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창 "'스카이 서브' 만들려 모래조끼 입고 훈련했죠"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추억의 스포츠 스타’ - 장윤창편

장윤창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장윤창 선수. 특유의 틀어 치는 오픈강타와 돌고래를 연상시키는 백어택, 또 국내 최초로 선을 보였던 ‘스파이크 서브’는 많은 배구 팬들을 사로잡았는데요.

인창고 2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가 돼서 강만수, 김호철, 강두태 등과 함께 1978년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배구 역사상 최초로 4강에 오르기도 했고, 17년간 대표 팀에 몸담으면서 배구를 대중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나 그가 속한 고려증권은 화려한 멤버의 현대자동차서비스에 맞서서 특유의 조직력, 끈끈한 플레이로 손에 땀을 쥐는 경기를 펼쳤죠. 그 때 그 시절 기억 떠오르는 분들 많을 거예요.

‘최고의 거포’ 보단 ‘성실한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는 장윤창 선수.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은퇴 이후 지도자보다는 스포츠 행정가로서의 길 선택

▶ 지금 경기대 교수로 계시고, 또 어떤 일을 하시나요?

저희 선수들은 항상 정상만 보고 주변을 둘러볼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제 자신도 20년 가까이 대표선수 생활을 하다보니까 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없었는데, 미국에 공부를 하러 갔다 오면서 제 주변을 둘러보니까 저도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답을 할까 하는 차원에서 각 종목의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라는 대표선수들의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 모임에서 10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제가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 함께 하는 분들은 어떤 분들이 계신가요?

마라톤의 황영조, 탁구의 현정화, 축구의 홍명보, 최순호, 농구의 허재, 문경은, 양궁의 김수녕, 체조의 여홍철, 레슬링의 심권호 등 각 종목에서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 설마 이름만 걸어놓고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분들은 안 계시죠?

저희가 매달 봉사활동을 나가는데요. 장애인 친구들이 있는 곳, 고아원, 양로원을 10년째 빠지지 않고 매달 방문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 ‘배구 스쿨’도 하고 계시죠?

네. 제가 배구를 했기 때문에 배구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공간, 꿈나무 육성 등에 신경을 쓰면서 배구스쿨을 하고 있습니다.

▶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조직위원도 맡고 계시죠?

네. 제가 능력이 없는데도 과분하게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교수가 되고난 뒤에 어차피 제가 할 일은 지도자보다는 이렇게 행정적으로 서포트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보통 지도자의 길로 가는 경우가 더 많지 않나요? 지도자도 생각하셨던 것 아닌가요?

처음에는 지도자의 꿈도 있었죠. 선수들은 거의 90% 정도가 지도자가 되는 편이죠. 자기가 해왔던 것이니까 아마 잘 아니까 그쪽으로 방향을 가고 있는데, 현역시절부터 지도자보다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공부하고 와서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 더 잘 맞으시는 것 같으세요?

네. 저는 아주 행복합니다.

▶ 배구 코트 떠난 지 얼마나 되신 거죠?

1995년도에 떠났으니까 지금 13년 정도 되었습니다.

◇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줄곧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돼

▶ 배구를 처음 시작하신 것이 30여 년 전인가요?

네.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육상 선수를 했고, 핸드볼, 축구도 하고, 그러다가 배구를 좀 늦게 시작한 편입니다. 선생님의 권유로 인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선생님이 “넌, 키가 크니까 배구해!”라고 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제가 제1회 소년체전에 핸드볼 경기도 대표 선수로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축구를 하게 되었죠. 핸드볼을 하는 학교가 없어서 축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부터 안양중학교가 축구로 유명했었어요. 그래서 축구를 하다가 어머니께서 계속 반대를 하셔서 또 안 하게 되고, 그러다가 안양중학교 축구 감독님과 배구를 하는 화성의 송산중학교의 감독님이 경희대 선후배 관계이셨어요. 그래서 축구 감독님이 저를 추천해 주셔서 시작하게 되었죠.

▶ 어머님은 왜 그 때 축구를 반대하셨나요?

저도 아들이 둘 있는데, 둘 다 운동선수거든요. 그런데 제 마음과 똑같으셨을 것 같아요. 운동선수는 죽어도 안 시키려고 했는데, 항상 연약해 보이고 안쓰러워서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자신 있었는데 저희 어머니는 다친다고 그렇게 반대하시더라고요.

