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겐 스피드와 테크닉, 태식이에겐 돌주먹을 주셨죠”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설특집>추억의 스포츠 스타, 복서 박찬희

박찬희
"저한테는 빠른 스피드와 테크닉을 주셨고 태식이한테는 돌주먹을 주셨죠"

“오른손 강타!!! 왼손! 다시 좌우 스트레이트! 복부!!!”

그의 짧은 좌우 훅과, 이어지는 연타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상대는 흔치 않았다. 멕시코의 에스파다스를 2회에 때려눕힌 그날의 스포츠신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박찬희, 전광석화의 KO승!!!’

박찬희 선수는 한마디로 한국 최초의 세계적 테크니션 복서였죠. 비교적 강하지 않다고 평가되던 그의 펀치력을 박찬희는 스피드와 연타 테크닉으로 커버했고, 앞으로 파고드는 ‘인파이팅’으로 상대방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그 만큼 그의 복싱은 ‘세계적’이었고 박찬희의 권투는 달랐다.

대학생 챔피언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고 잘생긴 외모에 화려한 기량으로 챔피언 롱런 시대를 연 주인공, 전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박찬희 선수를 1월 21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다.

사업가로 변신한 박찬희, 한국복싱의 ‘초상(肖像)’

▶ 예전에 플라이급이셨는데 지금은 벤턴급 정도 되시는 거 같아요.(웃음)

=플라이급 체격이 51kg 정도인데 당시에 몸무게가 54kg이었어요. 그래서 3kg을 더 빼서 플라이급을 유지했고 지금은 운동을 그만둬서 59kg 정도 나가요. 플라이급을 뛰었던 다른 선수들을 보면 많이 나가는 사람들은 70kg까지 나가기도 해요.

▶ 체중감량을 할 때는 어떻게 하나요?

=두 가지가 있어요. 시합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조금씩 운동으로 땀을 흘리고 줄여나가면 시합 때 힘을 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시합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무리하게 사우나 등에서 살을 빼면 시합 때 힘을 못 써요. 저 같은 경우는 일기를 쓰듯이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운동 끝나고 나서 한 번, 밤늦게 한 번, 계속 체크하면서 요만큼만 먹고 자야겠다, 그러면서 조절했기 때문에 사우나에 가서 무리하게 빼본 적은 없어요.

▶ 요즘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안성시 일죽면의 ‘유토피아 추모관’이라고 거기서 전무로 일하고 있어요. 복싱에서 코치와 매니저가 있듯이 사회에도 선배나 매니저가 있는 게 좋잖아요. 사장님으로 계신 권혁 선배님이 같이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셔서 같이 일을 하고 있는데, 나라에서도 매장보다는 화장해서 납골로 가는 추세니까 앞으로 이 사업이 전망이 있을 것 같아요.

▶ 고 최요삼 선수도 유토피아 추모관에 모셨는데 많이 안타까우셨겠어요.

=대한민국에서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과거에 최요삼 같은 일을 겪었을 수 있었고 현재 선수들도 나도 링에 올라가면 저런 경우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잖아요.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같은 복싱인으로서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유토피아 추모관의 회장님과 권혁 사장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명색이 전 세계 챔피언 했던 선수니까 로얄석으로 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시더라고요. 최요삼 가족들에게도 보여주니까 너무 좋아하시고요.

▶ 최요삼 선수의 경기모습을 보셨나요?

=봤죠. 최요삼 선수가 다 이긴 경기였고 끝나는 마당이었기 때문에 여유를 부리다가 상대 펀치에 맞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센 펀치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최요삼 선수 나이가 34살이었거든요. 십 몇 년 동안 운동을 하면서 누적돼서 맞은 매에 쌓였던 충격이 터진 것 같아요.

