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열 "김재박은 제 약점인 모자만 건드렸죠"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설특집 '추억의 스포츠 스타' - 야구 김우열

구부정한 타격자세에 트레이드 마크인 구레나룻 수염…. 이쯤되면 프로야구 원년멤버 OB베어스의 김우열 선수를 금방 떠올리실 텐데요.

'실업야구 마지막 홈런왕'으로 잘 알려진 김우열 선수는 굵직한 홈런포로 소속팀 OB베어스의 우승에 기여했는데요. 특히 그의 홈런은 “새카맣게 날아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덩치 큰 선배보다 멀리 날아갔다고 그럽니다.

4년간 OB베어스에서 뛰다가 빙그레로 옮긴 그는 진해 스프링캠프 때 무릎 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을 당하고 결국 그 해 말 선수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어린이팬들 때문에 프로가 살았고 내가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김우열 선수.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그 구레나룻은 여전한 지 2월 8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경기를 앞두고는 수염을 깎지 않던 징크스

▶ 아니, 수염은 어디다 두고 오셨나요?

목욕탕에 가서 좀 깎고 왔습니다. 오늘은 좀 단정하게 나왔습니다.(웃음)

▶ 요즘은 개성시대라서 젊은 사람들도 많이 수염을 기르는데, 그 때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죠?

네. 그 때는 제가 유난히 털이 많았었어요. 그래서 야구를 하면서 머리를 안 깎는다는 징크스가 있어서 그냥 안 깎다보니 수염이 그렇게 많이 자라고 했었죠.

▶ 제가 ‘추억의 스포츠 스타’라고 소개하니까 좀 섭섭하지는 않으셨나요?

예. 그렇습니다. 지금도 항상 야구장에 가있는 기분이고, 지금도 제가 야구를 끝냈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드네요. 이제는 좀 야구를 잊어야 되는데, 지금도 꿈에 자꾸만 나타나고 그러네요.

▶ 지금은 어떤 일을 하시는 건가요?

지금 제가 여러 가지를 하고 있습니다. 양평에서 어린이 리틀야구단도 운영하고 있고, 제가 골프를 좋아하기 때문에 일산에 골프연습장을 하나 만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골프 대표선수도 가르치고 있고요.

▶ 스윙폼이 비슷해서 야구선수들이 골프도 잘 한다고 하던데요.

네.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아마추어 대표선수인 신다빈, 이경훈 선수들을 한 번 가르쳤어요. 왜냐하면 스피드나 파워, 타이밍 면에서 야구와 많이 비슷하더라고요. 그랬더니 그 선수들의 아버님들이 “김우열이를 잡자.”라고 하셔서, 나중에는 한 1년간 가르쳐 봤어요. 그랬더니 금방 대표선수가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제가 골프연습장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린이 야구도 가르치고, 골프도 가르치고요. 골프도 동그란 공을 가지고 하는 것인데, 제가 동그란 공으로 하는 것에는 좀 자신이 있는 것 같아요.(웃음)

▶ 골프는 에버리지가 몇 타 정도 되시는 건가요?

70후반 정도 됩니다.

▶ 프로야구 OB베어스의 원년 멤버이셨는데요. 체구가 작은 약점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4번타자를 할 수 있었나요?

남보다 펀치력을 많이 길렀고요. 옛날에 기라성 같은 박영길 감독, 김응룡 감독,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현식 감독 등은 체구가 굉장히 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선수들 보다 제가 치면 공이 더 멀리 날아가서, 감독님들이나 여러 팬들이 저 조그만 체격에서 어떻게 장타가 나오느냐고 칭찬해주셔서 그 덕에 인기가 있었죠.

▶ 1982년 원년에 OB베어스가 우승을 했을 때, 몇 승 몇 패로 우승했는지 기억하세요?