▶ 지금은 스포츠 스타의 인기가 대단한데, 그 당시에도 스포츠 스타들이 많지 않았나요?

제가 1973년에 운동을 시작했는데요. 그때만 해도 운동선수를 보는 시각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어요. 운동하면 어떻게 보면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못하는 친구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하면서 보니까 운동선수는 머리가 나쁘면 운동을 못하거든요. 제가 가르쳐 보기도 하고 같이 해보기도 했는데, 절대 운동은 운동신경이라든지 순간적인 판단력이라든지 센스라든지 민첩성 등이 떨어지면 절대 운동을 할 수가 없는데, 그 당시 인식이 좀 달랐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인식이 완전히 다 깨졌죠.

▶ 인창고등학교 2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가 되셨다고요?

네. 제가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해서 3학년 때부터 청소년 대표를 했거든요. 청소년 대표를 3년 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표선수가 되었는데, 제가 잘한 것 보다는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대표선수를 뽑는 선생님들이 저를 잘 봐주셨던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 저를 예쁘게 봐주시고 뽑아주셔서 제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 일찍 꽃을 피우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 정말 성실하셨던 것 같아요.

글쎄요. 저는 지금도 술, 담배, 커피 같은 것은 전혀 못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고등학교 때 대표선수로 들어가서 선배님들의 술 마시고 담배 피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운동하면서는 절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저한테 선배님들이 하지 말라고 많이 말씀하셨어요. 자신들이 하고 보니까 안 좋다는 충고를 많이 해주셨어요. 그래서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오랫동안 운동을 할 수 있고 다치지 않고 할 수 있는 비결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제가 그런 쪽으로는 절제하고 운동에만 매달렸었죠.

▶ 그래서 농구의 허재 감독이 “장윤창이는 수도승 같아.”라고 했었다면서요?

네. “윤창이형 보면 항상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를 허재도 하고, 다른 동료, 선후배들이 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 선수들에게는 아무래도 술, 담배가 안 좋겠죠?

네. 치명적이죠. 담배는 호흡에 분명히 영향을 끼치고, 술, 담배 하는 동료, 선후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절대 담배 피우면 안된다고 하면서도 못 끊더라고요. 술, 담배 때문에 선수생활이 짧아지는 경우가 많죠. 선수들은 철저한 자기 관리가 필요하죠. 하여튼 저는 운이 좋았는지 한 번도 대표선수를 빠진 적이 없어요. 수많은 해외 원정 중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부상을 심하게 당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선수는 역시 자기 관리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 대표 팀을 같이 했던 팀원들은 어떤 분들이었죠?

지금 한창 돌풍을 몰고 있는 현대팀의 김호철 감독이 그 때 세터였고요. 아시아의 거포였던 강만수 선배, 유명을 달리한 강두태 선배 등이 있었죠. 제가 제일 막내였고요. 그 당시가 아마 저희 남자 배구가 세계무대에서 가장 활약이 컸던 때였던 것 같아요. 아시아 재패는 물론이고,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도 금메달 따고, 남자배구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4강에 들어가고요. 남자배구가 4강까지 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타종목에서 우승하는 것에 버금가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어요.

배구나 농구는 유난히 신장의 차이가 있거든요. 신체적인 차이가 굉장히 큰 것인데, 저희들은 188~189cm 정도의 평균 신장인데, 세계 다른 나라의 선수들은 2m가 넘었거든요. 그런 틈바구니에서 저희가 4강을 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 키가 2m 넘는 분들은 맞는 운동화는 있나요?

주로 외국에서 맞추죠. 그 당시에만 해도 우리 한국에는 없었고요. 외국은 그렇게 2m 넘는 친구들이 신는 330미리, 340미리 신발을 신으니까요. 저희들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죠.

▶ 그만큼 선수들끼리 똘똘 뭉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죠?

저희들이 동양인으로서는 체구가 작은 편이기 때문에 유럽이나 아프리카, 남미 계통의 친구들과는 신체적인 조건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빠른 스피드와 톱니바퀴와 같은 조직력뿐이었기 때문에요. 그 당시에는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수도 없이 계속적으로 훈련이 반복되었죠. 1년 내내 태릉에서 훈련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생활을 어떻게 했을까 할 정도로 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눈빛만 봐도 사인이 필요 없을 정도로 팀이 아주 톱니바퀴처럼 잘 돌아갔죠.

