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가 갑자기 배우 생활을 접고 캐나다로 떠났는데요. 그는 13년 동안 외국 생활을 하며, 막노동도 하고 식당에서 접시도 닦고 또 청소도 하며 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는군요. 그러다 2000년 이승현 씨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대중들의 무관심과 사업 실패로 더 큰 상처를 받고 자살 위기까지 겪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얄개 이승현 씨는 여기서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또다시 우리 앞에 설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연기자와 가수로 곧 복귀할 반가운 얼굴, 얄개 이승현 씨를 2월 29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잘 될거야’라는 노래와 함께 다시 돌아온 우리들의 얄개
▶ 얼굴에 조금 살만 쪘지, 예전에 싱그러운 웃음, 목소리는 그대로네요.
얼굴에는 살이 좀 쪄서 많이 변했는데, 제 주변에 계신 분들이 목소리를 듣고 많이 알아보세요. 목소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화에서 나왔던 목소리나 똑같다고 하세요. 저는 어릴 때부터 성우선생님이 안 하시고 아역 때부터 제가 직접 다 녹음을 했거든요. 그래서 목소리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 이승현 씨 복귀를 기다린 팬들이 그렇게 많다고 하던데요.
저를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으신 것 같아요. 제가 외국에 오랫동안 나가 있어서 한동안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떠나 있었어요. 그래서 ‘요즘 이승현이 뭐하나? 어디에 가있나?’하고 많은 팬 여러분들이나 7080세대 여러분들, 교복세대 분들이 저를 많이 찾고 계신 것 같아요. 지금 팬카페에도 4천여분 정도 회원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 오히려 팬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 이승현 씨가 긴장을 하겠어요?
그렇죠. 책임 때문에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이번에 노래 음반도 내게 되었거든요. 노래 제목대로 ‘잘될거야’, 정말 잘 돼야 하는데 항상 마음속으로 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사랑과 격려로 저를 많이 아껴주셨던 우리 팬카페 회원은 물론이고, 주위의 많은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제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서 이 노래를 준비 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제 어깨가 너무나 무겁습니다. 잘 될 겁니다.(웃음)
▶ 요즘 데뷔로 바쁘신 것 같아요. 음반은 다 만들어진 건가요?
네. 음반은 다 준비되었고요. 앞으로 방송활동도 많이 해야 하고, 노래 연습도 지금 계속 하고 있고, 요즘은 안무도 같이 배우고 있습니다.
▶ 요즘은 안무를 더 잘해야 하는 것 같더라고요.
율동을 같이 해보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노래만 하는 것도 사실 쉬운 것은 아닌데, 거기에 안무까지 하려니까 정말 힘들어요.
▶ 몸도 열심히 만들고 있다고요?
예. 헬스 다니고, 연예인 축구단에 나가서 공도 차고요. 제 몸 가꾸기를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얼굴 피부도 많이 좋아졌고요. 제가 캐나다에 가면서부터 정말 힘든 일을 많이 해서 얼굴이 굉장히 많이 그을렸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몸과 얼굴, 목소리를 많이 가꿔서 모든 것을 여러분들에게 제대로 보여드리려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가수 데뷔는 좀 의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예전에 ‘거꾸리와 장다리’ 주제곡을 직접 부르셨다면서요?
예전에 ‘고교 거꾸리군 장다리군’이라는 하이틴 영화에서 꼬마신랑 김정훈 씨와 같이 주연을 했어요. 정훈이 그 친구가 거꾸리를 했고, 제가 김정훈씨보다 약간 키가 크기 때문에 장다리 역할을 했어요. 그래서 그 영화 주제가를 김정훈씨와 제가 공동으로 불렀습니다.
▶ 그 때 경험이 있다고 해도, 가수에 도전하는 것이 만만한 것은 아닐텐데요.
저도 제대로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노래 음반 제작을 하면서 가수분들이 음반을 낸다는 것이 정말 만만치 않은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어려움을 제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 어머니 친구분 댁에 갔다가 감독님 눈에 띄어…여섯 살 때부터 연기 시작
▶ 처음에는 어떻게 해서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나요?
제가 여섯 살 때 데뷔를 했습니다. 영화 ‘육체의 길’이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했거든요.