그 때 게임 수가 80게임이 조금 넘었어요. 그 때는 지금보다 많지 않았었죠. 저희가 전반기 우승을 하고, 후반기에는 삼성이 우승했죠. 그래서 코리안 시리즈에서 삼성과 OB베어스가 맞붙어서 우리가 우승을 했죠.

▶ 4차전에서 4:0으로 지고 있다가 4회에 김우열 선수의 솔로 홈런으로 추격해서 7회에는 동점 상황이 되었는데, 그 때 기억나시죠?

네. 기억납니다. 그 때 투수가 황기봉 투수였는데, 제가 홈런을 치고, 7회 상황에서 제가 친 것이 어떻게 잘못 빗맞았는데, 그것이 하늘이 돌봐주었는지 수비수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것을 놓쳤어요. 그것 때문에 역전을 해서 우리가 우승하는 동기가 되었죠.

▶ 야구를 하시다보면 하늘이 도와주는 경우도 많은가요?

아주 많아요. 돌아가신 저희 부모님이 기독교 교인이셨는데, 제가 경기할 때 화장실을 가면 꼭 “하나님, 제가 몇 구에 쳤으면 좋겠습니까? 원 스트라이크 투 볼에 치면 좋겠습니까?” 하면서 기도를 했는데요. 그런 것이 미신은 아니지만 저는 믿게 되더라고요. 그런 일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수염도 안 깎고 머리도 안 깎고 나가던 일이 많았죠.

▶ 다른 곳도 아니고 왜 하필 화장실에 가서 그러셨나요?

조용한 곳을 찾아가서 제가 기도를 하는 거죠. 제가 교회를 조금 나갔어요. 조용하게 생각할 일이 있을 때 화장실에 많이 가잖아요. 그래서 저도 조용한 화장실에 가서 기도를 했죠. 또, 머리를 깎지 않는다든지 구두를 안 닦는다든지 하는 것은 미신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재수가 없을까봐 싶어서 지켰죠. 아무래도 실력이 우선이겠지만 재수도 조금 따라주는 것 같더라고요.

▶ “저는 몇 구에 때리면 될까요?”라고 자세하게 기원하시는 줄은 몰랐는데요.

아무래도 원 스트라이크를 받고 쳐야 하는지 그냥 쳐야 하는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니까요. 야구도 신경전이거든요.

▶ 역시 운동선수도 머리가 상당히 좋아야 하는 거죠?

그럼요. 코치 싸인도 봐야 하고, 직구가 들어올지 커브가 들어올지 모르니까 투수와의 싸움도 해야지, 타석 하나 들어서면 머리가 몇 개 있어도 모자랄 정도예요.

실업팀 은퇴 후 직장생활, 프로야구 입단 제의에 처음엔 고민도 많이 해

▶ 원년 우승의 감동은 정말 대단한 거였죠?

OB베어스팀이 처음 창단하면서 선수들을 뽑을 때 너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뽑았어요. 윤동균 선수라든지 박철순 선수가 나이가 많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가지고 우승할 수 있나, 최하위팀이 되는 것이 아닌가 했었죠. 그런데 우리들은 생각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이 게임을 운영하는데는 구력이 필요하거든요. 젊은 선수로는 안되죠. 그래서 세 박자가 맞는 것이 젊은 선수, 중간 선수, 노장 선수, 이 세 가지 박자가 맞아야 팀웤이 되는 것이지, 젊은 선수로만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 그 당시 프로야구에 대한 국민들의 인기가 대단했었죠?

네. 구기종목 중에서는 프로야구가 처음 출범했어요. 축구는 그 다음에 되었고, 야구가 먼저 되었죠. 그런데 야구가 과연 프로가 될지 궁금했었는데, 막상 프로야구가 생기다 보니까 어린이 팬들이 많이 생겼어요. 스포츠는 어린이 팬들이 없으면 아마 운영이 안될 겁니다.

그 당시 어린이 팬들이 대단했었어요. 제가 외야수를 봤었는데, 제가 외야수 자리에 나가 있으면 스탠드에서 어린이 팬들이 응원을 많이 했었는데요. 그렇게 어린이들이 야구를 좋아하니까 부모들도 많이 좋아하게 되었죠. 그래서 정말 그 인기가 대단했었어요.