▶ 핸드볼의 임오경 감독이 나왔을 때도, 정말 하루 종일 연습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네. 태릉에서 핸드볼 선수들 훈련하는 것을 보면, 정말 연습 많이 해요. 배구도 똑같이 그렇게 했었고요.

▶ 불암산만 가면 다들 벌벌 떨었다고 하던데, 배구 선수들도 그랬나요?

그래서 불암산을 ‘눈물고개’라고 하거든요. 눈물, 땀, 피범벅이 되어서 다 흘리는 거죠.

◇ 세계최강 일본의 자존심을 꺾어버린 첫 계기의 주인공

▶ 그렇게 열심히 연습했기 때문에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강의 기적을 이룬 것이죠?

그 대회에서는 거의 전 경기가 마지막 파이널 세트까지 가서 3-2로 이기는 경기였어요. 저희 팀이 3-0으로 이기기는 힘든 경기가 대부분이었죠. 그런데 예전에는 한국이 체력적인 열세로 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희들은 3-2에서 이기는 경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역시 스포츠는 과학적인 것도 중요하고 신체적인 것도 중요한데 보이지 않는 정말로 피나는 연습이 또 중요합니다.

▶ 그 대회에서 “평상시에 이기기 힘든 일본을 꺾은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난다.”고 인터뷰 하신 내용이 있던데요.

네. 우리나라에는 일제시대 때 일본을 통해서 배구가 보급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 미국의 선교사를 통해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습니다만, 배구가 본격적으로 활성화 된 것은 일본을 통해서 우리가 배구를 배우게 되면서부터죠. 태권도의 종주국인 우리나라가 태권도대회에 나가면 거의 이기듯이, 일본도 자기들이 우리나라에 배구를 보급시키고 가르쳤다고 해서 우리와 배구를 하게 되면 우리가 상당히 약했어요. 일본과 하기만 하면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일본에서 모든 기술을 도입하고 일본에게서 배구를 배우다 보니까 일본에게 조금 약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김호철, 강두태, 장윤창은 일본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선배들은 계속 답습해오니까 일본을 만나면 약간 두려운 것이 있었는데, 저희 세 명의 신진들이 새로 들어가면서 완전히 분위기가 역전되었죠. 일본이고 뭐고 그런 것을 생각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때 모스크바 올림픽 예선전에서 저희들이 처음으로 일본을 이겼죠. 그것이 일본을 이기기 시작한 첫 경기였고, 그 뒤로 저희들이 12연승까지 했을 때가 있었어요. 일본의 콤플렉스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 1979년 모스크바 올림픽 예선전 때였습니다.

▶ 그 때 일본팀 선수들은 어떤 표정이던가요?

일본의 자존심은 대단했는데, 저희들에게 지고난 뒤부터는 그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지고, 그 당시에 세계무대에서는 일본 배구협회라든지 일본배구가 완전히 주도하고 있었거든요. 그것이 한국에게 무너지면서 그 구도가 많이 흔들렸습니다. 또 그 당시에 세계적인 선수들이 일본에 많이 있었습니다. 일본이 뮌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데요. 그 때의 주역인 세터 레코다, 다나까, 오코 선수 등 기라성 같은 멤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 선수시절에는 어떤 것을 특히 잘하셨나요?

저는 아무래도 육상선수였기 때문에 신장에 비해서 점프력이 좀 좋았습니다. 탄력이 있어서 백어택(Back Attack)과, 우리나라 최초로 제가 개발해서 썼던 스카이 서브, 지금은 점프 서브라고 하는데요. 지금은 선수들이 전원 다 합니다만,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죠. 제가 백어택을 많이 쓰다보니까, 이것을 더 발전시킬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것을 서브에 접목해서 서브로 개발하게 되었는데, 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죠. 언론에서 ‘돌고래 서브’, ‘돌풍 서브’라는 이름을 많이 붙여 주었죠.

