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육, 해방 이후 가장 큰 위기"

조광 교수 "한국 강제병합이 올바른 표현"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0년 8월 27일 (금) 오후 7시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고려대 조광 교수
조광


▶정관용>네. 긴 대화 집중인터뷰, 오늘의 초대 손님 고려대학교 조광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교수님.

▷조광>네. 반갑습니다.

▶정관용>고려대학교 조광 교수님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는 날이 며칠 안 남았네요.

▷조광>예. 이달 말일에 정년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그게 유효합니다.

▶정관용>그래도 정년퇴임하시더라도 다 교수님이라고 부르잖아요.

▷조광>예. 그런데 이제 현직으로 듣는 얘기하고 전직으로 그 말을 듣는 거 하고는 또 다르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정관용>아직 그 느낌 어떤지는 모르시죠?

▷조광>이제 곧 느끼게 될 겁니다.

▶정관용>제가 오늘 시작하면서 ‘내일 모레 8월 29일이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청취자분들한테 물어봤어요. 그 날이 어떤 날인지 모르시는 분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조광>우리 역사에 대해서 최근에 너무나 관심들이 좀 약화가 되어 갑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인식도 점점 엷어져가고 그 식민지 시대의 계기가 된, 시작의 기점이 된 국치일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또한 관심이 멀어져가는 결과입니다.

▶정관용>올해가 딱 100년이 되는 해라 그나마 관심들을 갖고 이런 저런 행사도 좀 하고.

▷조광>네. 100년이면 우리가 이건 국치는 기념을 하는 게 아니라 기억을 해야 될 겁니다. 올바른 기억을 통해 가지고 앞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되는데 그걸 올바르게 기억하고자 하는 분들이 의외로 좀 적은 듯해요. 매우 아쉽습니다.

한국 강제병합이 올바른 표현

▶정관용>8월 29일을 국치일, 한국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날, 이렇게 불렀는데 정확하게 용어를 구사했습니까?

▷조광>지금 그 용어 자체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의견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국치일이라고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의견도 있고요. 과거 아마 정 선생님이 학교에서 배우실 땐 한일합방으로 배우셨을 겁니다. 이 합방이라는 용어 자체는 두 개의 국가가 대등한 조건으로 모였다는 걸로 그렇게 해석이 되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일진회 계통에서는 그 용어를 주장을 한 바 있죠. 그러나 그건 역사적 사실하고도 다르고 일제가 원하던 바도 아니었고 해서 그 용어는 이미 이제는 시효가 지난 겁니다. 그리고 한일병합이라고도 하는데, 한일병합이라고 한다 할 때 물론 병합이라는 대등한 조건의 병합이 돼야 합니다.

▶정관용>네. 합방이나 비슷하죠. 그냥.

▷조광>예. 비슷한 점이 있죠. 그렇지만 좀 더 합방보다는 약화된 개념입니다. 병합은. 그런데 우리가 일본의 침략을 당해서 식민지화된 게, 진정한 의미의 병합이라기보다는 식민지화였습니다.

▶정관용>강제침탈 아닙니까?

▷조광>강제침탈이었고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조선이 일본에 먹혀가는 걸 보고 있는 유럽의 여러 지식인들 경우에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 일본이 조선에 대해서 일본의 헌법을 시행을 할 때 조선의 전제적인 법체계나 질서보다는 일본의 근대적인 헌법이 적용이 될 거니까 월등히 더 낮지 않은가’ 라는 착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관용>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 이런.

▷조광>나중에 또 그쪽으로 갈 여지가 있는데 그러나 실제로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합병 하고 난 다음에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의 헌법을 적용시키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천왕의 특명으로 천왕이 파견한 무관에 의해서 지배되도록 했던 것이고 그리고 또 일본의 국적법을 보더라도 조선인과 일본인은 뚜렷하게 구별되는 법입니다.

▶정관용>그런 저런 것들을 볼 때 이건...

▷조광>진정한 의미의 합방이 아니고 병합이라고 볼 수도 없고 실제로 얘기를 하자면 식민지화인데 그러나 이걸 이제 좀 더 객관화시켜가지고 이 문제를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하고 같이 논의하는 마당에 내다볼 때는 같이 통할 수 있는 개념으로는 한국강제병합.

▶정관용>한국강제병합.

▷조광>한국강제병합이라는 용어가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이 됩니다.

▶정관용>예. 국치일이라는 건 또 맞는 말이고요.

▷조광>국치일도 맞는 말이죠.

▶정관용>한국강제병합이 옳은 표현이고.

▷조광>그러나 이제 좀 더 객관적이라고 할까요. 학문적인 용어로는 한국강제병합이라는 말이어야 될 겁니다.