▶ 윤동균 선수는 지금 어떻게 지내나요?

지금 KBO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 박철순 선수가 그 때 22연승을 했었는데, 이것이 가능한 건가요?

그 당시에 허리가 좀 아팠었는데, 제가 볼 때는 삼성전에서 번트 수비를 하다가 허리를 다친 것 같아요. 그 때 박철순 선수가 22연승을 하기까지는 그 밑에 있는 동료들이 많이 도와주었죠. 사실 스타라는 것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옆에서 도와주고 운도 따라주어야 하는 것 같아요. 박철순 선수도 대단한 선수지만 밑에서 다른 선수들이 받쳐 주었기 때문에 그만한 대기록을 세우게 되었죠.

▶ 당시에 김우열 선수 나이가 서른셋이었나요?

예. 서른셋에 처음 프로야구가 시작됐습니다.

▶ 처음 프로야구에 참여할 때 갈등이나 고민은 없으셨나요?

많았죠. 처음에는 진짜 프로야구 생긴다고 신문에 나고 할 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도 많이하고 술도 마시기도 했는데, 그 때 마음은 반반이었어요. 저는 처음에 프로야구에 안 가려고 했었어요. 그 때 당시에 저는 은행 대리였거든요.

저는 서른셋의 나이에 프로야구에서 뛴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었는데, 후배들이나 KBO 임원들이 “김우열, 네가 모범이 돼봐라.”라고 해서 고민을 하다가, ‘그래,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했으니까 후배들, 선배들 위해서 내가 모범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제가 첫 1호로 가서 프로야구에 가겠다는 싸인을 했어요.

▶ 은행에 계시다가 프로야구를 시작하면서 야구인생에 있어 달라진 점이 있으신가요?

야구 마무리를 멋있게 하고 끝냈다면 제가 후회가 없을 텐데, 마지막에 다치게 되고 그만둔 것이 아쉬운데, 프로야구에 내가 잘 들어왔느냐 못 들어왔느냐는 제가 볼 때는 역시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프로야구에 발을 들여놓음으로 해서 이만큼 프로야구가 커 나갈 수 있고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후회는 없습니다.

▶ 특히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신 것으로도 유명한데, 여성팬들 때문에 그러셨던 건가요?

제가 옛날에는 ‘제가 나오면 신성일씨가 죽는다.’는 이야기도 좀 들었는데요.(웃음) 제 얼굴이 그 때 당시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체구도 작고 홈런도 많이 치고 하니까 팬들도 많고 젊었을 때는 좀 괜찮았습니다.(웃음)

▶ 외모의 어떤 면을 신경쓰신 건가요?

TV에 나오게 되면 일단 목욕탕에 가서 깨끗하게 씻습니다. 왜냐하면 브라운관에 잘 나와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 당시에 에피소드도 많았어요. 감독들이 중계만 하면 제가 잘 못한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다 이유가 있어요.

▶ TV중계가 있으면, 초구를 안 쳤다면서요?

예. 초구쳐서 안타치면 뭐 합니까? 브라운관에 계속 나와야죠. 그래서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까지 끌죠. 그러면 해설자나 아나운서들이 제 이야기를 많이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제가 화면에 비쳐지는 시간이 많은 거죠. 그렇기 때문에 감독이 초구는 안 치고, 투 스트라이크까지 끌고 나간다고 많이 속상해 하는 경우가 있었죠.

▶ TV를 상당히 의식하셨던 거네요?

글쎄요. 아무래도 그 때만 해도 ‘4번 타자, 김우열’하면 팬들한테 인기가 좀 있었거든요. 저는 프로야구 때부터 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아마추어 때도 팬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조그마한 체격에 홈런기록도 다 가지고 있고, 그런 것들이 프로에까지 연장이 된 거죠. 그래서 선수들이 아무래도 TV중계가 있을 때는 더 신경을 많이 썼죠.