▶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부분은 대학 대신 실업팀을 많이 선택하던 시절인데, ‘경기대’를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표선수 생활을 하다보니까 아무래도 지금의 프로인 실업팀에서 당연히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죠. 실은 제가 좀 어려웠던 때이고 어머니가 고생도 많이 하셨던 때였는데, 아파트도 주고 형들 취직도 다 시켜 준다는 조건이었는데도 저는 언제라도 제가 실업에 갈 수 있는 것이니까 대학을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제 동료들은 다 서울대를 가고 저는 혈혈단신으로 경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대학배구를 살리겠다는 차원에서 간 거죠.

▶ 정말로 형제들 취직도 다 시켜준다면서 스카우트 제의를 하던가요?

네. 형들 다 취직시켜 주겠다는 조건이었죠. 원래 스카우트는 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 가정 형편은 어떠셨었나요?

제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저희 어머니가 농장 일을 하시면서 저희 4남매를 키웠기 때문에 아주 어려웠죠. 그런데 제가 막내다 보니까 형제들이 편안한 생활을 그렇게 한 것도 아니고 다들 어리니까 자리 잡기가 쉬웠던 것도 아니었죠. 그래서 그런 스카우트의 유혹이 왔을 때 제가 형제들 다 도와 주고, 어머니께 집도 마련해 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제가 공부를 해야겠다,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죠.

▶ 그런데 어릴 때 뭘 먹었기에 키가 그렇게 쑥쑥 컸어요?

글쎄요. 부모님이 잘 낳아주신 것 같아요. 그런데 음식은 가리거나 편식해본 적이 없어요. 모든 음식을 다 잘 먹었던 것 같습니다.

▶ 그럼 아버님이 키가 크셨나요?

아버님도 평균적인 키이셨고요. 어머님이 예전 분으로서는 좀 크신 편에 속하죠. 164cm 정도 되시고, 할아버님이 크시고요. 저희 집안이 다 크긴 하더라고요. 형제들도 그렇고요.

▶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요?

아버님이 예전에 한약방을 하셨는데, 제가 어릴 때라서 크게 기억나는 것은 없네요.

▶ 그 당시 ‘오빠부대’는 어땠나요?

저희들이 고려증권의 창단멤버인데요. 그 당시에 겨울에 대통령배가 시작되면서 고려증권팀이 창단되면서 배구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저희들이 아마 최초의 그런 장을 열었는데, 체육관이 꽉꽉 차기 시작하는 것이 그 당시부터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시합하면 그렇게까지 체육관이 매진되는 경우는 없었는데, 저희 고려증권 팀과 현대 팀이 창단하면서 배구의 붐이 일어나고, 전 경기장이 항상 만원세례가 되고, 못 들어오신 분들도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못생긴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를 많이 사랑해주시는 팬들이 많았어요.

▶ 아니, 누가 못생겼다고 그래요?

저는 좀 못생긴 편이고, 후배들이나 동료들 중에 잘 생긴 사람이 워낙 많죠.

▶ 남성 배구 팬이 많다가 여성 팬들이 많아지게 된 것도 그 때부터의 변화인가요?

네. 그 때 ‘오빠부대’라고 언론에서 많이 이야기 해주었는데요. 남성들 팬이 참 많았다가 여성 팬들이 많이 “오빠, 오빠”하면서 많이 쫓아다니고 오빠부대라는 단어를 많이 쓰게 된 때가 아마 그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저희 고려증권은 ‘넥타이 부대’의 팬들도 많았고요.(웃음)

▶ 그 때 팬들이 ‘천 마리의 학’도 많이 접어서 보내지 않았나요?

네. 너무 많이 받았죠. ‘천 개의 학을 보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얘기도 있었는데요. 저희들이 지방을 많이 다니면서 시합을 했어요. 부산 다녀오고, 서울에 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종이학을 많이 보내줬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데, 아마 수십만 마리는 됐을 겁니다.

▶ 별명이 ‘태릉선수촌의 귀신’이라고 하던데요. 모래주머니를 얹고 점프연습을 했다는 것이 맞아요?