▶정관용>청취자 분들께 고백하겠습니다. 조금 아까 제가 조광 교수님께 미리 좀 배우고 나서 조금 아까 한국강제병합이라고 표현을 했었습니다. 우리 거리의 시민들께서는 과연 이 날을 어떻게들 기억하고 계신지 잠깐 만나 뵀습니다. 이야기 잠깐 들어보고 계속 말씀 나누죠.

▶정관용> 우리 리포터가 그래도 뚜렷이 8월 29일이나 이런 것을 한일의 역사를 기억하고 하실 말씀이 있는 분들 얘기만 따로 편집한 거 같네요. 제가 보기엔.

▷조광>예. 맞습니다. 일반적으로 거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편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신 걸 듣고 보니 다 옳은 얘기입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들은 건 젊은 학생의 목소리입니다. ‘배울 건 배워야 되지 않느냐.’ 그런데 왜 안 가르쳐줬냐는 얘기겠죠. 지금 현재 학교 교육에서 우리의 역사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학생들이나 그리고 앞으로 몇 년 후가 된다면 더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지식이 너무나 부족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한국사 교육, 해방 이후 가장 큰 위기

▶정관용>우리 이번에 무슨 수능시험개편안 나오는 이런 걸 보면 점점 국사교육에 대한 게 계속 더 줄어들어 가는 거 같아요.

▷조광>네. 국사교육은 해방이후 지금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종전의 모든 기록을 검토를 해 봐도 국사는 적어도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과목으로 대우를 받아왔죠. 받을만한 것입니다. 왜냐면 중고등학교 과정에서는 인문교육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인문교육의 핵심은 역시 문·사·철입니다.

▶정관용>문·사·철의 사가 바로 역사죠.

▷조광>역사죠. 그 중에서도 우리의 역사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지금 현재 제9차 교육과정개정안에 의하면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한국사를 단 한 번도 듣지 않고도 졸업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놨습니다. 이건 국사에 대한 말살정책이요, 그리고 인문학에 대해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정책을 마련한 분들의 경우에는 앞으로 책임을 져야 될 겁니다.

▶정관용>지난 2006년에 우리 교수님께서 고대 문과대 학장이셨던 시절에 고대 교수님들, 문과대 교수님들과 함께 인문학 선언을 발표하셔서 이른바 우리 사회의 인문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셨던 일이 있는데 바로 그 문제의식이셨던 거죠?

▷조광>바로 그 문제의식입니다. 역사를 비롯한 인문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건 우리에게 물과 공기입니다. 물과 공기는 느끼지를 못하지만 만약에 그것 둘 중 하나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인간은 더 이상 살아가기가 어려운 것이겠죠. 인문학은 바로 그러한 부분이죠. 그런데도 인문학에 대한 대우 내지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자체가 엷어져 나갑니다. 이건 우리 교육의 커다란 병폐가 될 것입니다.

▶정관용>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보세요?

▷조광>이것 자체는 결국은 인문학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실용적인 기술, 실용이라고 하는 것을 더 존중하는 풍토 때문에 인간의 됨됨이 보다는 손끝에 나타나는 기술이라고 한 것만을 평가하는 분위기 때문에 그랬는데 결국은 손끝의 기술도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과학이나 기술이 윤리를 모를 때 그건 살인무기가 됩니다. 그 윤리를 가르쳐 주는 게 인문학이겠죠. 정치도 역사를 모르고는 안 되는 거겠죠. 경제도 역사 내지 인문학적 지식이 없다면 그건 착취구조의 상층부 역할을 할 겁니다. 그건 인문학적 지식을 가져야만 같이 공존 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올바로 깨달을 수가 있으니까.

▶정관용>거기서 뭐 한 걸음 더 나가서 정말 실용과 기술을 중시한다 치더라도 제대로 된 콘텐츠를 만들어내려면 인문학적 소양 없이는 못 만들더라.

▷조광>저도 완전히 동감입니다.

▶정관용>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은 구현시켜내는 것은 철학이요, 역사요, 문학이더라.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조광>네. 그리고 그 인문학 중에서도 역사가 또 중요하거든요. 역사는 자기의 기준을 정하는 겁니다. 자기의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죠. 내 자신의 역사를 알게 되면 그것에 견주어 다른 걸 알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이나 미국이나 우리의 역사에 견주어볼 때 비교를 통해 가지고 더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죠.

▶정관용>자신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역사다. 개개인의 기준일 뿐 아니라 국사 그러면 한국민의 기준을 세우는.

▷조광>바로 우리 문화의 기준도 되는 것이죠. 물론 이제 요즘에 와 가지고 민족문화만 따지면 그건 좀 시대에 뒤지는 듯 하다는 얘기를 합니다만 그래도 적어도 세계 속의 한국을 우리가 지향을 해 나간다 하더라도 무엇을 기준으로 해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결국은 우리가 기준이 되고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걸 파악을 할 때 제대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관용>그래서 퇴임 후 계획을 여쭤보는 다른 인터뷰에서 ‘역사 제자리 찾기 운동을 펼치겠다.’ 이런 말씀하셨던데...