▶ 우익수 수비 때 안타 타구를 쫓지 않고 바람에 날린 모자를 먼저 따라간 엽기 수비는 정말 해외토픽감인데요?

(웃음) 그 이야기는 계속 남아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그 때 대구에서 삼성과 시합을 하는데 제가 우익수를 보고 있었어요. 공이 우익수 쪽으로 날라왔는데, 그 순간 바람이 불어서 뛰는 동안 모자가 벗겨지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머리가 좀 멋있게 벗겨졌었어요.(웃음) 그래서 주자가 막 뛰어가는 상황이고 공을 주워야 하는데, 제가 모자를 먼저 줍고 그 다음에 공을 주웠어요. 그것이 TV 하이라이트에 나왔어요. 그래서 김영덕 감독이 “야, 쟤 벌금 때려.” 라고 해서 벌금을 문 적도 있고요. 또 김재박 감독과의 에피소드도 많았었어요.

▶ 김재박 감독이 김우열 선수 모자를 자주 건드렸다는 건 어떤 얘기인가요?

주자가 1루에서 2루로 도루하게 되면 몸을 터치해야 하는데, 김재박 감독은 꼭 제 모자를 벗기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머리숱이 별로 없으니까 모자가 벗겨지면 관중들이 막 웃고 했었어요. 그래서 제가 재박이한테 “몸에다 터치를 해야지, 왜 자꾸만 모자를 벗겨?” 하면서 둘이 깔깔 웃고 했었죠. 김재박 감독이 그래서 정말 여우예요.(웃음)

▶ 오늘 하얀 챙이 있는 모자를 쓰고 오셔서 멋있어 보이세요.

가발을 쓰고 왔으면 조금 더 나았을 텐데요. 요즘 가발이 잘 나오잖아요. 그래서 가발공장에서 그냥 줄테니 쓰고 방송에 나오라는 말도 들었는데, 그냥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웃음)

▶ 사실 팬을 의식하고 즐거움과 꿈을 주는 것이 프로선수한테는 꼭 필요한 것 아닌가요?

그럼요. 그건 당연하죠. 팬이 없으면 프로야구가 살아남을 수가 없죠.

◇ 야구 유니폼에 반해 중2때 야구 시작... 작은 체구 때문에 더 열심히 노력

▶ 야구를 처음 시작하신 것은 언제인가요?

제가 선린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야구를 시작했어요. 보통 초등학교 때부터 해야 하는데, 좀 늦었죠. 제가 원래 초등학교 때는 피아노를 좀 쳤었어요. 저희 누님이 세 분이 계신데, 세 분 다 피아노 선생님이셨어요. 그래서 저는 체구도 작고 곱게 자라서 운동선수 같지 않았죠.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배성서’ 감독이라고, 그 당시 선린 고등학교 시절에 날리던 선수였어요. 그 분이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었어요. 그런데 보니까 유니폼이 참 멋있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저것을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했죠.

축구나 농구와는 달리 야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고 폼나게 입고 하는 운동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님에게 선린 야구부에 넣어달라고 막 졸랐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반대 하시니까 제가 몰래 배성서 선수를 찾아가서, 내가 야구부를 하고 싶으니까 야구부에 좀 넣어달라고 사정을 했죠.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야구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하기 시작했죠.

▶ 처음에 들어갈 때 테스트 과정이 있었나요?

그 때는 ‘주전자 당번’이라고 해서 선수들 뛰어다니면서 목마르면 주전자에 물 떠오고 하는 것을 시작해야돼요. 그래서 저는 주전자 당번도 좋으니까 야구부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었죠.

▶ 고향은 어디셨죠?

저는 충청북도 영동이예요.

▶ 그 당시에 피아노도 치시고 한 것을 보면, 잘 사셨었나봐요?

아니예요. 그냥 아버님이 당시에 교통부에 다니시고 보통 가정이었죠.