기네스북 챔피언, 고2 때 첫 금메달 따

▶ 80년대 테크니션 복서로 유명하신데 당시로서 스타일이 다른 복싱을 하셨던 거죠?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무하마드 알리하고 죠 프레이저의 경기를 보면서 복싱을 하게 되었어요. 죠 프레이저가 무하마드 알리보다 작은데 파고들어가서 공격하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거든요. 저도 작으니까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도 큰 애들이 나서면 기가 죽어요. 그래서 운동을 하면 좋겠다 싶어서 태권도를 할까, 뭘 할까 고민하는데 마침 동네 체육관을 지나다가 사나이가 사각의 링 안에서 맨 주먹으로 도망도 못 가고 누가 이기든 지든 정해진 시간 안에 싸우는 걸 보면서 나도 복싱을 해야겠다 결심했고 또 죠 프레이저의 경기를 본 거예요. 체육관에 다니면서 사범님이 가르쳐줘도 항상 죠 프레이저의 파고들어가서 공격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연습을 했어요. 내가 지는 날이 은퇴하는 날이라고 결심하고 연습에 임했죠. 고 1 때 처음 신인 시합에 나갔고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나갔는데 7,8년 된 선배들, 대학생들, 군인들은 있는데 고등학생은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들을 다 물리치고 고1 때 국가대표 선수가 된 거예요. 그래서 1년 만에 국가대표 선수가 돼서 고2 때 아시안 게임에 나가서 금메달도 땄어요.

▶ 아마추어 때도 전적이 대단하셨어요?

=아마추어 같은 경우는 한 경기를 우승하려면 5,6번은 이겨야 결승까지 올라가서 우승하거든요. 프로는 한 번 시합하고 몇 개월도 있다가 하지만 아마추어는 매일 싸웁니다. 일주일 동안 싸워서 토너먼트 형식으로 올라가니까 당시에는 한 체급당 70명 정도가 나왔어요. 이 인원으로 두 명씩 일주일 동안 계속 싸워서 결승까지 가는 거예요. 아마추어 경기가 더 힘든 이유는 오늘 싸움이 끝나면 자기 체중을 맞춰야 하니까 사우나 가서 땀을 빼는 거죠. 다음날 시합에 나가고 또 다음날 사우나 가서 빼고, 이런 반복을 계속 해요.

▶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도 출전하셨어요?

=제가 8강에서 졌어요. 저한테 이긴 선수가 금메달을 땄어요. 당시에 분한 게 하나 있는데 30년 전인 70년대는 코리아가 지도상에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을 때이고 또 통역관들이 가기는 했지만 영어를 잘 못해서 복싱외교를 잘 못했어요.제가 시합마다 RSC(TKO) 승으로 올라갔는데 쿠바 선수와 붙었어요. 쿠바는 복싱 강국인데 프로가 없으니까 아마추어가 더 센 거죠. 아마추어는 심판이 5명인데 2명은 제가 이겼고 2명은 쿠바 선수가 이겼는데 1명이 동점이 나왔어요. 아마추어는 동점이 나올 수가 없는데 이럴 때 심판은 자기 마음이에요. 저 선수가 자세가 좋았다 혹은 더 공격적이었다, 이런 주관적인 판단으로 결정을 내리는 거죠. 결국 저는 8강에서 떨어졌고 저한테 시합하면서 졌던 선수들은 은메달, 동메달을 땄고요. 저한테 와서 자랑을 하더라고요.(웃음) 그 중에 독일 사람이 오더니 저한테 흥분해서 뭐라고 하는데 영어를 못하니까 통역관이 대신 이야기를 해줬어요. 자기가 볼 때는 당신이 이긴 것 같은데 마음이 안타깝다고 격려를 많이 해준 기억이 있네요. ▶ 보통 실업팀으로 가는데 동아대학교로 진로를 선택하셨어요?