▷조광>네. 그건 이제 제 꿈 중 하나입니다. 지금 현재 해방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걸 원래 역사가 찾아야 될 제 위치를 찾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역사를 좀 인정을 받도록 하고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학생들이 우리의 역사를 달달 외우는 암기과목이 아니라 스스로가 느끼고 재미있어하는 그러한 과목으로 자리를 잡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정관용>네. 꼭 좀 펼쳐 주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조광>감사합니다.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한국강제병합은 국제법적으로 불법이자 원천무효

▶정관용>먼저 역사 교육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을 했는데 다시 이제 한국강제병합 100년 맞아서 한일 관계 이야기로 옮겨가면 시작은 아무래도 지난 10일이었죠.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가 담화를 발표했고 ‘일부 진일보한 면이 있다. 그러나 강제성, 불법성에 대한 인정이 없어서 아쉽다’ 등등 평가들이 많이 나왔었는데 조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세요?

▷조광>간 나오토의 성명 자체는 물론 진보된 면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이제 하토야마가 1995년에 발표했던 성명에 준해서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는 얘기입니다만 그러나 이제 간 나오토 성명보다도 가장 기본적으로 일본 지식인이나 우리가 인식을 해야 될 건 1910년에 체결이 된 한국 병합조약, 이른바 한국병합조약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1905년에 을사조약이라든지.

▶정관용>을사늑약이라고 요즘 부르죠.

▷조광>네. 이것 자체가 원천무효여야 됩니다. 왜냐면 국제조약은 법적인 행위입니다. 법률로서 성립될 수 있는 여건을 다 갖추질 않았던 것이고 강압에 의해서 진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법의 합법성이라 하는 건 인정하기가 어렵거든요.

▶정관용>불법성 인정이 원천무효의 근거가 된다.

▷조광>그렇죠. 원천무효라고 할 때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그리고 식민지 지배가 범죄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범죄에 대한 식민책임을 오늘날도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다 갚아야 한다는 문제가 올바로 제시가 될 수가 있습니다.

▶정관용>책임추궁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조광>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 독립했으니까 독립 축하금 준다는 식이라든지 아니면 그냥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어떠한 시혜를 베푼다는 그러한 가식적 자세밖에 안 나올 겁니다. 하지만 그걸 하나의 범죄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파악을 하게 한다면 그건 이제 원천무효, 처음부터 ‘null and void’ 라고 하죠. 처음부터 무효였다는 걸로 되겠습니다.

▶정관용>우리 국민들은 한국강제병합의 불법성, 강제성, 원천무효라고 하는 것을 다들 인식하고 알고 계실 텐데.

▷조광>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국민 중에서도 또 일부는 ‘식민지지배 당했고 그게 하나의 역사적 사실인데 지금 불법이라고 얘기해서 뭐 하느냐’ 하는 분들 계시는데요.

▶정관용>굳이 그런 얘기를 무엇 하러 하느냐?

▷조광>네. 그러나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만약에 식민지 지배가 합법이라면 그분들은 범죄자입니다.

▶정관용>그렇게 되죠.

▷조광>그러나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회의를 하고 반대했던 많은 사람들을 존경하고 민족의 지도자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정관용>바로 이런 게 기준을 세우는 거로군요.

▷조광>바로 그 기준입니다.

언젠가는 일본도 불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

▶정관용>그런데 일본 측의 인식은 이번 간 나오토 총리 담화를 통해서 보더라도 일부 강제성 같은 걸 좀 인정하는 대목이 들어가죠. 그리고 사죄, 반성, 이런 건 많이 들어가는데 그래도 불법적이라고 하는 그 얘기는 절대 안 하려고 그러거든요.

▷조광>네. 여태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일본의 양심을 저는 믿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일본도 불법이라고 하는 걸 인정을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야지 일본도 해방이 됩니다. 일본도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것이고요.

▶정관용>교수님께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1기 활동도 하셨고 2기 때는 위원장도 맡으셨고.

▷조광>네. 1기 때는 제가 총간사를 했습니다. 총간사를 했는데 그때 이...

▶정관용>시작된 게 몇 년도였었죠?

▷조광>그게 2002년도 김대중 대통령과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이 같이 합의를 해 가지고 이게 시작이 됐던 것입니다. 그게 이제 1기로 출범을 했고 2기는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수상이 또 합의를 해 가지고 시작을 했습니다.

▶정관용>3년 1기 해 가지고 2기가 됐었죠?

▷조광>네. 보통 2년이 원칙이었는데 1년씩 연장이 돼 가지고 그렇게 된 겁니다.