▶ 그러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하게 되신 거죠?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제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체구도 작고 실력이 없어서 갈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마침 제일은행에서 박현식 감독이 저를 스카우트를 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성실하다고 소문이 났거든요. 제가 운동을 열심히 했어요. 제가 체구가 작으니까 학교 종 치고 나면 쉬는 시간에 철봉도 매달리기도 하고, 팔굽혀 펴기도 했어요.

내가 야구는 좋아하는데 남을 따라가려면 펀치력과 스피드와 모든 것이 갖춰져야 하는데 없는 것을 운동선수답게 만들려고 하니까 엄청나게 노력을 했죠. 그런데 그것이 단번에 나오지는 않죠. 그래서 어떻게 은행에 휩쓸려서 가게 되었어요. 제 동기 중에 ‘윤효상’이라는 선수가 잘 했어요. 고등학교 대표선수였던 그 선수에 제가 묻어서 갔죠.(웃음)

▶ 체구가 작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는데, 키가 어느 정도이신가요?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170cm였었어요.

▶ 선수로서는 어느 정도 키가 적정한 건가요?

지금은 워낙 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는 178cm 정도가 적합한 키였죠. 체중도 미달이었고요. 지금은 운동을 안 해서 살이 좀 붙었지만, 그 때는 59kg의 몸으로 홈런왕을 하고 그랬죠. 60kg가 넘으면 몸이 좀 무겁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실업팀을 가면서부터 그동안 노력한 것들이 나오게 되더라고요.

▶ 아마야구에서 ① 최다연속경기홈런6게임 ②최장거리 홈런 150m ③역대 실업야구 최다 홈런 129개 ④ 최초의 4타자 연속홈런 ⑤ 실업야구 정규리즈 홈런왕 3회 (김응용· 유승안· 김봉연과 타이) ⑥ 실업입단 최초 만루 홈런 등 화려한 기록을 가지고 계신데...우리가 보통 말하는 ‘대기만성’형 이셨네요?

제가 지도자들을 잘 만난 거죠. 선배들을 제가 참 많이 찾아갔었어요. 왜냐하면 선배들 실력을 뺏으려고 하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찾아 갔었어요. 가서 저 선배가 어떤 점이 좋은지 연구하고요. 그 때 제일은행에 지금의 한동화 감독, 재일교포였던 김동률 선수도 있었고 좋은 분들이 많았는데, 그 분들이 저를 많이 봐주었어요.

▶ 가서 뭘 어떻게 물어보신 거죠?

처음에 자세가 됐나 안 됐나 보려고 땅바닥에 ‘십(十)’자를 그려넣고 무릎꿇고 앉아서 1시간 동안 쳐다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왜 그런지를 몰랐어요. “그것을 한 시간을 봐야지만 내가 기술을 알려주마.” 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 고통과 싸우라는 것이죠. 제 모든 생각과 잡념을 떨쳐버리고 집중하라는 의미였죠.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까 그 때부터 기술을 좀 알려 주더라고요. 그 때 ‘취권타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제가 술도 안 먹었었고, 배울 때는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 때가 1969년도인데, 소주나 맥주는 별로 없고, 막걸 리가 흔하던 때잖아요. 시합 하루 전 날, 선배가 저한테 술을 한 잔 먹이더라고요. 제가 너무 힘이 들어가니까 막걸리를 줘서 먹고 그 다음날 시합에 들어갔는데, 술이 좀 덜 깬 상태이다 보니까 몸에 힘이 싹 빠지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 때 난생 처음으로 홈런을 친 거예요. 그러니까 어깨 힘을 빼고 치라는 의미였죠. 저는 워낙 노력형인데, 제 스승이었던 선배가 볼 때 제가 아무리 해도 어깨의 힘을 빼는 것을 못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술을 먹였던 것 같아요.(웃음)그 다음부터는 힘을 빼야된다는 것을 터득한 거죠.