▶ ‘육체의 길’이면, 김지미 선생님 나왔던 영화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허장강 선생님, 김승호 선생님, 김지미 선생님이 주연이셨죠. 제가 그 때 영화에서 김승호 선생님의 오줌싸개 막내아들 역할을 했습니다.(웃음)
▶ 그 당시 아역배우로 누가 있었나요?
저하고, 저보다 1년 먼저 데뷔한 꼬마신랑 김정훈 씨가 있었죠. 그 때는 아역 배우가 많지 않아서 김정훈, 이승현이 거의 다 했었고요. 저희 위로는 안성기 선배님, 전영선 씨, 지금 탤런트 생활 하시는 김천만 씨, 김용만 씨 등이 저보다 선배님들이시죠.
▶ 어떻게 아역 배우가 된 건가요?
그 때 충무로에서 저희 어머니 친구분이 숙박업을 하고 계셨어요. 그 여관에 감독님, 작가님들이 장기투숙을 하시면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셨어요. 그래서 그 때 조긍하 감독님이 ‘육체의 길’ 시나리오 작업을 그 여관에서 다 하셨는데, 저희 어머니와 제가 어머니 친구분을 만나러 그 여관을 매일 들락날락 하니까 감독님 눈에 띄인 거예요.
제가 여섯 살 때였는데 누가 한 번 춤 춰보라고 하면 춤도 추고, 말도 잘 듣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조긍하 감독님이 여관 주인인 저희 어머니 친구분을 보고 “저놈은 누구예요? 내 방으로 한 번 데려와 봐요.”라고 하셔서 우리 어머니와 같이 간 거예요. 어머니와 같이 감독님 방에 가서 인사했더니, 그 분이 “내가 영화감독인데, 이번에 하는 ‘육체의 길’영화에 여섯 살 짜리 까불거리는 막내아들 역할이 필요한데, 당신 아들이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제의를 하셔서 그 때부터 제가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죠.
▶ 처음 영화 촬영하던 날은 어땠나요?
그 때는 여섯 살 때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너 울어.”하면 울고, “너 웃어.” 하면 웃고 말이죠. 정말 친손자처럼 잘해주셨어요.
▶ 물론 데뷔가 성공적이었던 거죠?
‘육체의 길’이라는 작품은 아시는 분들은 거의 다 아시고요. 감독님이 워낙 한국 영화계의 거장이시고, 훌륭한 작품이었죠.
▶ 그러다가 ‘얄개 시리즈’를 맡은 것은 언제부터 인가요?
1977년도에 제가 주연을 한 ‘고교 얄개’라는 작품이 개봉되었죠. 그 때가 제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막 올라가던 사이에 했던 작품입니다.
▶ 그 때 인기는 어땠나요?
그 때 학생들한테 정말 팬레터도 많이 오고, 집에까지도 많이 찾아오셨어요.
▶ 그 때는 ‘아이돌 스타’가 없던 시절 아닌가요?
그 때는 없었죠. 그 때 당시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어디 갈 만한 곳이 없었어요. 그 때는 여학생과 미팅하고 만나는 곳도 오로지 빵집 아니면 분식집이었죠.
▶ 고등학생 신분으로 주연까지 할 정도였으면, 개런티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 때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지금과 비교한다면 정말 게임이 안 되죠. 제가 한 번도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요. 제가 ‘고교얄개’라는 작품을 할 때 1백만 원을 받았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해 보면 어마어마한 돈이었죠. 그 때는 제가 학생이어서 돈관리를 안 하고, 매니저분과 어머니가 하셨는데요. 그 때 돈 1백만 원이면 어지간한 단독주택 한 채 구입할 정도라고 하시더라고요.
▶ 그 때 같이 나왔던 분들이 누가 계시죠?
김정훈 씨, 저와 얄개영화에서 여학생 파트너 역할을 많이 했던 강주희 씨가 있죠. 강주희 씨는 지금 미국에 이민가서 시카고에서 살고 있어요. 얼마 전에도 통화를 했죠.
▶ 그 때 얄개 영화들이 흥행도 아주 잘됐었죠?
그 당시 한국영화가 굉장히 흥행이 침체된 상태였거든요. 3만, 5만만 들어도 히트라고 할 수 있었는데, 더군다나 성인 영화도 그렇게 들기가 어려운데, 그 침체 속에서 아주 순수하고 발랄한 ‘얄개전’이 정말 아주 대박이 났었죠. 그 때 당시 관객이 27만이 넘었습니다. 어른들은 십 분의 일도 안 보시고, 전부다 학생들이었죠. 개봉하는 날 극장에 가보니까 줄을 섰는데, 무슨 개미떼가 움직이는 것 같이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했었죠. 정말 그 때 당시는 대단했었죠.