▶정관용>그래서 2002년부터 사실은 거의 6년 동안을 쭉 거의 주도하셨던 셈인데 거기서 일본 학자들하고 계속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셨을 거 아니겠어요. 누구보다 최일선에서 일본 학자들의 의식수준이나 생각하는 방향을 느끼셨을 텐데 어떻든가요?

▷조광>일본 학자들도 어떻게 보자면 저하고도 동업자죠. 같은 역사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 동업자 중에 아주 훌륭한 분도 계십니다. 학문적인 입장에서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분도 계시고 또 제가 그걸 가장 바람직한 기준으로 본다면 그 기준에 한참 미달하는 분도 간혹 가다 보면 나타나곤 합니다.

▶정관용>설전도 펼치고 그러신 적이 있나요?

▷조광>네.

▶정관용>제일 대목이 심했던 대목이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습니까?

▷조광>예를 들자면 식민지 지배의 강제성 그리고 또 조약의 무효성, 이러한 문제가 나오게 되면 현실적으로 외교문제와 관련이 되기 때문에 아주 예민한 반응을 하시는 분들이 있었죠. 물론 침묵으로 거기에 대한 대답을 주신 분도 있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의견에 사석에서라도 동의를 표하신 분도 있었지만, 일본인 연구자 중에서도, 그러나 일부는 거기에 대해 일본 국민의 대표가 돼 가지고 그러니까 일본 국민이라기보다는 황국신민의 대표인양 활동을 하셨던 분도 실제로 있었습니다. 대단히 이 말은 그분한테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이고 참여했던 일본위원들에게도 미안할 수 있는 말인데 별 수 없이 이런 표현을 하게 되는 군요.

▶정관용>지금도 황국신민처럼 하는 분이 있다?

▷조광>좀 지나치다고 느껴지실는지 몰라도 그게 제가 받았던 솔직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대화의 카운터 파트인데. 같이 얘기를 하고 같이 설득을 하고 논의를 해 나가는 거죠.

▶정관용>참 힘드셨겠습니다. 목표지점을 뭘로 잡으셨어요?

▷조광>우선 한일역사공동위원회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일본과 한국이 상호 역사인식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밝히자.

▶정관용>서로를 밝히자.

▷조광>예. 그래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분명히 하는 데 가장 중요한 목표를 뒀습니다. 그래서 같은 점과 다른 점, 이걸 분명히 하고 그 다음에 같은 점은 문제가 없지만 다른 점에 대해서는 차후에 또 기회가 된다면 어떤 동일한 합치점을 찾아서 나아가는 걸 목표로 더 원대한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1기와 2기, 그리고 앞으로 몇 번 정도 회기가 더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단계에서는 우선 정확하게 공식적으로 그들의 입장이 무엇인가...

▶정관용>입장과 인식을 확인하는 것.

▷조광>우리는 어떤 입장이라는 걸 서로 확인시켜가지고 그걸 보고서를 통해서 그대로 드러내서 일본이나 한국의 교과서 집필자들이 그 우리의 토론과정이라든지 우리의 보고서를 보고 자신의 책을 지을 때 참고하고 그렇게 하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정관용>우선 같음과 다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기록한다. 이것이 1차 목표다.

▷조광>1차 목표였고 그 목표는 나름대로 잘 이루어졌다고 생각이 됩니다. 모든 문제가 다 이루어진 건 아니죠.

▶정관용>궁극적으로는 공동교과서로까지 가야 되는 거 아닙니까?

▷조광>그런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공동역사교과서 편찬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정관용>그래요? 사실 이건 교과서 파동 때문에 생긴 거잖아요.

▷조광>우리의 연구가 공동교과서를 결과할 수는 있지만 우리 자신이 그걸 목표로 삼을 수는 없다고 아직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공동교과서는 어느 단계에는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교과서라고 할 때는 양국 국가의 개입이라고 하는 문제가 또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자칫하면 국정(교과서)의 냄새가 나게 되요. 이건 국정교과서는 사상통제의 방법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은 일본이나 우리나 다 검인정 교과서 제도입니다. 검인정 교과서 제도인데 적어도 검인정 교과서를 같이 만드는 방법 정도까지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고 지금 각처에서 NGO들이 중심이 되고 종교단체가 중심이 되어서 교과서를 같이 쓰는 작업들이 진행이 된 바가 있습니다.

▶정관용>있습니다.

▷조광>그건 교과서라기보다는 말이 쉽게 교과서라고 우리는 얘기를 많이들 합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실제로는 부교재 정도로.

▶정관용>부교재 참고서죠.

▷조광>그렇죠. 네.

▶정관용>그래도 민간에서의 노력들은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게 좋은 것이고 공식적으로는 한국의 역사학자와 일본의 역사학자가 공동으로 연구를 좀 해 보자.