그 당시에 박영길 선수도 홈런왕이었었어요. 그 때 둘이 홈런 8개로 타이가 되었는데, 제가 홈런왕을 했었죠. 제가 선배님께 “선배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홈런왕을 하겠습니다.”라고 했었는데, 그 때는 젊었으니까 겁이 없었죠. 선배님에게도 막 제가 “자신있습니다.”라고 말할 때였죠.

그 때 ‘스타수첩’이라고 유명한 이순주 코미디언이 운동장에 나왔을 때, 제일 나이 많은 선배하고 나이어린 김우열 선수의 홈런 숫자가 똑같았는데, 제가 “잠깐, 이 게임에서 제가 홈런을 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정말 홈런을 쳤어요. 그래서 그 때부터 홈런왕이 시작된 거죠. 그 때 당시에는 제가 젊었고 펄펄 끓는 열기가 있을 때라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 체구가 작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다보니 그런 근성도 생기게 된 거네요?

네. 그건 정말 맞습니다. 정말 중요한 얘기죠. ‘저 선수는 안 된다.’하는 선수가 나중에는 더 잘 돼요. 무명선수가 잘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만큼 연습을 하고 노력을 하니까 안 되는 것이 없는 거예요. 운동선수는 소질만으로는 안 되는 거예요.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돼요.

▶ 실업팀에서 다양한 기록과 에피소드를 가지고 계신데, ‘술마시고 친 홈런’이야기는 어떤 얘기죠?

이만수 선수가 워낙 말을 잘해요. 그래서 그 선수가 포수를 볼 때 타석에 들어오면 아주 시끄러웠어요. 계속 옆에서 “형님이요.”, “어제 술 한 잔 하셨나봐요.” 하면서 아주 혼을 다 빼놔요. 그런데 한 번은 제가 술을 좀 많이 먹었어요. 그 때가 여름이라 많이 더워서 땀이 나는데 전날 마신 맥주가 다 빠져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그 때 이만수 선수가 술냄새 때문에 공을 못 잡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나, 죽겠다. 빨리 들어가야 하니까, 아무거나 줘라. 직구만 줘. 나는 스트라이크 아웃 먹고 들어갈테니까.”라고 했더니,“그래요? 알았어요. 형님.”하더니, 원 스트라이크, 투 스트라이크를 주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에 온 직구를 제가 쳐서 홈런을 시켜 버렸어요. 그랬더니 이만수 선수가 저한테 속았다고 막 그러는 거예요.(웃음)

▶ 최동원 선수의 ‘슬로우볼’을 쳐서 홈런을 날린 사건도 있으세요.

그 때 백호기 대회가 있었어요. 당시에 연세대학교와 제일은행이 결승에서 만났는데, 그 때 최동원 선수는 정말 배짱이 두둑한 선수였어요. 1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대학 시절에도 볼이 엄청나게 빨랐어요. 그 때만 해도 최동원 선수가 저보다 나이가 많이 어릴 때였죠. 그런데 그 선수가 제가 나오니까 갑자기 그 빠른 볼을 슬로우로 던지는 거예요. 저를 놀리는 거죠. 최고의 투수와 타자가 만났는데 슬로우 볼을 던지니까 ‘이 녀석 봐라.’하면서 제가 웃었어요. 그 다음에도 계속 슬로우볼을 던지더라고요. 그만큼 배짱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 들어온 볼을 제가 쳐서 홈런을 만들었죠.

그 당시에 돌아가신 김동엽 씨가 해설을 할 때였는데, 그 분이 “저러면 안 된다. 최고의 타자한테 한 번 맞을 것이다.”했는데, 그것이 적중한 거죠. 그래서 옛날에 택시기사 분들이 야구중계를 많이 들으셨잖아요. 그 팬들이 다 거기서 나왔었어요. 기사분들이 그 라디오 중계를 듣고 많이들 박수 쳐주시고 했었죠. 그 뒤로도 그 징크스 때문에 프로야구에서 최동원 선수가 저한테 홈런을 많이 맞았죠. 저는 한 번 이겨봤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거든요.