▶ ‘얄개 시리즈’가 몇 편까지 나왔었죠?
약 20여편 정도의 하이틴 영화가 제작되었죠.
▶ 그렇게 영화도 잘 되었었는데, 갑자기 캐나다로 간 것은 언제인가요?
1986년도에 캐나다로 제가 조용히 갔죠. 9년 동안 연기 생활을 계속하다가 1986년 초에 제가 캐나다로 갔습니다.
◇ 아역출신 배우로 겪는 성장통, 어머니의 사업 실패…혼자 캐나다 유학길에 올라
제가 어릴 때부터 저희 어머니가 배우 생활 그만하고 공부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저희 어머님이 그 당시에 음식업 사업을 서울 시내 몇 군데에서 크게 하셨고, 저는 계속 연기하면서 방송국을 왔다갔다 했었는데, 어머니 사업이 실패하면서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도 그 때 활동이 그렇게 활발하지 못했고요. 드라마 하나 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고요. 그래서 이렇게 할 바에는 차라리 외국에 가자고 했는데, 캐나다에서 그렇게 오래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 한 캐릭터로 오래 남아 있다보니까 어떤 변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건가요?
변신이 필요하다는 것보다는요. 물론 저는 얄개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까 아직도 나이가 스물 살, 서른 살이 넘어도 사람들이 볼 때는 ‘이승현은 얄개다, 아직 어리다, 젊다’라고 생각하셔서, 저는 예전에 서른 살 넘었는데도 미성년자 취급받을 때가 정말 많았어요. 그래서 물론 변신이 필요하죠. 그리고 아역배우들은 과도기가 정말 힘들죠.
안성기 선배님 같은 경우도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작품 등에서 아역을 하시다가 완전히 연예계를 끊으셨잖아요. 그 이후에 대학졸업하고 군대 다녀와서 완전 성인이 된 이후에 다시 하시니까 사람들 기억속에서는 ‘안성기’라는 이름이 완전히 잊혀졌다가 새롭게 나오니까 성인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찾아서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저나 다른 아역배우 출신들은 아역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고비가 굉장히 힘들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것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 때 당시에 얄개영화가 히트하기도 했지만, 하이틴 영화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나라가 정치적으로 격동기였기 때문에 정말 딱 끊어져 버린거죠. 그리고 다시 하려고 하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 캐나다로 떠난 뒤에 소문도 무성해서 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겠어요.
저는 언론에 전혀 안 알리고 어머니와 저밖에 모르게 정말 조용히 갔어요. 남에게 알릴만한 사정이 아니다 보니까 그냥 조용히 간 거죠.
▶ 어머니 이야기는 많은데, 아버님 이야기는 한 번도 없으세요.
아버님도 계시죠. 그 때는 아버님과 제가 같이 안 살았어요. 하여튼 여러 가지로 어머니 사업 실패와 제 일로 인해서, 그 때는 저도 어린 나이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스물다섯에 대학 마치고 갔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 캐나다에 가서도 고생의 시작이었다면서요?
캐나다에는 일가친척 하나도 없고 제게 소개해주신 분, 한 분만 믿고 캐나다에 가방 하나 메고 갔어요. 그런데 그 분마저도 제가 가자마자 얼마 안 계시다가 비행기 안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연세가 좀 있으신 분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저는 누구 하나 상의할 분도 안 계시게 되었죠. 캐나다에 간 것은 말은 유학이지만, 사실 영어공부하러 간 것인데, 그 분도 돌아가시고, 정말 운이 안 따르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캐나다에 가니까 먹고 살 일이 캄캄하더라고요. 돈도 가져간 것도 별로 없고, 어머니가 그렇게 되셔서 서울의 집과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지방에 내려가셔서 살게 되셨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어머니께 용돈 좀 보내달라는 말을 꺼낼래야 꺼낼 수가 없었죠.
제가 형제들이나 많고 했다면 어머니를 맡겨놓고 걱정을 덜 했을 텐데, 제가 2대 독자로 형제가 아무도 없어요. 혼자 자라다보니까 어머니가 정말 “배우 그만 해라. 그렇게 힘든 일을 뭐가 좋다고 그렇게 하려고 하느냐?”하고 많이 말리셨죠.