네. 저희들이 모래조끼 10kg짜리를 매고 줄넘기를 3천개씩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점프력이 되는거죠. 어떻게 보면 과학적인 것보다는 좀 무식한 방법이기는 한데, 그것이 제가 스카이 서브라든지, 백어택의 붐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키가 일단 190cm가 넘어가면 어떻게 보면 기형적인 몸매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유럽이나 미주 지역에는 신장이 큰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데, 저 같은 190cm 정도 키의 동양인이 점프를 2m 가까이 하기는 정말 어려운데, 저는 육상선수였고 해서 그것을 개발한 것이 모래조끼 입고 줄넘기를 많이 하고, 계단 몇 백 개씩 뛰고 했던 것이 도움된 것 같습니다. 지금 뒤돌아보면 저도 어떻게 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아찔할 때가 있습니다.
장윤창
▶ ‘스카이 서브’에 대해 다른 선수나 심판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죠. 우리나라 배구계에 그렇게까지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아마 배구를 전국적으로 소녀팬들, 수많은 배구팬을 만들어 낸 것이 이 스카이 서브, 백어택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1980년대 칼라TV가 도입되고, 5공화국 시절에 스포츠가 많이 활성화 되면서 스포츠 붐이 일어나서 굉장히 많이 보급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많이 사용했으니까 TV화면을 통해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되고 하다 보니 인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태릉선수촌에 여학생이 담 넘어 오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생일날이 되면 태릉 선수촌에 케이크가 수십개씩 오고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인데, 그 당시에는 잘 못 느꼈어요. 또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팬클럽이 결성되어서 원정응원도 와주었었죠.

◇ ‘넥타이 부대’의 고려증권은 나의 분신과 같은 존재

▶ 1983년에 고려증권에 입단하신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제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 다른 팀들이 좋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증권에 입단했습니다. 제 운명이기도 하겠지만, 저는 항상 개척하는 인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생팀을 가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그 당시 고려증권의 이강학 회장님께서 저를 중심으로 한 팀을 만들어 주셨죠. KBS에서 배구해설을 하시던 오관영님이 그 당시 초대 단장이셨는데, 그 분께서 실업팀에 대한 준비를 하시고, 저는 선수들을 규합하고 해서 고려증권이 탄생하게 되었죠.

▶ 고려증권이 우승도 많이 했죠?

그 후로 수많은 우승을 했죠.

▶ 현대를 창단하러 다녔다는 것도 뭔가 모험심과 같은 것과 다 연관되는 것이었겠네요?

다른 대학에 있는 동기들에게 얘기를 해서 고려증권 팀을 결성했어요. 그런데 바로 뒤이어서 현대가 창단을 하겠다고 협회에 이야기해서, 협회는 저만 오면 지방 대학에서 실업에 못가는 선수들과 팀을 하나 만들겠다는 조건으로 왔더라고요. 그래서 대한배구협회나 현대에서 고려증권은 이미 좋은 선수들로 결성되어 있으니까, 저 혼자만 빠지고 지방에 있는 선수들과 같이 다시 하나 만들자는 제의를 했어요.

대한배구협회는 제가 현대로 간다고 하면 이중등록과 같은 행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차원에서 저한테 이야기해주었어요. 그래서 제가 또 현대의 창단 멤버를 모으기 위해서 지방대학을 다니면서 선수 스카우트를 현대의 초대 단장 하신 분과 같이 다니면서 했죠. 그 당시에 이인선배님이 이태리에 계셨는데, 제가 선수 겸 감독으로 추천을 해서 그렇게 시작되었던 거죠.

▶ 그렇게 영향력이 막강해지면 좀 우쭐해지지 않던가요?

저는 그런 것은 없었고요. 제가 그렇게 현대를 결성해놨는데, 나중에 이중등록의 상황이 벌어지니까요. 물론 현대에서 금전 적으로 제시한 부분도 컸는데, 저는 맨 처음 맺은 의리를 선택해서 고려증권으로 다시 가게 되었죠.

▶ 그 때는 스카우트 조건이 돈으로 표현하면 어느 정도 수준이었나요?

제가 그 당시에 수천만 원을 받았는데요. 그 당시에 강남의 아파트가 2천만 원 정도 되었나 했을 겁니다. 아파트 3~4채 값은 제시되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창단팀을 선택한 것이죠. 그런데 인생은 돈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 현대자동차서비스의 맞수로서 화려한 멤버들이 많았던 시절이죠?

그 당시의 현대와 고려증권은 한국 남자배구계를 양분하던 멤버들이었죠. 지금의 LIG인 당시의 럭키금성까지 해서 세 팀에서 대표선수들이 거의 다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고려증권보다는 현대가 훨씬 더 대표 선수가 많았고, 항상 좋은 멤버를 많이 보유했었죠. 그런데도 승률은 항상 고려증권이 높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서 팬들이 좋아하지 않았나 싶어요.