=당시에 일반인들이 바라보는 복싱선수는 불량하거나 구두닦이, 헝그리한 사람들이 하는 스포츠라고 생각했었어요. 고2 때 국가대표가 돼서 아시안 게임 때 금메달을 따니까 각 계 실업팀에서 유혹이 많았는데, 그때 실업팀에서 저한테 월급을 60만원을 주겠다는 거예요. 선생님들 월급이 20만원이었고 한 학기 등록금이 60만원이었어요. 그러면 1년 월급이 720만원인데 그래도 대학교를 선택한 것은 대학교를 들어가면 학교 마크를 등에 달고 뛸 수 있었어요. 실업팀에 들어가면 회사 마크를 달고 뛰었겠죠. 그것보다 ‘동아대학교 박찬희’라고 하면 대학생도 복싱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 기네스북에도 오르셨다고요?

=대학생이 세계 챔피언이 된 건 저 혼자만은 아닌데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세계 챔피언이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대학 재학생 중에서 세계 챔피언이 된 사람은 아직까지 저밖에 없는 거죠. 몰랐는데 아는 선배가 저보고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알려주더라고요.

약소국가 설움 딛고 세계 챔피언 벨트 획득

▶ 프로로 전향한 건 언제였나요?

=계속 국가대표로 활동하다가 77년 8월에 프로로 데뷔를 했어요.

▶ 프로로 전향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 8강에서 졌는데 30년 전에는 우리나라가 약소국가였어요. 아마추어는 웬만큼 이겨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일방적인 KO패나 어린애가 봐도 저 사람이 이겼다는 걸 알 정도가 되어야 순위에 올라가는데 복싱이라는 게, 세계 챔피언과 세계 1위, 올림픽 금메달, 은메달이 모여서 치루는 경기에서 백지 한 장 차이로 승패가 나는 것이지 국가대표로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의 차이가 나지 않거든요. 그래서 내가 대한민국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건 어렵겠다, 그렇다면 아예 프로로 가서 세계 챔피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1977년도에 프로로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이었는데 만약 이걸 기다리면서 아마추어 선수를 했으면 모스크바 올림픽이 보이콧이 되었기 때문에 대회에 못 나갔을 거예요. 뿐만 아니라 세계 챔피언도 못 했을 텐데 77년도에 프로로 가서 79년도에 세계 챔피언이 된 것은 저에게는 큰 행운이었어요. 80년도 올림픽을 못했다면 그다음 84년도에 있을 올림픽을 기다렸을 텐데 그때는 이미 나이도 있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프로에 잘 간 것 같아요.

▶ 프로 첫 경기 기억나세요?

=원래 프로에 데뷔하면 4R 오픈 경기부터 몇 번 뛰다가 6R, 8R, 10R 이렇게 올라가야 되는데 저는 국가대표 경력이 있다 보니까 한국권투위원회에서 8R를 뛸 수 있는 자격을 준 거예요. 그런데 제가 프로로 데뷔하면서 프로 랭킹하고 싸운 경험이 없는데 그들하고 경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일본의 1위인 무토 즈지 선수와 경기를 했는데 프로선수들이 아마추어선수들보다 좀 느려요. 프로는 라운드가 길기 때문에 힘을 분배하면서 싸우지만 아마추어처럼 3R로 끝나지는 않거든요. 아무래도 동작이 느리기 때문에 일본 선수를 1R에 KO를 시켰어요. 시합 끝나고 나서 일본 매니저가 왔어요. 지금까지 시합을 봤는데 손이 안 보이더라, 나중에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한국을 떠났어요. 자기 선수를 KO시킨 사람한테 와서 격려의 말을 해준 외국 코치가 상당히 고맙더라고요.

▶ 프로로 데뷔한지 얼마 만에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신 거죠?

=1년 반 만에 10전의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게 된 거죠.

▶ 챔피언 상대가 그 유명한 멕시코의 미구엘 칸토 선수였군요.