▶ 그럼 어머니는 어떤 직업을 갖기를 원하신 건가요?
어머니는 저에게 의사 되라고 하셨어요. 예전 부모님들은 다 그러셨잖아요. 그런데 캐나다에서 사정이 그렇게 되다보니까 저도 머리가 많이 아프더라고요.
▶ 그래도 교민들이 “이승현이 왔다”고 해서 많이 도와주시기도 하셨다면서요.
도와주시는 분들도 사실 몇 분 계셨어요. 그런데 서로가 워낙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까 한국 사람을 만나기도 그렇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리고 워낙 교민사회가 굉장히 힘들고 어렵고 각박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만나면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저를 보면 “한국에서 놀러왔느냐? 촬영 있어서 왔느냐?” 하고 처음에는 그렇게 물어보시죠. 제 입장과 사정을 그 분들이 모르시니까요.
제가 처음에는 토론토에 갔는데요. 그 곳에는 한인 신문들이 많거든요. 제가 신문에도 ‘얄개 이승현이 캐나다 토론토에 왔다’고 해서 크게 기사가 났었어요. 그렇게 기사가 나가다 보니까 아시는 분들은 저를 보고 “고생스럽게 왜 여기에 와서 이렇게 힘들게 지내?” 하셨는데, 저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어요.
▶ 먹고사는 문제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래서 영화학교도 다니다가 나중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크니까 못 다니게 되었죠. 그래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이민자가 아니고 유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어디 가서 떳떳하게 일을 못하죠. 그래서 쉬쉬하면서 한국분들 가게에서 야채도 다듬고 계산업무도 하고, 무도 썰고, 감자 껍질도 벗기는 잡일을 많이 했죠.
한국에서는 어머니가 굉장히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손을 벌릴 수도 없어서 정말 저혼자 여기 저기 많이 돌아다녔습니다.정말 어떤 때는 제가 방세를 못내서 공원에서 잘 때도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인데, 캐나다에 있는 동안 안 좋았던 일을 제가 많이 경험하고 깨달았습니다.
▶ 그 어려운 생활 가운데 깨달음도 있었다고요.
한국에서는 집이 있고, 하루 세 끼 먹는 걱정도 없이 편하게 살았죠. 그런데 제가 한국에서 ‘얄개전’으로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고 그냥 무명시절같이 어설프게 보냈다면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런데 한국에서 이름도 날리고, 아역 때부터 연기에 발을 들여서 십 년 가까이 연기를 하면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해왔는데, 상황이 안 좋아서 외국에 나가서 한국에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잡일을 하며 고생을 하고, 공원에서도 자보고 했다는 것은 제가 생각해도 참 비참한 일이죠.
◇ 캐나다에서 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필리핀에서는 선교사의 길을 걷기도
▶ 캐나다에서 필리핀으로 간 것은 어떤 계기인가요?
제가 캐나다에서 8년 동안 있다가 한국에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캐나다에 있을 때 필리핀으로 들어가셨고요. 어머니가 먼저 들어가시고, 제가 1994년도에 필리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때부터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고, 선교 훈련도 받았고요. 어머니가 한국에서 사업실패하고 지방에서 사시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거예요.
저는 예전에는 하나님의 ‘하’자도 몰랐는데, 필리핀에 들어가면서 어머니가 저에게 “선교사가 되는 것이 어떻겠니?”라는 제안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 연예인 1호로 선교사가 되었다고 한국 언론에 크게 나왔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의 일이 너무 힘들고 배우가 되는 길 이상으로 너무 고단한 길인데, 필리핀에 들어가면서 선교에 대한 많은 비전과 꿈을 보고 많이 배워 왔습니다.
▶ 1994년도부터 해서 필리핀에는 몇 년간 계셨나요?
필리핀에 제가 3년 정도 있었고요. 다시 어머니와 같이 한국으로 나왔다가 영국에 또 들어가서 1년 이상 있다가 나왔습니다.
▶ 영국에서는 어떤 일을 한 건가요?
영국에서는 영화의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영국에 들어가시는 바람에 저도 같이 와이프와 같이 들어가게 된 거죠.
▶ 그 때는 이미 가족들도 있었군요?
그 때 막 아기가 백일 전이었어요. 그래서 책임감이 더 컸었죠.