▷조광>연구를 하고 우선 첫 단계로는 동일한 점과 차이점을 발견을 하고 거기에서 서로의 의견 합치를 위한 노력을 또 추후에 전개하도록 이제 준비를 해 나가는 겁니다.

▶정관용>저희가 그런데 성질이 급해서요. 마음이 급해서 이런 거 만들면 1기, 2기 지나면 빨리 뭐가 좀 결실이 나오기를 바라는데 이게 그렇게 쉽게 될 문제가 아닌 거죠.

▷조광>제가 1기 끝나고 국회에 한 번 불려갔던 적이 있습니다.

▶정관용>국회 가셨던 일, 조금 쉬었다가 3부에서 이어서 말씀 듣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제가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요.’ 이런 말씀드렸는데 저 이것도 교수님께 배운 얘기입니다만 유럽에서 독일과 프랑스 공동 교과서 나오는 데까지 70년이 걸렸다면서요. 그 얘기 3부에 이어가겠습니다. 35분에 다시 오죠.

▶정관용>네. 제 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셨던 고려대학교 조광교수와의 말씀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아까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1기, 2기, 6년 활동을 하셨는데 한일 양국 간 역사학자들의 인식에 있어서 같음과 다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기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런 말씀하셨고요. 저 같은 사람 성질이 급해서 빨리 빨리 뭔가 좀 결과가 나왔으면 했었는데 거기까지 말씀 들었거든요. 그런데 뭐 1기 활동 끝나고 국회를 가셨다고 그러셨어요? 아까?

▷조광>그때 또 교과서 문제가 터지니까 국회에서 나오라고 해 가지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국회의원이 그런 질문을 하더군요. ‘예산이 얼마냐?’ 그런데 전 전체 예산은 잘 모르겠고. 왜냐하면 거기에 교육부에서 파견된 직원이라든지 공무원들, 그분들의 급료나 사무실 비용 이런 것까지 다 예산안에 포함을 해야 되는데 그래서 연구비가 대략 한 3억 정도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정관용>1년에?

▷조광>전체 2년 회기 동안에. 그래서 ‘연구비 3억을 가지고 우리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했더니 그 국회의원이 ‘3억이라는 국민의 혈세를 쓰고도 아직 그 문제를 해결 못했느냐?’ 이렇게 나왔습니다.

▶정관용>교과서 문제를 왜 해결 못 했느냐?

▷조광>네. 그래서 제가 하도 한심해 가지고 ‘만약에 3억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건 돈으로 따질 순 없죠. 그러나 하여튼 많은 노력을 들이고 꾸준한 인내를 갖고 해야 될 문제입니다.

▶정관용>다른 누구보다 사실 조광 교수님께서 이런 문제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계시고 일본이 얼마나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정확히 잘 알고 계신 분이지만 대화한다는 점에서는 ‘무작정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인내를 갖고 해야 한다.’ 이런 답을 또 주고 계시네요.

▷조광>네. 가장 중요한 건, 대화의 기본 원칙은 상대에 대한 존중입니다. 그리고 대화에 있어서 대화를 통해 가지고 상호변화도 받아들일 자세도 돼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학문적 대화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 상호존중 하는 마음과 그 상대방의 옳음을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일종의 용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그러나 이제 모든 대화의 그리고 우리가 지난 번 1기와 2기를 통해서 했던 대화에서 조금 부족한 면도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정관용>그러나 아무튼 저처럼 성질이 급하다고 연목구어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말씀을 쭉 듣다보니까 일본 측이 갖고 있는 아까 ‘거의 황국신민처럼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까지 있더라.’ ‘일본국민을 대표해서 나왔다.’ ‘일본 정치에 영향력을 받는다.’ 이런 학자들까지도 대화상대로 하려면 서두를 수 없죠. 사실.

▷조광>매우 차분하게 설득을 시켜나가야만 됩니다.

독일과 프랑스는 70년이 넘는 대화를 통해 최근에야 공동교과서 채택

▶정관용>유럽 얘기 조금 해 주세요. 그러니까.

▷조광>공동교과서 편찬은 유럽 쪽에서 먼저 시도가 됐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다음에 그 당시에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1차 세계대전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사나 지리에 대한 자국 중심의 해석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는 반성을 하게 돼서 프랑스나 독일의 학자들이 그걸 조금 준비를 하려다가 나치가 등장을 하고 2차 대전이 진행이 또 됐던 것이었죠. 2차 대전이 끝난 다음에도 이러한 노력이 일어납니다. 이 노력이 일어나 가지고 특히 또 1950년대에서는 유네스코에서 국제평화를 지향하면서 역사와 지리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인식이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국제평화를 위해서도 그걸 바로 해 줘야 한다는 것 때문에 역사대화를 하도록 권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독일과 프랑스의 연구자들이 자발적으로 대화를 시작을 해서 70여년 이상 대화가 진행이 됐죠. 프랑스의 경우를 보자면.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에 보자면. 그 후에 최근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와 독일의 공동역사교과서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도 공동역사교과서라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이 된 건 아닙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끝까지 견해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해석 두 개가 결합이 된 것이니까 의견이 다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프랑스의 경우에는 프랑스 교과서에는 프랑스 얘기를 위에다 쓰고 각주를 통해 가지고 독일은 이 문제에 이렇게 생각한다. 그걸 밝혀둡니다. 상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정관용>반대로 독일은.

