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그는 1980년 동아방송의 ‘정계야화’라는 정치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요, 19년 동안 ‘격동 50년’의 해설자로 출연해, ‘라디오 스타’가 되는데요. 그러나 김종성 씨의 45년 성우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아방송 사태로 실직한 후, 방송을 접고 복덕방을 할 정도로성우 생활을 포기할 뻔한 위기도 겪었는데요.
문학을 전공한 그가 우연히 성우가 되고, 라디오스타까지 된 이야기.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신춘특집 ‘라디오 스타’ 격동 50년의 성우 김종성 씨를 3월 11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성우로 맺은 라디오 인생 <격동 45년>
▶ 이름에 ‘금종소리’라는 뜻이 담겨있는데 이름대로 가는 것 같아요.(웃음)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에 나오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정정할 게 있는데 대본을 쓰다가 성우생활을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제가 동국대학교 국문과 62학번인데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는 거예요. 한참 어려울 때니까 학비를 벌기 위해서 가정교사도 하고 그랬는데 당시에 오락거리라고는 라디오밖에 없었잖아요. 라디오를 들으면서 늘 멋진 드라마를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글을 써서 어디에 내보기도 하고 찾아가기도 했는데 매번 떨어졌어요.
그러다가 MBC의 백민 선생님을 찾아가니까 어느 성우학원의 교습을 하시더라고요. 작품을 써서 따라다니다가 거기 교습을 보고 성우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그게 45년 동안 계속된 거예요.(웃음)제가 대학교 3학년 되던 1964년에 TBC 방송국에서 성우 1기생을 뽑았어요. 전년도 가을에 동아방송에도 시험을 쳤는데 거긴 떨어졌고 천행으로 TBC 방송국에 붙어서 학비도 벌고 집안도 도울 수 있었어요.
당시의 월급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것 같아요. 나 같은 경우는 대학교 재학 중에 방송국에 들어갔는데 당시 면접할 때 김세원 씨도 대학 재학 중이었어요. 그런데 너그럽게 봐줘서 둘 다 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죠.
▶ 당시에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님이 TBC(동양방송) 방송에 관계하셨기 때문에 면접을 직접 봤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우리 때 했었어요. 나는 누군지 몰랐는데 당시에 방송국을 만들어놓고 고 이병철 회장님이 굉장히 공을 쏟을 때였어요. 중앙일보 건물 3층에 본인 방이 있었고 성우실에도 가끔 내려오시기도 했어요. 우리는 성우, 아나운서, PD가 똑같이 강습을 받았어요. 지금과는 달리 방송인으로 뽑은 거죠. 실기시험도 있었어요.
▶ 소설가 조정래 씨, 시인 박제천 씨가 동국대 국문과 동기시라면서요?
조정래 씨하고는 학번이 같은데 내가 방송국을 다니면서 휴학을 했어요. 그러다가 1967년도에 63학번인 박제천 씨하고 같이 졸업했어요. 문인들이 많아요. 나도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작가 안 된 게 너무 다행이에요. 작가를 할 만한 능력도 없을뿐더러 작가를 한다고 했으면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조정래 씨 같은 경우는 16년을 앉아서 글을 쓴 거잖아요. 나는 그렇게 못해요.
▶ 성우 김종성 씨 하면 <격동 50년>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 20년 동안 하시던 프로그램을 왜 그만두신 건가요?
하나의 고정된 스타일로 함몰되는 게 싫어요. 그런데 해설이라는 부분은 특별한 변화가 없으니까 그대로 가면 되는데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은 드라마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 그저 옛날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서 그게 불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작가나 PD한테 불만이 쌓여서 운동권이라든지 통일 지향적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했는데 사실은 이 부분은 연기자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PD가 만들어놓은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월권인 거죠. 하지만 생각이 그쪽으로 가있으니까 불만이 생겼고 제작진도 제가 너무 오래 되기도 했고 바꾸고 싶어 했는지도 몰라요. 서로 입장이 맞아 떨어진 거죠.
◇ 두 달만 하자고 시작한 <격동 50년>, 19년 동안 해설
▶ 처음에는 <격동 30년>이었다가 <격동 50년>으로 장수한 프로그램인데 개인적으로도 상징적인 작품이시죠?