=그 선수가 워낙 복싱을 잘 해서 별명이 대학교수였어요. 이 선수하고 붙는다고 하니까 긴장이 되더라고요. 모든 선수의 꿈이 세계 챔피언이 되는 거고 만약 챔피언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챔피언과 한 번 붙어보는 거거든요. 갑자기 준비하게 돼서 한 달 반전에 알게 되었어요. 죽기 살기로 연습했죠. 지금은 12R지만 당시에는 15R였기 때문에 운동량을 늘려야 그만큼 뛸 수 있었거든요. 세계 챔피언이 되어야겠다고 목표가 서니까 배가 고파도 배고픈 줄 모르고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겠어요. 아침에 운동을 나가면 저는 뛰고 차가 따라와요. 평지도 뛰고 고바위도 뛰는데 어디를 뛰나 똑같더라고요. 무조건 세계 챔피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힘든 줄 모른 거죠. 버스가 출발할 때 같이 뛰면 나중에 버스가 속력을 내면 못 따라가지만 어떤 때는 버스를 앞지를 때도 있었어요. 세계 챔피언 도전자가 될 때는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럴 거예요.

▶ 링에 오를 때 도전자가 먼저 나가고 챔피언이 나중에 나오잖아요.

=링에 챔피언이 올라와서 경기가 시작되는데 그때의 긴장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잘 안 들려요. 오늘 내 생애에 세계 챔피언이 되느냐 안 되느냐, 세계 타이틀 도전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싸우는 거죠. 오직 저 선수를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그 생각밖에 없어요. 체구는 저와 비슷했어도 미구엘 칸토의 경력은 저보다 3,4배는 더 많았어요.

▶ 전략은 어떻게 짜셨어요?

=시합 전부터 미구엘 칸토의 태도를 많이 보고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했어요. 물론 코치님도 어떻게 싸우라고 지도도 해주지만 올라가서 싸우는 건 선수 자신이거든요. 잘 응용해서 싸워야지 코치가 말 한 대로만 이기면 지는 사람은 없잖아요. 내가 이렇게 싸워야지 했던 게 다 들어맞아서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몇 회쯤 하니까 이기겠다는 확신이 들던가요?

=KO는 실력과 운이 따라야 하는데 1,2R만 싸워보면 판단이 나와요. 맞아보니까 펀치력은 강했지만 1,2R 싸우면서 그 선수의 단점을 다 파악했죠. 내가 작전대로만 싸우면 이기겠다, 칸토 선수가 레프트 훅을 잘 치니까 이것만 안 맞고 잘 저지하면 되겠다는 게 있었고 또 경기를 하다 보면 1R가 3분이잖아요. 아무래도 심판들한테는 앞에서 잘 싸운 1분 보다는 뒤에서 잘 싸운 1분이 기억에 남아요. 그래서 코치님과 매니저님한테 끝나기 30초 전에 알려달라고 했어요. 그러면 마지막 30초에는 공격을 적극적으로 했어요. 그때 심판이 한국인 1명, 멕시코인 1명, 외국인 1명이었는데 멕시코 심판도 제한테 점수를 줬어요. 15R 판정승으로 미구엘 칸토 선수를 이겼죠.

2개월마다 열린 타이틀 매치, 선수생명 단축시켜

▶ WBC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벨트를 차고 3차 방어전의 에스파다스 선수를 2회 KO로 이기셨는데 당시 멕시코는 복싱 강국이었잖아요.

=경량급들이 강국이었어요. 저처럼 플라이급, 밴텀급들이 강국이었죠.

▶ 미구엘 칸토 선수한테 진 오쿠마 쇼지 선수한테는 유독 약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15R 판정승으로 미구엘 칸토 선수를 이겼고 3차 방어전에서 에스파다스 선수를 KO로 이겼거든요. 오쿠마를 판정으로 이긴 사람은 미구엘 칸토에요. 또 멕시코의 에스파다스는 일본에서 오쿠마를 KO로 이겼어요. 오쿠마를 KO로 이긴 사람을 제가 KO로 이겼고 오쿠마를 판정으로 이긴 사람을 제가 또 판정으로 이겼는데 오쿠마한테 챔피언 벨트를 넘겨준 거죠. 오쿠마 스타일은 변칙 스타일이라, 좀 지저분해요. 게임이 안 풀리더라고요. 또 오쿠마가 왼손잡이인데 제가 왼손잡이에 약해요. 오른손잡이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경기를 하는데 불편하지 않는데 왼손잡이는 아무리 실력이 약해도 경기를 잘 못 풀겠어요. 그때 우리가 지명방어전을 할 때인데 매니저가 생각할 때는 오쿠마 정도는 가볍게 이길 거라고 생각해서 경기를 치렀는데 저한테는 아주 안 좋은 선수였죠.(웃음)