▷조광>독일은 독일어로 된 얘기 먼저 하고 그 다음에 프랑스는 이렇게 한다는 식으로요.

▶정관용>서로 의견이 차이가 안 나는 건 똑같은 내용으로 쓰고?

▷조광>같은 내용으로 인정을 해 주는 거죠.

▶정관용>그게 분량이 얼마나 됩니까? 예를 들면 전체 중에 차이나는 게... ▷조광>그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이제 꾸준히 대화를 통해 가지고서 합치점을 많이 발견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관용>거기까지 이르는데 70여년이 흘렀다.

▷조광>한 70여년 봐야 되겠죠. 그리고 독일하고 체코슬로바키아, 독일하고 폴란드 등등 2차 세계대전에 피해를 주었던 독일이 피해를 입었던 주변 국가들과도 지금 교과서 대화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도 같이 책을 사용을 할 정도가 되고 있죠. 다들 이 대화가 몇 십년 간 것입니다.

▶정관용>우리도 몇 십 년 가야 됩니까?

▷조광>그런데 하나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독일은 전쟁 책임에 대해서 철저히 인정합니다.

▶정관용>인정하고 반성했죠. 처음부터.

▷조광>처음부터 인정하고 반성하고 바로 잡으려고 하는 그 각오가 투철하고, 그래도 그렇게 오래갔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과연 그럴 수 있는가. 자신의 전쟁 책임에 대해서 얼마나 절감을 하고 있는가. 이걸 볼 때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생각이 되거든요. 조금이 아니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관용>그럼 우리는 100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겠는데요.

▷조광>자, 100년이 되더라도 할 건 해야 됩니다.

▶정관용>역시 역사를 공부하시는 분이라 호흡이 저랑 너무 다르신 거 같아요. 그런데 아까 조광 교수님께서 초반부에 그런 말씀하셨어요. ‘믿고 있다’,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라고 하셨거든요.

▷조광>저는 믿습니다.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은 큰 성과

▶정관용>그러세요? 저 같은 사람은 포기해 버릴 거 같아요.

▷조광>왜냐면 초기에 한일 간에 역사교과서 문제 나올 때 일본에서는 전혀 자신의 교과서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대화를 하고 그 문제가 지적이 되니까 일본 교과서의 문제점에 대해서 일본인 교과서 집필자, 일본인 연구자, 일본 국민들이 인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점차 그 폭이 넓어진 겁니다. 그래서 역사 해석에 있어서도 종전에는 자신들의 견해와 전혀 달랐던 것도 이젠 합치되어 나가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죠.

▶정관용>아주 조금이잖아요. 그런데.

▷조광>네. 합치되어 나가는 하나의 예는 그렇게 빨리 진행이 된 것도 아니고 매우 미미한 부분에 불과하리라 생각이 됩니다마는 지난 5월과 8월에 계속해서 이 발표가 되었던 한일지식인선언을 들 수 있죠. 거기에서 ‘한국병합조약이 원천무효다.’ 체결 당시부터 무효라는 점, 아무도 일본인들은 그 얘기를 안 했습니다. 생각을 감히 못했습니다. 이제 와가지고 역사 쪽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계속 논의를 하다 보니까 동의를 해 주신 분들이죠. 일본에서 동의한 분이 540분 정도 나왔습니다.

▶정관용>540명. 그 가운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일본 측 대표도 한 분 있다면서요?

▷조광>예. 미타니 다이치로 선생이라고 이분은 일본 동경대학에서 정치학을 하셨던 분이고 정치사상을 전공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일본 학사원 회원으로 추대가 되셨죠. 우리나라로 치면 학술원입니다. 그리고 제가 쭉 접촉을 했습니다만 저도 대단히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미타니 다이치로 선생 같은 분도 거기에 동의를 해서 서명을 했다는 건 저한테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고마운 일이었고요. 그리고 거기에 보자면.

▶정관용>일본 정부의 대표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 나올 분 정도면 일본 내에서 예컨대 우파, 좌파 이런 걸 구분한다고 쳤을 때 너무 강한 좌파, 이런 분은 이런 데 대표로 안 보낼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보면 중도적인 분을 보냈는데 그분이 이런 데 서명을 했다.

