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관리를 맡았던 백화점 하청업체 직원들이 집단해고에 반발, 원직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에 나선 지 50일째 되는 이날, 대여섯 명의 근로자들이 작은 난로 하나에 의지해 몸을 녹이고 있다.
영하로 뚝 떨어진 추위 속에 노조원 한 명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에 신 김치를 얹어 훌훌 들이킨다. "지나가던 시민이 가져다 준 김치"라며 "따뜻한 음식이라도 사먹으라며 만 원짜리를 쥐어주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이 노조원은 말했다.
곳곳에서 '콜록콜록' 기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야외에서 농성을 이어온 탓이다. 지난달 말 용역경비원들이 들이닥쳐 농성 천막을 부순 뒤 노조원들은 바람막이 없는 농성을 펼쳐오고 있다.
김경식(54) 씨는 "다들 감기몸살에 걸려 몸이 성치 않다"며 "병원에 갈 형편은 못 되고 약사회에서 보내준 종합감기약 하나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손끝도 발갛게 얼어 있었다.
50일째 거리를 지켜온 현수막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거나 테이프로 글씨 일부가 가려져 있었다. 백화점 측이 낸 가처분 신청의 결과물이다. 법원은 지난 16일 "백화점과 시설 근로자들 사이에 직접적인 근로계약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백화점을 지칭하는 단어사용과 업무 방해 행위 등을 금지하도록 했다.
백화점 앞에서 진행해온 노숙농성도 접어야 했다. 24일 만의 일이다. 노숙농성이 한창일 때 대전에는 한파가 몰아쳤다. 눈도, 비도 내렸다. 수은주가 영하 12도까지 떨어질 때도 홑이불 위에 비닐을 겹겹이 깔아 추위를 버텨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집에 돌아가게 됐지만, 끝이 아닌 여전한 '진행형'이기에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박희식(38) 씨는 노숙농성 중에 생일을 맞았다. 가족들 얼굴만 보고 그는 다시 농성현장을 찾았다. "생일이 대수냐, 이기는 게 중요하지…"라고 말하지만 내년 이맘때는 거리가 아닌 따뜻한 집에서 생일을 맞고 싶은 것이 그의 심정이다.
김 모(30) 씨는 뒤늦게 거리로 나섰다. 그는 '2개월짜리' 촉탁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계약해지 이후에도 일을 했다. 하지만 그는 "해고된 다른 노동자들을 만날 수 없도록 감시와 통제가 심했다"고 뒤늦게 고백한다. 견디다 못한 그는 사흘 만에 회사를 나왔다.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모습에 후회는 없다"고 그는 말했다.
얼마 전 용역업체에서는 이들에게 다시 들어오라는 제안을 해왔다. 하지만 "노조간부 3명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결국 전부가 거리에 남았다. 최 모(37) 씨는 "(3명 빠지고) 우리만 들어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노조 탈퇴서를 내면 지금도 받아준다고 한다"며 "사실상 노조 해산하라는 얘기"라며 분을 참지 못했다.
24명의 노조원들은 이제 15명으로 줄었다. 노조를 탈퇴하고 다시 백화점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고, 일부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남은 이들에게도 '생존'은 문제다. 최 씨는 "당장 다음 달부터 생계가 걱정…"이라며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당분간 상황이 나아지긴 어려울 듯하다. 용역업체 관계자는 "노조를 탈퇴해야 받아준다는 말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전보조치 하는 등 배려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다"며 "신뢰가 깨져 후임업체로 고용승계를 해주기도 곤란하다"고 밝혔다.
백화점 측은 "가처분 신청 결과도 나왔으니 이제는 우리 손을 떠났고 용역업체에서 해결이 원만히 되길 바랄 뿐"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김 모(42) 씨는 "가족들이 와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한다"며 "우리가 바라는 건 노조를 인정해달라는 것과 다 같이 회사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 두 가지뿐인데 왜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오전 10시 30분. 백화점 개점시각을 알리는 음악이, 다른 한 구석에서는 노동가요가 동시에 같이 터져 나왔다. 이 시대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아이러니한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