▶ 승률이 높은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나요?

저희는 화려한 멤버는 아니어도 조직력의 팀컬러를 가졌어요. 물론 제가 제일 선배이고 창단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동료나 후배들에게 나보다는 우리라는 인식을 많이 심었죠. 항상 제가 리더였기 때문에 말이죠. 아마 제 욕심대로 모든 것을 저 혼자 하려하고 혼자 때리고 혼자만 화려하게 보이려고 했다면 고려증권 팀은 없었을 겁니다. 제가 오랫동안 대표선수를 했던 이유도 아마 팀의 궂은일을 많이 해서 오래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고려증권의 끈끈한 조직력에는 아마 개인보다는 팀을 생각하는 마음이 영향력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 그렇게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의 심성과도 연관이 있겠죠?

글쎄요. 형제들과의 애틋한 것이 많았죠. 특히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하는데요. 그런 것이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가면서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배구계, 체육계에 몸담고 있어도 저 자신보다는 제가 몸담았던 배구가 우리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스포츠가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쪽으로 생각이 많은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좀 건방진 생각 같습니다.

▶ 라이벌 같은 존재는 없었나요? 기술적인 면에서 부러웠던 선수는 누구였나요?

기술적인 면은 아니고요. 저는 동료들보다는 선배들에게 그런 것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선배 포지션을 꼭 차지해야지.’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제가 최연소 국가대표도 된 것 같아요. 제가 고등학생 최초로 기라성 같은 선배의 자리를 차지해서 국가대표 베스트 멤버로 쭉 뛰었거든요.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이 저를 지켜주고 지탱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강만수 선배는 ‘레프트(left)라서 저와는 포지션이 다르기 때문에, 저는 라이트(right)로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강만수 선배나 강두태 선배 등의 모습을 많이 보면서 성장을 하고 생각을 다르게 갖고 왔던 것 같습니다.

▶ ‘타의 추종을 불허하겠다’는 것만큼은 착한 심성으로 양보하지 않으셨던 거로군요.

선수생활에서는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다른 생활에서는 얼마든지 제가 배려할 수 있지만 코트에 서는 것은 누구에게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고, 제가 배구를 늦게 시작했는데 처음 배구를 익히는 3개월 동안을 빼놓고는 벤치에 단 한 번도 앉아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오기는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러다가 ‘은퇴’에 대한 생각도 들지 않던가요?

아무래도 대표선수를 너무 오랫동안 하고, 제가 대표선수를 1977년도부터 했기 때문에 1988년 서울 올림픽 끝난 후부터는 대표선수를 그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반납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표팀 감독님이 “1년만, 1년만 더 하고 관두자.”하셨던 것이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끝나고, 1992년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전까지 했어요.

그래서 대표선수를 가장 오랫동안 한 것 같습니다. 후회가 돼요. 왜냐하면 제가 빨리 관뒀어야 좋은 후배들이 많이 나오고 했을텐데, 제가 너무 오랫동안 버티고 있는 것이 후배들이 나오는 길을 막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됩니다.

◇ 여러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 매달 봉사모임을 통한 선행

▶ 그러면 은퇴한 이후에 바로 유학을 떠나신 건가요?

네. 제가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은 많이 했는데, 제가 너무 어린 나이 때부터 태릉에서 생활을 많이 해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그러면서도 언젠가 공부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은퇴를 하면서는 배구가 아닌 전공을 살려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체육과를 나오지 않고 경영학과를 나왔고, 대학원도 경영대학원을 나왔기 때문에 이쪽 전공을 살려서 공부를 좀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은퇴를 한 뒤에 바로 실행에 옮겼을 뿐이죠.

▶ 그러면, 바쁜 훈련 가운데 결혼은 어떻게 하셨어요?

물론 저를 사랑해주시는 많은 팬들이 계셨고, 주변에서 소개해주시겠다는 분들도 많았는데, 저는 그런 것에 대해서 조금 우둔했던 것 같아요. 그런 쪽으로는 생각을 많이 못하고, 어떻게 보면 좀 멍청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유중탁’이라고 하는 제 동료가 있었어요.