▷조광>네. 그래서 저는 거기에 바로 일본 양심을 더 굳게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보고 희망을 갖게 된 겁니다. 물론 거기에 서명을 했던 분 중엔 와다 하루키 선생처럼 아주 양심적인 얘기, 친한적인 얘기를 계속 했던 분도 계시죠.

▶정관용>오래 전부터 그분은 그러셨죠.

▷조광>그러나 와다 하루키가 서명을 하면 으레 그러려니 하죠. 그런데 이제 미타니 선생이라든지 오에 겐자부로 같은 일본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신 분이라든지 그러한 일본의 지성들이 한국병합조약 그 자체가 원천무효였다고 하는 건 그건 그 동안의 대화의 결과라고 생각이 됩니다.

▶정관용>알겠습니다. 저희들 눈에 보기에는 너무 더디다 싶을지 모르지만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들도 자신들의 뿌리와 기준을 바꿔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인내를 갖고 그러나 희망을 갖고. 좀 아까 기억이 나는 말씀이 ‘100년이 걸리더라도 할 건 해야 한다는 자세를 갖고 임해야 된다.’ 그런데 1기, 2기 활동은 끝났지 않습니까?

▷조광>1기, 2기는 끝났습니다.

▶정관용>3기는 지금 어떻게 되나요?

▷조광>지금 저희가 2기 활동을 마무리 지으면서 정부에 건의를 했습니다. 이건 1기, 2기로 끝날 문제가 아니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해야 될 문제가 아직도 많이 산적해 있으니까 3기를 계속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전달했습니다. 그 의견을 아마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의 외교부가 일본에게도 전달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쪽에서는 아직 여건이 성숙이 안 됐는지 이걸 이제 응답을 안 하고 있는 거죠.

▶정관용>답변이 없고... 그건 양국 정상이 합의해야 하는 겁니까?

▷조광>반드시 그렇습니다. 그래야만 거기에 이제 정부가 그만큼 관심을 갖는 것이 되겠고.

▶정관용>예산투여하고 그러는데.

▷조광>예산투여를 해야 하고 그리고 또 그 나름대로의 어떠한 뭐라고 할까요. 권위라고 할까. 이런 것도 부여를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건 일본인들 좋아하는 분도 많이 있고 존경하는 분도 많이 있지만 또 어떤 면에서 일본 분들 경우에는 ‘NO’를 못합니다. 3기를 안 하겠다는 얘기를 아직 안했는데, 그건 어떤 측면으로 보자면 거절이나 마찬가지죠.

▶정관용>말 안 하고 있는 게 거절이다.

▷조광>그래서 잠시 좀 여건이 아직 안 됐다고 그분들은 혹시 판단한 거 아닌가.

▶정관용>그런데 이런 문제 우리 정부가 좀 더 강하게 요구해야 하지 않나요?

▷조광>저 바람은 이 문제 해결은 한일 간의 미래를 여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과거가 미래로 나아가는 발걸음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면 안 된다.’, 맞는 얘기죠. 그걸 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정리해야지 과거를 덮어버린다고 그게 없어지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또 일본에도 양심적인 연구자들, 지식인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의 경우에는 어떻게 보자면 자신의 과거 치부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과서 대화는 혹시 그렇게 생각할는지는 모르는데 이건 잘해야 본전이라고 일본 쪽은 볼 수가 있지 않을까.

▶정관용>가급적 피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조광>그렇죠. 자칫하다가는 밑질 수도 있고 그러니깐 여기는 제 1차적인 의미를 두기 보다는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는 이를테면 천천히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일 교과서 대화,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정관용>그럴 때 우리 정부가 더 앞장서 나가야 됩니까? 정부도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 됩니까?

▷조광>정부는 국민을 대변하는 입장이고 나라의 미래를 제시를 해 줘야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나라의 미래를 그리고 국민의 염원을 올바로 알고 있는 정부라면 당연히 좀 더 여러 각도에서 여러 루트를 통해서 더 이것을 좀 하도록 요구를 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정관용>아까 2부에서 거리의 시민들 가운데 몇몇 분들도 여러 가지 우리 피해 받은 분들 징용 문제라든지 위안부 문제라든지 이런 데 왜 정부가 더 공식적으로 문제제기 안 하느냐. 이런 얘기 나오던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광>징용 문제나 위안부 문제 등등이 이제 1965년에 맺어진 한일협정이 가지고 있는 어떤 문제점들 때문에 우리 정부가 직접 책임을 져야 될 면이 있습니다. 개인의.

▶정관용>모든 청구권이 소멸됐느냐. 안 됐느냐.