▶ 완전히 한국으로 나온 것은 언제인가요?
1998년도에 나왔습니다.
▶ 와보니까 어떻든가요?
와보니까 너무 많이 변했죠. 충무로에 나가봐도 너무 많이 변했고, 그 때 당시 저와 같이 하던 많은 감독님이나 방송국 분들이 다 바뀌셔서 정말 문 앞에 가기가 미안할 정도로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 12년의 공백이 그렇게 엄청나게 느껴지셨나요?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정말 신인입니다. 옛날 것은 다 필요없고, 과거의 것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요. 다 잊고 정말 이번에 ‘잘될거야’라는 노래로 신인이 갖는 마음자세로 시작하는 것이고요. 외국생활을 그렇게 오래 하고 나와서 다시 영화와 연기를 다시 하려고 저 혼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되더라고요.
▶ 영화사를 만드신 적도 있으시다면서요?
연기하는 제 후배와 같이 영화사를 만들어서 영화제작 쪽에 관심을 두었었죠. 저도 영화하는 사람이니까 물론 영화감독을 하는 것이 꿈이었죠. 지금도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언젠가는 팬들 여러분께 영화감독으로서 한 번 보답하고 싶습니다.
▶ 영화사 일을 하시면서 상처를 받고 했던 것은 어떤 일인가요?
‘대한영화사’라고 제 후배와 같이 만들었는데, 그 회사는 서울이 아니고 지방인 아산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산시와 얘기가 되어서 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해서 시나리오도 다 나왔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는데, 결국은 무산되었죠. 이런 말씀을 드리면 좀 그런데요. 사람한테 이용을 당했다고 할까요? 그런 일들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참 여러 가지로 믿었던 사람이 앞에서는 안 그런데 돌아서면 사람 마음이 달라지고 하다 보니까, 배우들이나 연예인들은 사람들한테 많이 이용당하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더라고요. 그런 것이 참 안타까워요. 그래서 정말 그 때는 더 이상 나는 살 수 있는 용기를 다 잃었습니다.
그래서 제 후배랑 저랑 한강 고수부지에 갔었어요. 그 때 정말 ‘배우고 뭐고, 얄개 이승현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 이렇게 내가 외국생활을 오래 하고 다시 왔는데 암만 시대가 많이 바뀌고 세월이 흘렀지만, 너무 하다, 빼먹을 것이 없어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배도 영화 데뷔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거든요. 그러니 그 후배한테는 영화계 대선배인 제가 같이 영화사를 하는 입장에서 제가 참 창피하더라고요. 제가 오히려 크게 도와줘야 하는 입장인데, 그 후배가 오히려 격려의 말을 많이 해주고 정말 서로 아픔과 상처를 같이 극복해 가면서 ‘대한 영화사’라는 것을 하려고 준비도 다 했는데, 마지막에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용을 당하고 나니까 완전히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았죠.
내가 왜 이럴까 하고 내 자신조차도 그렇게 변해 있더라고요. 그런 쓰라린 상처가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한강 고수부지에 후배와 같이 차를 타고 면도칼을 손에 들고 갔었어요.
◇ 죽음까지도 생각했던 지난날…이제는 신인의 입장에서 다시 도전하고 싶어
▶ 어릴 때부터 영화를 해서 스타 의식도 있고 해서, 유약하거나 자신의 의지가 부족했던 점도 혹시 있지는 않았을까요?
제가 그런 의지가 좀 약했어요. 제가 마음이 여리고 약하다보니까 사람들에게 직설적이지 못하고 안 좋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저 혼자 그냥 삼키고 말아요. 제가 형제가 없다 보니까 저는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알고는 있지만 정말 제 속마음을 진지하게 털어놓고 같이 제 인생, 제 진로에 대해서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열 명중에 한 명이 될까말까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한강에 가서 그렇게까지 할 때는 제 마음인들 편했겠습니까?
▶ 그런 과정에 분식점도 하고, 사업도 하셨는데, 어떻게 하는 것마다 잘 안되셨어요?
만두는 그래도 잘 되었습니다. ‘얄개 만두’라고 해서 대전에서 만두집도 했었어요.(웃음) 영국서 아내와 아들과 나와서 대전에서 몇 년 살았었거든요.
▶ 사업 실패하고 난 뒤에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많았을 것 같아요.