▶ 198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나온 ‘스퀴즈 사건’은 어떤 내용인가요?

저는 처음에 스퀴즈 싸인이 나오는데 깜짝 놀랐어요. 지금도 제가 김영덕 감독을 만나면 한 번 물어보고 싶어요. 만루의 찬스에 이선희 투수였는데, 저는 그 때까지 번트를 대본 적이 없었어요. 저한테는 아예 스퀴즈 싸인이 안 나왔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저한테 스퀴즈 싸인을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당황했죠. 그런데 그 때 제가 OB베어스의 최고 고참이고, 주장이었어요. 제가 주장이 아니었다면 아마 스퀴즈를 대지 않고 그냥 쳤을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에 왜 저한테 스퀴즈 싸인을 보냈는지 감독님께 지금도 정말 물어보고 싶어요. 그 순간에 ‘안타나 홈런을 치면 내가 MVP가 되는 좋은 찬스인데, 번트가 뭐냐?’하고 속으로 생각하다가 ‘아, 내가 제일 고참이고, 주장이니까 시키는 대로 번트를 대야겠다.’라고 생각했죠. 예전에 김재박 감독이 일본과 할 때 스퀴즈 싸인을 성공시켜서 이겼잖아요.

그런데 저는 김재박 감독처럼 여우가 아니라서 성공을 못하고 실패를 했었어요.(웃음) 그 다음에 나온 김유동 선수가 만루홈런을 쳤었어요. 그래서 김유동 선수가 MVP가 되었죠. 그래서 우승을 했어도 조금 그것 때문에 제가 지금도 아쉬운 점이 많아요. 그 때 당시에 가만히 두었다면 제가 뭔가 해결을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 김영덕 감독에게는 끝내 못 물어 보셨나요?

못 물어봤어요. 그 때는 “왜 나한테 스퀴즈 싸인을 보내셨습니까?”하는 이야기를 물어볼 수가 없더라고요.

▶ 김우열 선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아내도 야구공에 김우열 선수 싸인을 했다고 하던데요.

그 당시에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그림 딱지가 있었는데요. 제 것 한 장에 다른 선수들 열 장을 바꾸고 했었어요. 좀 건방진 이야기지만, 그 정도로 어린이 팬들한테 제가 인기가 많았었어요.(웃음) 그래서 그 때 제가 불광동에 살았는데, 아이들이 제가 사는 집을 알기 때문에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싸인 좀 해달라고 초인종을 많이 눌러댔어요.

그래서 하도 번거로우니까 집사람이 직접 제 싸인을 해서 주겠다고 여러 장 해놨는데, 결국은 싸인이 너무 다르다고 해서 쓰레기통에 다 버렸죠. 어린이 팬들에게 제가 직접 싸인을 해주어야 하는데 제가 시합에 나가고 집에 없으니까 그런 일도 있었어요.


▶ 그 당시에 택시를 타도 돈을 안 받고, 영화 제의도 들어올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떠세요?

그 때 당시에 제가 좀 더 나이가 어려서 스무 살 정도 됐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당시에는 제가 잘 하는 선수 하나 하나를 꺾으면서 올라갔거든요. 옛날에는 최동원 선수가 잘한다고 하면 그 선수가 1년 내내 던졌어요. 그 때 에이스가 다 던질 때였으니까 엄청나게 셌죠. 그러니까 투수들이 세기 때문에 2:0정도면 벌써 끝났었어요. 또, 그 당시에는 라디오 중계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택시 기사분들이 많이 들었어요. 제가 명동에 서있으면 택시 기사가 지나가다가 저를 알아보고 후진을 해서 저를 태우는 거예요. 그래서 집 앞에 내리면 제가 싸인한 공도 드리고 같이 내려서 저녁 먹자고 해서 같이 삼겹살도 먹고 했죠. 그러니까 기사분들과 제가 많이 친했었어요.