이 드라마를 1988년 4월에 시작했는데 처음 섭외가 왔을 때 무슨 배짱이었는지 안 한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MBC라는 특수한 상황이 정치드라마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 전까지는 <북한 7301>이나 <법정야화><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유형이었지 정식으로 정치드라마를 한 적이 없어요.
TBC는 <광복 20년>을 했고 동아방송만 제대로 된 정치드라마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동아방송이 1980년도에 통폐합이 되면서 MBC에서 연락이 왔어요. 정치를 비판하는 게 아니고 정치를 도와주려고 하는 드라마는 안 한다고 했더니 정수열씨라는 분이 굉장히 뚝심이 있더라고요.
일단 만나자고 해서 만났는데 우선 두 달만 하재요. 좋다, 두 달이면 나도 해보겠다고 했어요.당시에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TV에 전두환 씨의 얼굴이 맨 먼저 나올 때였어요. 어쨌든 정치드라마를 시작했는데 절묘하게 중간 라인을 잘 타고 들어갔어요. 방송을 해서 맞지 않으면 바로 제재가 들어올 때인데 내가 실망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잘 가더라고요. 그래서 두 달 하자고 시작한 것이 조금씩 늘어나서 19년을 했으니까 원 없이 한 거죠.
거기에 참여한 이영신 작가, 김영 작가의 공로가 크고 PD 몇 분이 수고를 많이 했어요. 이제는 라디오 드라마가 다 끝나고 MBC에 그거 하나 남았잖아요. 라디오 드라마가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드라마가 살아야 해요. 누가 하든 관계없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진심이에요.
▶ <격동 50년>을 하면서 정치인들이 항의를 한다든지 만나자고 하거나 또 내용을 빼달라고 한 일도 많았다고 들었어요.
성우와 관계된 일은 아니고 PD가 접수해서 작가와 진행할 일이기는 하지만 <격동 50년>에서는 내가 연기자가 아니라 제작팀의 일원이 된 것 같았어요. 작가들이 저와 친하기도 해서 많이 상의들을 하곤 했는데 당시에 배제하려고 노력한 것이 누가 저녁을 사고 싶어 하는 경우가 생기면 그럴 때는 잘 안 나가고 그러지 말자고 한 적도 있어요.
그리고 한동안 중단된 적도 있었죠. 김대중 대통령 납치사건을 하면서 어느 쪽에서 외압이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방송국에서 끊더라고요. 7~8개월 정도 중단되었어요.
▶ 김종성 씨는 시대나 역사의식에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하신 것 같아요.
지금까지 연기생활을 하면서 그런 부분이 마이너스 요인 혹은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나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해요. 비판적이거나 부딪치면서 돌파해나가는 것들이 오늘의 내가 있게 한 것이 아닌가, 동전의 양면이겠죠. 나이가 들면서 후회되기도 해요.
특히 TBC 시절에 부딪히기 시작해서 결국 그만두게 되었잖아요. 1964년에 6.3사태가 일어났는데 당시에 제가 데모를 조직해놓고 방송국을 들어가게 된 거예요. 주동세력은 아니었지만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패기, 한일회담 반대 등 그런 생각을 가지고 방송국 생활을 했었어요. 하지만 방송국도 사회니까 그런 생각을 받아주지 않죠.
그래서 결국 TBC를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에 어렵게 성우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지금까지 성우를 한다는 건 기적이라고요.
▶ <격동 50년>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많을 거 같아요.
생각보다 에피소드가 많지 않고 무난하게 방송을 이끌어 왔어요. 해설을 맡은 내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성우들한테 편승해서 인기를 누린 경우에요. 성우 몇 분이 정말로 실제인물의 혼이 쓰인 것처럼 정말로 비슷하게 하더라고요. 노력을 많이 했어요.
▶ 열성 팬들도 굉장히 많았겠어요?
많았어요. 원로 정치인들 몇 분이 편지를 준적도 있는데 이분들은 구분을 잘 못하시나 봐요. 연기자가 한다는 걸 모르고 직접 출연한 걸로 아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심지어는 “노태우 씨, 거기에 나와서 그런 얘기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온 적도 있었어요.(웃음)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미있었어요. 그게 라디오니까 가능했던 거예요. TV에서도 MBC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해설을 했고 ‘3김시대’도 했고 정치드라마를 꽤 했어요.
