟아가는데 있어 경력이나 조건이 딱히 정해진게 아니다. 한 명이 그만두면 자연스럽게 올라가기도 한다. 생활이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촬영장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어요. 보통 12시간은 기본이고 밤샘 촬영에 짧게는 3개월에서 5개월씩 촬영하는데, 막내 때 받은 돈이 300만원이었으니까요.”

계약금으로 50%, 영화 끝나면 50%를 받는다. 첫 영화는 개봉도 못하고 중간에 엎어졌으니, 5개월 동안 150만원, 한달에 30만원으로 살아야 했다.

2007년 두번째 작품과 2008년 세번째 작품도 막내로 300만원 받고 일했다. 중간중간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CF, 드라마 촬영도 도왔다.

<고고70>에서 만난 촬영감독과 팀을 이뤄 4년 넘게 일을 하게 되면서 사정은 나아졌고 로더로 승진도 했지만, 급여는 600만원~ 800만원으로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월급으로 따지면 100만원 남짓한 셈이다.

“사실 1년에 한 작품을 할 수도 있거든요. 저는 1년에 천만원을 벌려면, 8개월~9개월을 미친듯이 일을 해야 해요. 들고 뛰고 나르고, 뙤약볕 맞고, 추위에 떨어가며 잠 못자고 최악의 상황을 버텨내야해요.”


하루 종일 서있고, 보통 20~40kg 나가는 카메라와 트라이포드 등 무거운 장비를 들어야하기 때문에 허리와 어깨 목 무릎 성한 곳이 없다.

“손에 흉터도 많고 굳은 살 투성이에요. 로더 할 때는 필름을 돌려가며 매거진에 일일이 끼워야하고 또 촬영된 필름을 다시 보관통에 넣는 작업을 해야하는데, 로딩을 많이 한 날은 손끝이 아릴 정도로 따가워요.”

필름이 유독성 물질이라 피부에 닿으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촬영 장비로부터 쇠독이 오르기도 해 손이 거칠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고비도 있었다.

“지난 해 작품 들어가기 전에 교통사고가 났어요. 차는 폐차할 만큼 큰 사고였지만, 다행히 살아났지요. 치료하고 촬영에 들어갔는데 중간에 허리디스크가 와서 하차 했어요”

3개월간 쉬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동안 중학교 이후로 두 달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20살부터 누구보다 열심히 10년 동안 영화를 했는데, 남은 것은 목 허리 디스크랑, 병원 갈 돈도 안 되는 통장 잔고 뿐 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친구는 수천만원의 연봉을 받는 대기업이나 전문직에 일하고 있었다. 새 차를 사고, 명품 마사지를 받으며 선을 보며 살고 있었다.

촬영장 모습
“내가 친구처럼 1년에 5천만원을 받으면 어떤 기분일까? 뭘 할 수 있을까? 천 만원을 벌려고 미친듯이 뛰는데 대한 회의가 들었지요.”

촬영을 한 것을 후회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온 시간이 슬펐다. 하지만, 결국은 놓을 수가 없었다.

겨우 몸이 성해지고, 걸을만해지자 곧바로 촬영장으로 갔다. 촬영장 옥상으로 올라갔다.의상팀은 배우 의상 만져주고, 카메라팀은 앵글잡고, 연출팀은 슬레이트치고, 감독님 소리지르고 허허벌판에서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영화쟁이들이 마치 소인국 사람들처럼 사랑스럽고 신기해보였다.

“비록 아프고 힘들지만, 잠 못자고, 밥 못먹어도 뭘해도 아직은 좋으니까 그게 다에요. 전 촬영을 해봤잖아요. 큰 영화에서 느끼고 싶은거죠. 10분짜리를 찍어서 느꼈던 쾌감이 그렇게 큰데, 제 손으로 찍는 그 기분이 어떻겠어요. 이 좋은 것을 계속 하고 싶은 마음에 멈출 수 없는거죠.“

◈ "대한민국에서 오래오래 영화하는 여자 김주연"

사실 김 씨는 세컨이 못될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로더까지야. 힘이 부쳐서 세컨은 못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되면 좋고, 아니면 전문 로더가 되자”고 결심했었다.

우리나라 상업영화 여자촬영감독도 두명 뿐이다. ‘입봉’을 했지만, 여성 영화인들은 결혼을 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는 여자라는 이유로 더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대학 다닐 때 존경했던 여자선배가 있었는데, 결국 그 선배도 결혼을 하면서 그만 두는 것을 봤다.

“전 현장에 오래 남고 싶어요. 준비가 되고, 능력이 되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촬영감독이 되고 싶지만,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설사 안 되더라도 전 영화를 만드는 공간이 좋거든요. 오랫동안 일을 하고 싶어요.”

“우선은 저로 인해 사람들이 여자 촬영부, 여자 촬영감독도 괜찮구나. 조금만 의식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여자가 있어도 괜찮네라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고, 유학을 다녀오고 그런 스펙에 비하면, 저는 스펙은 없어요. 하지만, 남들보다 좀 더 부지런 한 것, 어딜 가도 이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나만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꺼 라고 자신해요. 그 속에 있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그 스펙은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스펙이라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던 것처럼, 그 현장을 그대로 영화에 담고 싶은 것이 김 씨의 목표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행복했으면 좋겠고, 보는 사람도 행복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영화를 하면서부터 연습하는 말이 있어요. 나중에 제가 상을 받게 되면 마이크 앞에 서서 ‘안녕하세요 대한민국에서 영화하는 여자 김주연입니다’라고 꼭 말하고 싶어요.‘

김 씨의 꿈은 ‘유부녀 촬영부’나 ‘애엄마 촬영부’다. 평생 영화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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