얼굴을 못 들죠. 와이프에게 정말 얼굴을 못 들고, 속상하게만 만들었죠. 제가 집사람 속을 많이 썩였죠.
▶ 부인과는 어떻게 만났나요?
필리핀에서 만났어요. 저희 집사람이 필리핀에 영어공부 하러 왔다가 그 때 인연이 되었고, 목사님이 중매를 해주셨어요. 그 때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만나서 한국에 나와서 바로 결혼을 했죠.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 것이 있으신가요?
‘잘될거야’라는 노래를 시작으로 해서 앞으로 드라마를 해야죠. 저는 아무래도 가수보다는 배우이니까요. 노래는 아무래도 기성 가수와는 틀리기 때문에 앞으로 여러분들이 ‘잘될거야’라는 노래를 많이 사랑해 주시고, 정말 잘 된다면 2탄도 할 수 있는 희망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저는 시트콤을 꼭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 체질에 맞는 드라마 같아요. 물론 정극과 사극도 다 해야 하지만, 정말 한 번 시트콤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뮤지컬도 계획이 잡혀 있는 것 같아요. 올해는 우선 노래가 잘 되어야 이승현이도 잘 되는 거죠.(웃음)
▶ 요즘 날로 변화하는 한국영화를 대스타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가요?
많이 좋아졌죠. 제가 어릴 때 할 때와 비교하면 정말 모든 시스템 자체도 많이 달라졌고요. 제가 중간에도 영화를 두 세편 정도 했었어요. 간단한 역할이나 특별출연도 했었는데요. 이제는 제가 촬영장에 나가면 주눅이 들고 기분이 이상해요. 제가 있던 바닥인데,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하고요.
대신에 또 카메라 앞에 서면 저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그런 의식을 절대 안 하거든요. 카메라 앞에 서면 내 역할, 내 연기에 몰입하고 연습하는 것이 배우의 기본이죠. 그런데 요즘 한국 영화들이 정말 많이 좋아졌고 편하고요. 옛날에는 정말 많이 고생했죠. 옛날 충무로에서 영화할 때는 저나 선배님들이 밤새고 난 뒤에 또 녹음실 가서 녹음도 해야 하고요. 세트장에서 며칠밤을 새면서 했는지 몰라요. 지금이야 세트장이 얼마나 좋은 곳이 많습니까? 다 출퇴근 하다시피 하는데, 그 때는 참 힘들었죠.
▶ 지나온 삶에 대해서 어느덧 사십대 중반이 된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하네요.
지금까지는 어려움과 힘든 점이 많았고, 전에 연예계에서 이름도 날렸고, 또 가정적으로 제가 잘 했던 것도 있지만 못했던 점이 더 많았고요. 저는 다른 것은 없어요. 저는 외국에 나가서 다른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제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배우다, 배우였다’ 하는 것을 꽂고 다녔습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안 될 때는 ‘나는 언젠가는 나이가 들어서라도 한국에 나가서 배우를 다시 할 것이다.’ 하는 생각이 항상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누가 봐서는 아직도 위축이 되어 있는 표정이랄까 얼굴이지만, 저는 이제 굉장히 당당해요.정말 노래가사처럼 분명히 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앞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산적해 있지만, 이제는 벼랑끝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제가 정상에 서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나중에 보니까 정상에 서 있는 것은 저 혼자더라고요.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까 정상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낭떠러지에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그런 마음과 자세로 정말 이번을 계기로 해서 저 얄개 이승현은 거듭 태어난다, 신인이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다시 태어난다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마음과 각오가 되어 있고요.
그래서 정말 여러분들에게 마음의 빚도 갚고 여러 가지로 앞으로 여러분들께 한발짝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여러분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여러분 곁에 더 많이 다가가서 여러분의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더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 과거에 힘들었던 고난의 시간이 앞으로 연기자나 예능인이 되는데 큰 자산이 될 것 같아요.
큰 공부죠. 사람이 성공하려면 그런 밑바닥을 알아야 남을 더 많이 배려할 수 있고, ‘저 사람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제가 그런 것을 몰랐다면 ‘왜 저렇게 살아? 왜 저렇게 길거리에서 자고,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어?’하고 굉장히 교만했을 겁니다. 그런데 제 자신이 캐나다에 가서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제 저는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자신이 생겼습니다.
▶ 정말 잘 되실 겁니다. 이승현 씨가 가수로서 야심차게 준비하신 노래, ‘잘될거야’를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