그런데 TV에서는 라디오처럼 되지 않더라고요. 라디오는 정치드라마가 재미있어요. 그동안 우리 정치사는 독재와 민주의 대결구도로만 그려졌잖아요. 앞으로 정치드라마가 좀더 발전해서, 제대로 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놓고 전체를 그린다면 라디오만이 갖고 있는 특성에 아주 잘 맞아떨어질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옛날 정치인들을 모방할 수 있는 성우가 남아있을 때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죠.
◇ 난 “늦둥이” 동생 기덕이는 “귀둥이”
고향이 충남 공주인데 시골에서 농사도 짓고, 아버님은 한학을 공부하셨기 때문에 시조 선생님도 하셨어요. 나도 그렇고 기덕이도 그렇고 성격이 내성적이에요. 시골출신이라 연기를 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죠. 글은 혼자 쓰는 거니까 라디오 드라마를 쓰겠다고 백민 선생님을 찾아다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왔고, 안타깝게도 연기가 부족해서 해설 쪽으로 온 거죠.
15명이 처음에 들어왔는데 내가 연기가 가장 떨어지는 케이스였어요. 연기가 속으로는 내재되어 있는데 울고 웃는 표현이 자유자재로 되지 않는 거예요. 성우로만 있었으면 자칫 도태될 수 있었는데 해설쪽 DJ로 간 거고 나 같은 경우는 기를 쓴 거죠. 어떻게 하면 잘 될까 하고요.(웃음)
▶ 혹시 부모님의 좋은 목소리를 물려받으신 건 아닌가요?
가끔 공주의 선산을 가면 어느 할아버지를 잘 모셔서 이렇게 형제가 방송을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목소리를 물려받은 것 같지는 않아요. 자연스럽게 일상의 이야기를 할 때는 별로 목소리가 좋지 않은데 연기에 들어가면 제2의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 때문에 정신력이 중요한 것이지 소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소리보다는 어투이고 이 어투를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좋아하는 걸로 만드는가가 중요하고 또 시간이 흐르면 말과 글이 바뀌는 것처럼 어투도 바뀌어요. 연기자도 음성을 어떻게 바꾸어서 현실에 가깝게 만드는가, 이 노력을 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 친동생인 김기덕 씨는 어릴 때 어떤 아이였어요?
어렸을 때 아주 귀티 나는 귀동이었어요. 스님이 오면 기덕이를 붙잡고 너는 소설가 이광수처럼 유명한 사람이 될 거라고 이야기도 해주고, 또 재수하면서 계룡산에 갔는데 어떤 스님이 나타나서 자기가 꿈에 천도복숭아를 받았는데 지도자가 온 거라면서 붙잡더래요. 누님들이 많은데 나보다 동생인 기덕이를 더 사랑해서 질투를 한 적도 있었어요.(웃음)
집에 아들이 없어서 아버님이 마흔에 작은 부인을 두셨대요. 어머니가 나서서 주선을 하셨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마흔까지 아들이 없으면 죄인이었던 시절이었던 거죠. 그러자마자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신 거예요. 그래서 작은 부인이 논 얼마를 받고 나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45살에 기덕이를 낳으셨어요. 아주 늦둥이들이죠.
기덕이는 굉장히 귀하게 컸어요. 아프기라도 하면 온 집안에서 난리가 났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성격이 자기만 알아요. 지금도 형제들이 모이면 자기만 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요.(웃음)
◇ 실직 후 시작된 방랑, 정치드라마로 부활
▶ 아까도 말씀하신 것처럼 성우의 삶이 순탄하지는 않았다고 하셨는데 복덕방도 하셨어요?
아까도 잠깐 얘기했는데 TBC와 결별하고 놀고 있었는데 동아방송에서 연락이 왔어요. TBC에 있을 때 <생활대학>이라는 프로를 했는데 내가 한 꼭지를 읽으면 양주동 선생님이 워낙 재미있게 동서고금의 얘기를 하셨어요. 밤 11시대에 했는데 라디오를 안 듣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히트를 했어요. 내가 TBC를 그만두니까 동아방송에서 그 비슷한 방송을 만든다고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동아방송 시대가 열립니다.