▷조광>그건 정부가 책임을 져 줘야죠. 정부가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 여러 여건상 아마 아직은 부족한 듯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모두 다 면탈이 됐다, 면제됐다고는 보지는 않습니다. 결국은 역사에 그리고 사회에 상흔을 남긴 겁니다. 식민 지배에 대해서. 역사적인 트리우마, 사회적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무한 책임을 져야 됩니다.

▶정관용>알겠습니다. 시간 거의 다 돼서 개인적인 질문 한두 가지 드리고 싶은데 조광 교수님이 45년생 해방둥이네요.

▷조광>원래 제 생일이 8월 15일이었다고 합니다.

▶정관용>정말요?

▷조광>그러나 호적에는 저희 큰아버님이 예전에는 호적이 큰 집에 다 딸려 있었는데.

▶정관용>호적은 관계없고요.

▷조광>호적은 8월 10일로 돼 있습니다.

▶정관용>진짜는 8월 15일. 정말 해방 그 날 태어나셨대요?

▷조광>해방, 그날이라고 우리 어머님은 확실히 기억을 합니다.


▶정관용>그러면 운명이 그때 이미 정해지셨군요.

▷조광>그런데 저는 이제 어머님이 생전에 계실 때 가끔 농담을 했습니다. ‘문자를 믿어야 돼? 어머니 기억을 믿어야 돼?’ 어머니는 더 발끈하셔가지고 ‘내 기억이 정확하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 하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정관용>45년 8월 15일생 역사학자의 정년퇴임이라. 이것 참 여러 가지로 기록적인데요. 그런데 이력을 보니까 처음에 대학은 신학을 전공하셨어요.

▷조광>네. 신학도 공부를 일부 했습니다.

▶정관용>제가 볼 때 원래 신부가 되려고 하셨다가 역사학자로 방향을 바꾸셨던데. 왜 그러셨어요?

▷조광>그 당시에는 이제 교회도 바티칸 공의회에 영향을 깊게 받아 가지고 많은 변화를 체험을 할 때입니다. 그리고 특히 사회에 대한 관심이 강하게 일어날 때입니다. 저 자신도 그러한 1960년대의 변화의 물결에 또 동참했던 입장이고 사회의 변화를 논할 때 제가 일단 하고자 했던 신학이라고 하는 길보다는 그 변화를 올바른 방향으로 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학문인 역사가 더 중요하지 않나.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정관용>알겠습니다. 정년퇴임하시고 앞으로의 계획 말씀 조금 해 주시면요?

▷조광>앞으로의 계획은 여태까지는 공부가 의무였지만 이제는 선택 사안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공부라고 한다면 그 동안 보아온 게 한문 자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입장에서는 한문 자료에 대한 주석 작업들, 조선 후기 역사나 혹은 개항기 한문 자료에 대한 주석 작업은 아마 후진들보다 조금 나은 면이 있겠고 그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 작업을 조금 해 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까 잠깐 정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만 역사를 제대로 찾기 위한 노력.

▶정관용>역사교육 정상화.

▷조광>네. 그걸 위해서 글 쓸 기회라든지 말할 기회가 있다면 거침없이 얘기를 해야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역사는 선반에 올려놓는다고 해 가지고 결코 잃어버리거나 없어질 문제가 아닙니다. 지배층에서는 특히 정치적 지도자들은 역사 문제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금 깨닫고 그리고 인문학 없이는 우리나라가 망합니다. 그러니까 인문적인 지식을 위해서라도 역사를 고등학교 과정에서 정상화시켜야만 될 것입니다. 이걸 위해 노력을 하겠습니다.

▶정관용>올해에만 8권이나 책을 지금 내시죠?

▷조광>네. 그건 제가 워낙 게을러가지고요. 여태까지 논문만 썼지 그 논문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정년을 눈앞에 두고 책으로 엮어보자 해 가지고 8권을 만들었는데 그것도 좀 힘드네요.

▶정관용>8권을 한꺼번에 펴낸다고 하는 건 쉽지 않죠. 그냥 논문을 그대로 짜깁기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조광>네. 조금씩 손을 봐 가지고 연결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조금 지체된 면도 있고 있습니다.

▶정관용>조만간 또 책을 계속 내실 계획을 갖고 계시던데?

▷조광>그 동안 여기저기 발표했던 논문들이나 글들을 모으게 되면 앞으로도 몇 책을 더 좀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8권을 내고 났더니 좀 핍진해 지는 거 같아요. 조금 쉬었다가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관용>정년퇴임하시지만 더 바빠지실 거 같고요. 조 교수님이 바빠지셔야 하실 거 같습니다.

▷조광>감사합니다.

▶정관용>오늘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려대학교 조광 교수와의 긴 대화였습니다. 여기서 마치고요. 주말은 이명희 아나운서의 시사자키 애청해 주시고 저는 월요일 저녁 6시에 다시 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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