◇ 제가 받은 사랑... 어린이, 사회인 야구를 위해 봉사하고 싶어요

▶ OB를 떠나신 것이 언제였었죠?

제가 1987년에 떠났죠.

▶ 어떻게 은퇴를 결심하신 건가요?

지금 저한테는 가장 뼈아픈 일인데요. 제가 은퇴를 순조롭게 못 했어요.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해보려고 했는데, 제가 무릎수술을 두 번 하고, ‘중심성 망막염’이라고 눈동자에 염증이 생겨서 한쪽 눈이 안 보였어요. 그래서 구단 모르게 제가 좋다는 병원은 다 가봤어요. 그런데 전부다 못 고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쪽 눈을 아주 시커멓게 만들고 타석에 나가고 했었어요. 그러다가 또 무릎 부상도 생기고 하다 보니까 빙그레로 트레이드 되다가 그것도 흐지부지 되고, 지도자 생활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팬들이 왜 브라운관에 안 나타나느냐, 야구장에 안 나타나느냐 하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요. 그러면 저는 암암리에서 시골 사람들이나 어린이, 사회인 야구를 위해서 무보수로 가르치고 있다고 이야기해요. 제가 도와줄 길은 강원도나 야구가 별로 확산이 안된 곳을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일을 지금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 후배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꼭 화려한 곳만 찾지 말고, 자기의 야구 인생이 잘 됐던 선수들은 어린이 야구 분야 등에 좀 더 많이 베풀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 고등학교 후배인 박노준 씨가 현대를 인수할 센테니얼 야구단 단장이 되었는데요. 야구인으로서 이 일이 잘 되어야겠죠?

그렇죠. 야구선수가 단장이 된 것은 아마 최초일 겁니다. 박노준 선수는 워낙 유명했고 야구에 대해서 많이 알고요. 그런 것이 장점이죠. 그런데 앞으로 단장으로서 사회인들과 어떻게 잘 해나가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요. 앞으로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어야 할 겁니다. 여러분들이 도와주고, 구단에서도 많이 도와준다면 아마 잘 될 겁니다.

▶ 지난 해 두산에서 마련한 ‘올드 스타와의 만남’에 참석하셨던데요. 오랜만에 후배들과 팬을 만나니 기분이 어떠시던가요?

그 때 두산팀이 좀 침체되었을 때였어요. 그래서 구단에서 한 번 나와 달라고 해서 팬싸인회도 했었죠. 그런데 제가 옛날에 ‘사이비 안수기도’를 많이 해주었어요. 안수기도라는 것이 정신자세에 기를 많이 넣어주는 것인데, 코치 지도자 생활할 때 그런 것을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그 날 갔을 때 김경문 감독이 “형님, 요즘에 홍성흔 선수 방망이가 잘 안 맞는데, 뭔가 기를 좀 넣어주십시오.”라고 해서 제가 불렀어요.

그래서 제가 홍성흔 가슴을 딱 만지면서, “홍성흔 선수에게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해주었죠. 그랬더니 홍성흔 선수가 깜짝 놀라더라고요. 마음으로 기를 팍 주니까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날 4타수 3안타에 홈런을 쳤어요. 그랬더니 기자들이 뒤에서 봤는데, 다음 날 신문에 나서 김우열 선배가 기도를 해줬다는 기사가 나왔었죠. 그런데 사람에게 슬럼프라는 것은 길게 안 가요.

▶ 인생에서 슬럼프는 없으셨나요?

아니요. 저는 좀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 좋은 일도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멋있게 인생을 마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웃음) 사람은 한 번 스쳐 가는 것인데, 한 번 멋있게 마무리 하고 싶어요. 멋있다는 것은 남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 것이 있으신가요?

어린이와 사회인 야구를 위해서 계속 일하고 싶어요. 또 운동이라는 것은 다 똑같기 때문에 골프도 계속 도와주고 싶습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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