거기서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저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1974년까지 만 5년 동안 동아방송에 있었는데 동아일보에서 신문광고사태가 났잖아요. 그러면서 동아방송이 돈이 없어서 외부인을 못쓰기 시작했어요. 나는 동아출신이 아니니까 제일 먼저 아웃이 됐어요.이후에 2,3년을 고생하다가 견디다 못해서 잠실에 복덕방을 낸 거예요.
이것도 재미있는 게 그때 복덕방 했던 사람들은 다 돈을 벌었어요. 평당 5500원 할 때니까요. 그런데 방송이 좋으니까 복덕방에 앉아있으면서도 하루 종일 방송 생각만 하는 거예요. 나를 안 써주는 것에 대해 분노도 있으니까 이것도 저것도 다 안 되더라고요. 섭외가 와도 단역이면 안 하고, 그러니 복덕방이 되겠어요? 벌써 실력 있고 젊은 친구들이 복덕방에 들어오기 시작해서 큰 돈이 왔다 갔다 했어요. 부자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거죠.
그러다가 MBC 김상옥 씨가 <그림자>라는 프로를 만들었는데 탤런트 정혜선 씨, DJ 김세원 씨가 해설을 하다가 나한테 연락이 왔어요. 당시에 전화도 없을 정도로 다들 가난했는데 어떻게 복덕방 전화번호를 알고 연락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안 하겠다고, 방송이라면 진저리가 난다고 했더니 한 번 만나자고 해요. 그러마 하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죠.
두 달 후에 오승룡 선배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넌 성우라는 직업을 뭐로 알고 그런 식으로 나오냐고 핀잔을 줘요.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누가 만나자고 하면 만나서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못하겠다고 얘기를 하는 게 예의지 김상옥 씨가 만나자는데 안 만났다면서, 그러는 거예요. 듣고 보니까 아차 싶어요. 그래서 전화를 해서 그 앞에 있는 황실다방이라는 곳에서 만났어요.
예전에는 라디오 PD들이 권위적이고 딱딱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PD가 전혀 아니에요. 완전히 해맑은 소년 같아요. 내 얘기를 전부 들어보더니 하고 싶을 때 하라는 거예요. 그러잖아도 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리는데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얼마나 반가워요. 그래서 복덕방을 때려치우고 다시 방송을 시작한 게 <그림자> 때문이었어요.
그러다가 서울의 봄이 왔을 때 <정계야화>가 다시 시작되었죠. 원래 1차 <정계야화>의 해설은 오정환 선배님이 하셨는데 1974년 동아사태 때 <정계야화>가 끊어지면서 미국으로 가셨잖아요. 그랬다가 서울의 봄이 오면서 2차 <정계야화>가 다시 부활이 되었고 해설자로 내가 낙점이 된 거죠.
▶ 1980년대 그 시절의 성우들을 보면 주로 외화를 더빙할 때였는데 외화는 별로 안 하셨나 봐요?
내 성격 자체가 쾌활하고 명쾌한 편은 아니니까 외화가 오더라도 멜랑꼴리한 역이 왔어요.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지상에서 영원으로><애정이 꽃피는 나무>를 맡았고 로버트 와그너의 부부탐정 시리즈 같은 것도 전부 내가 했고 더빙하면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영화는 <나사렛 예수>에서 예수 역을 맡은 거예요. 그때도 경쟁자가 많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내가 하게 됐어요.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어요. 잘못하면 혹여 신앙 있는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 봐 걱정이 되더라고요. 다행히 성공을 했어요. 그리고 <황금연못>의 헨리폰다 역도 해봤고 어쨌든 외화 시절에는 후배들한테 밀린 경우죠.(웃음) 워낙 배한성 씨, 양지운 씨, 그리고 유강진 씨가 잘 했거든요.
◇ 같은 성우 1기생 아내, 자녀 둘은 성우 만들려다 실패
▶ 부인도 같은 성우시죠?