그 선수가 지금의 부인이 된 여자 친구와 사귈 때였는데요. 그 여자 친구가 자기가 다니는 이대에 괜찮은 친구가 있다고 해서 제 집사람을 처음 만나게 되었죠. 그렇게 해서 처음에 소개를 받아 만났는데, 여자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몇 번 데이트를 하다보니까 생각이 좀 바뀌더라고요. 그러면서 처음 만나 본 사람이 지금의 부인까지 된 것 같습니다.

▶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어떻게 보면 제가 좀 고리타분할 수도 있는데요. 어머니 같고 맏며느리 감처럼 덤덤한 스타일이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제가 집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거든요. 약간 대학생활의 발랄함과 세련된 모습이었는데,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대화를 나눠보니까 제가 생각한 것과는 좀 다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장인, 장모님을 뵙고 나서 집안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죠.

▶ 스포츠 스타니까 중매쟁이가 연락을 한다거나 좋은 혼처가 나타나던 때 아니었나요?

글쎄요. 저는 그런 쪽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아마 결혼정보회사에서 연락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이 좀 있기는 했었죠.

▶ 끝없는 연습 외에는 살면서 힘든 순간이 별로 없었던 것 아닌가요?

물론 힘들 때도 있었죠. 세상 물정 몰라서 생긴 일들도 있고요. 훈련은 워낙 힘들기 때문에 다른 것을 할 시간적인 여유는 없어요. 선수생활 때는 아무 생각없고 훈련만 하니까 단순해져서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은퇴를 하고나서는 여러 가지 자기 인생을 개척하면서부터는 많은 고민과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 지도자의 길을 택하지 않고 더 공부하시는 분들은 꼭 유학을 가시던데, 경험해 보시니까 꼭 필요한 과정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 있으면서 배구를 떠나 있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아마 상상하지 못할 거예요. 장윤창을 배구와 떼어놓는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너무나 많은 잡음이 생길 것 같아서 아예 아무도 모르는 곳에 떨어져서 제가 마음껏 해보고 싶은 공부도 해보고, 나를 뒤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유학을 필히 가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알아간다는 것, 진짜 영어 단어 하나 알아나가는 것도 제가 살아있다는 의미를 다시 느끼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자신이 평생 해왔던 운동을 은퇴하면서는 정말로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 모든 선수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그런 갈등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고 있었죠.

▶ 잘 나가던 고려증권이 IMF때 팀 해체를 맞았을 때 느낀 갈등과 회의는 엄청났겠어요?

고려증권은 제 분신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이강학 회장님이 저를 중심으로 팀을 창단해 주셨고, 제가 동료들을 규합하고, 후배들을 다 리드해오면서, 어떻게 보면 제가 고려증권 팀컬러의 혼을 불어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그 팀이 해체되고, 회사가 없어지는 것을 지켜봤거든요.

그래서 저도 아쉬움, 안타까움에 눈물을 많이 흘렸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동료들은 다 은퇴했지만 아꼈던 후배들이 자리를 못 잡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았죠. 새로운 팀이 창단해서 그 팀이 인수해 주기를 그렇게 바랬는데도 IMF라는 어려운 상황에 빠지다 보니까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많이 가슴 아파하고 힘들어 했습니다.

▶ 정의탁, 유중탁, 박삼용 선수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제가 주제넘게 고등학교 팀 창단도 많이 하고 다니는데요. 안양시장님과 같이 평촌고등학교 배구팀을 창단했는데, 정의탁 감독이 지금 평촌고를 맡고 있고요.

▶ 평촌고등학교 배구팀이 요즘 잘 나가잖아요?

네. 아마 올해는 고등학교 정상권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또 유중탁 선수는 지금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있고, 박삼용 선수는 KT&G에 있고요. 그 당시 고려증권 선수들이 워낙 성실함의 대명사가 되어있거든요. 그래서 팀의 코치, 감독으로 거의 다 나가 있습니다.


▶ 요즘 프로배구 ‘2007-2008 V리그’가 한창인데, 가끔 경기장에는 가시나요?

네. 제가 협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기 때문에 배구의 흐름이라든지 팬들이 사랑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많이 갑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도 장애인 친구들과 가서 구경도 했었죠.

▶ 요즘은 스포츠도 경쟁이 심해서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고 재미있지 않으면 안되죠?