나하고 같은 1기생이었는데 목소리는 참 좋은데 성우가 뭐하는 건지 모르고 들어왔어요. 15명 성우 중에서 가장 못하는 거예요. 나도 성우를 해야 하니까 같이 남아서 연습하자고 한 게 인연이 돼서 7년을 연애하고 결혼했어요. 내가 24살, 아내가 23살에 들어왔는데 7년 동안 연애하니까 31살, 30살이 된 거예요. 그때만 해도 30살이 넘었는데 결혼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잖아요. 갈 데가 없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내가 데려왔죠.(웃음)결혼해서 1남 1녀 낳고 잘 살고 있어요.
▶ 자녀분들은 부모님의 끼를 물려받았나요?
전혀 안 물려받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는 풍토가 참 건전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이들 중 하나를 성우로 만들고 싶었어요. 내가 진심으로 가르칠 수 있고 또 부끄럽지 않은 직업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정직하게 자신이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이라는 확신 때문에 꼭 시키려고 했어요. 그런데 두 놈 다 말을 안 들어요. 전혀 성공을 못 했죠.
▶ 요즘 오디오 북을 만드는 일에 열정을 쏟고 계시다고요?
오디오 북을 만든 지 18년 됐으니까 그때는 이런 말이 있지도 않을 때에요. 남의 녹음실에 앉아서 시작을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 성우라는 직업이 허망해요. 우리가 하는 라디오 방송은 전파로 날아가 버리고 말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가치 있게 남기는 일이 뭐가 있을까? 좋은 책을 우리 소리로 남겨놓으면, 좋은 책이 남으면 소리도 남을 거 아니겠어요?
우리나라도 시각장애인이나 노약자 같은 책을 못 읽는 분들에게 서비스 차원으로 이렇게 좋은 책을 가깝게만 해준다면 대중적인 인기는 없을지 몰라도 마니아가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현역 무대에서 물러나서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거죠. 지금은 여의도에 사무실을 내고 스튜디오를 하나 꾸몄어요. 만약 오디오 북이 시장에서 활성화가 된다면 성우도 지금보다 꽃을 피울 수 있겠죠.
◇ 라디오는 소리의 세계, 진실성과 깊이가 관건
▶ 개인 UCC 제작도 가능할 만큼 영상매체가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왔는데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도 건재한 라디오를 보면, 라디오 스타로서 느낌이 어떠세요?
나는 라디오 드라마 연기자니까 그 중에서 드라마 부분만 얘기한다면, 라디오는 오락 쪽으로 가면 TV를 절대로 이길 수 없어요. TV는 예쁜 그림이 나오는데 듣는 것만 가지고는 이길 수 없거든요. 옛날에 워크맨이니 트랜지스터니 다 갖고 있었는데 엿장수한테 다 갖다 줬잖아요. 라디오 기기를 없앤 이유에 대해서 학술적인 이론들이 많이 있지만 나는 연기자로서 나름의 이론이 있어요.
라디오는 청각으로 듣는 거니까 보는 것보다 예술성이 깊어요. 그런데 요즘은 라디오만의 깊은 맛이 있는 여백의 특성을 무시하고 오락기능으로 넘어가 버렸어요. 라디오는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깊은 쪽으로 흘러가야 해요. 라디오의 소리의 세계는 예술의 세계에요.
예를 들어서 TV에 예쁜 여자가 나오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라디오는 어느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와도 각자 상상해서 주인공을 그리잖아요. 예쁜 스타일을 자기가 만드는 거예요. 하지만 유행이나 오락기능만 따라다니다 보면 자기함정에 빠져버려요.
옛날에 식모가 라디오를 많이 듣는다고 해서 한때 식모 드라마를 만들었고 여고생이 많이 듣는다고 해서 여고생 드라마를 만든 적도 있고 또 반공드라마가 유행이었을 때는 간첩이 27명이나 됐었어요. 반공드라마가 27개였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진실성이나 깊이가 떨어지고 결국 대중들이 등을 외면하기 시작했던 거죠.
나는 라디오의 세계, 소리의 세계에 미친 사람이에요. 라디오 연기자라면 꽁꽁 숨어서 소리만을 추구하는 그룹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안 듣더라도 거기에서 정말로 배울 게 있고 깊은 맛이 있다면 마니아는 저절로 생깁니다. 이건 독일에서도 입증이 된 거예요. 지금도 독일은 라디오 드라마가 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라디오가 좀 더 문학적으로, 사회비판적으로 간다면 지금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