그럼요. 물론 예전의 선배님들이 하실 때는 배구가 겨울 시리즈로서는 상당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름에도 많은 사람들이 와줄 것이라는 생각을 좀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배구가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결국 겨울시리즈에서 농구와의 2강 구도가 깨졌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저희들이 다시 동료, 선후배들이 뭉쳐서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에 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 팬층이 좀 더 많아져야 할 것 같아요.

그렇죠. 예전에는 보는 스포츠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지금같은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것을 참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또 보는 것도 세계 글로벌 시대이기 때문에 세계의 수준 높은 모든 경기를 많이 보니까 경기력도 좋아지지 않으면 쉽게 경기장에 오게 할 수 없죠. 그래서 어떻게든지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서 정말 감동의 플레이, 짜여진 드라마가 아닌 예측할 수 없는 경기를 보여준다면 분명히 많은 팬들은 체육관을 찾아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게임의 다양화를 시키기 위해서는 팀 수가 많아야 하는데, 지금 저희들은 팀이 너무 적습니다. 남자배구는 정식 프로팀은 4팀인데, 기업들의 사정이 좋아져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본다면 2팀 정도만 더 창단되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우리나라 배구는 세계수준에 비해서 조금 2%가 부족하거든요. 배구, 농구, 야구, 축구를 세계 4대 구기종목이라고 하는데요. 이 중에 배구만큼 세계정상권에 가 있는 종목이 우리나라 스포츠 중에는 많지 않습니다. 배구가 가장 근접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좀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일단 팀 수가 많아져야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올 수가 있겠죠.

또 일단 선수들의 정신개조부터 많이 바꿔야 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후배들이나 지도자들이 지금 이 방송을 들으면 저를 욕할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상태로는 안 되고, 선수들이 지금보다 두 배 더 많은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자기 몸을 갈고 닦는데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줘야죠.

지금으로 만족한다면 우리 배구는 정말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선수들이 지금보다 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실력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역시 이 기술은 체력과 신체적인 조건이 따라오지 않으면 기술이 습득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안 되고, 정말 철저히 자신을 갈고 닦는 절제된 생활, 정말 남들이 다 즐기고 싶어 하는 것도 자기가 참고 자기 몸을 단련시키고 기술을 습득한다고 하면 더 많은 경기, 정말로 감동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것이죠.

일단 선배나 프로연맹이 다 노력해야겠지만, 좋은 팀들이 창단해서 여건을 서포트 해주고, 선수들이 정말 감동적인 경기력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두 가지가 있다면 충분히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앞서 말씀해 주신 ‘함께하는 사람들’ 봉사모임은 주로 어떤 일을 하시는 모임인가요?

저희들이 사단법인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만, 스포츠 각 종목에서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친구들이 모여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배구계에서는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인데, 정말 저도 각박한 경쟁 속에서만 사느라고 전혀 베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오직 정상을 향해서만 노력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오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죠.

또 사회적으로 자기가 속한 조직 속에서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사회에 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우리 스포츠계에서는 이것을 못하고 있었을까?’ 하는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오면 꼭 실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저 혼자보다는 모든 스포츠 스타들이 다 모여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서 함께 시작했는데, 1998년 10월에 시작되었으니까 지금 만 10년이 되었네요.

제가 실천하면서 각 후배들, 동료들에게 일일이 다니면서 국민들에게 이제껏 우리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냐 해서 황영조, 현정화, 장재근, 전기영, 여홍철, 서향순, 김수녕,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김현준 선수 등에게 봉사활동을 같이 하자고 해서 결성이 되었습니다. 동료, 후배들도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흔쾌히 결정해주어서 시작하게 된 것이죠. 매달 한 번도 빠지지 않고 10년째 하고 있습니다.

▶ 팬들에게 ‘행복한 빚갚기’를 계속 하셔야 되겠어요.

제가 앞으로도 힘닿는 한 계속 해야되고요. 앞으로 사랑을 많이 받는 스포츠 후배들, 스타들이 계속적으로 자신이 받은 사랑을 자신이 간직하지 말고, 정말로 받은 사랑을 자기보다 조금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면 조금 더 많은 분들이 스포츠를 더 많이 사랑하고, 사회가 조금 더 밝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 어머니는 어떠신가요?

어머니는 아직 살아 계신데요. 하반신을 못 쓰시기 때문에 상당히 불편하십니다. 제가 바빠서 대신 저희 누님이 고생을 많이 하고 계시죠.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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