▶ 주먹이 약하다, 뒷심이 부족하다,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하다는 말도 들으셨어요.

=친구인 김태식 선수 같은 경우는 돌주먹이라고 소문이 났잖아요. 대신 박찬희는 테크닉이 좋다는 소문이고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 아마도 하늘에서 저한테는 빠른 스피드와 테크닉을 주셨고 김태식 선수한테는 주먹 센 걸로 해봐라 하지 않았을까요. 개인적인 특기를 살려서 알아서 챔피언을 해봐라 한 것 같아요.제가 처음 세계 챔피언에 도전했을 때가 23살 때였는데 15R를 뛰어도 힘이 남아돌았어요. 그 이후에는 10R만 뛰면 힘이 없는 거예요. 매 경기를 1달 반 내지는 두 달에 걸쳐서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간이 필요했는데 다음 시합 준비하느라고 너무 혹사시킨 것 같아요. 가면 갈수록 시합을 할 때마다 힘이 없어지더라고요.

▶ 경기를 왜 그렇게 짧은 기간에 잡은 거죠?

=그 시기가 참 어려운 시기였어요. 국가적으로도 또 국민경제생활도 어려울 때니까 내가 세계 챔피언을 오래, 많이 해서 외화도 많이 벌고 국위선양도 해야겠다는 욕심 때문이었죠. 세계 타이틀 도전을 받는 것을 너무 빠른 시기에 해서 한 달 20일 만에 받은 적도 있고 2개월을 넘기지 않았어요. 당시에 프로복싱이 인기가 좋을 때라서 매니저가 돈을 많이 벌었어요. 세계 타이틀을 놓고 경기를 하면 광고주들이 몰리니까 매니저가 받는 돈이 5천만 원 정도였어요. 굉장히 큰 돈인데 6개월에 한 번 하는 것보다 3번씩 경기를 하면 1억 5천만 원이잖아요. 23살 어린 나이에 저도 돈 벌고 매니저님도 돈 벌고 서로 좋으니까 휴식 없이 경기를 치룬 거예요. 계산을 해보니까 도전하고 나서 1차~6차까지 모두 7번의 세계 타이틀을 1년 4개월 동안 했더라고요.

▶ 관중동원을 위해서 설 연휴 같은 명절 때 유치했던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할 때는 복싱이 인기가 아주 대단했어요. 또한 다른 운동 종목도 많이 없다 보니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예요. 어떤 선수가 타이틀 매치를 놓다 경기를 한다고 하면 방송국에서 계속 스팟광고가 나가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기억을 하셨겠죠. 또 당시에는 TV가 별로 없으니까 다방 같은 데에 날자, 선수, 복싱경기 한다고 보는 데서 써 붙이곤 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체육관에서 경기를 할 때마다 다 못 들어오셔서 입구에서 들여보내달라고 아우성치고 유리창 깨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 복싱 경기는 관중동원을 위해서 무료입장도 시키고 표도 많이 돌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

미남복서, 대학교 때 미팅 한 번 안 해

▶ 미남 복서, 대학생 챔피언이라는 것 때문에 여성들로부터 팬레터도 많이 받으셨죠?

=아나운서 분들이나 주위에서 저보다 잘 생긴 사람들이 많았는데 미남 복서라고 소개해 주셔서 고마웠고 보통 팬레터가 오면 여성들한테 많이 와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봤을 때 챔피언이 경기 끝나고 자기들 키보다 더 큰 트로피 받고 챔피언 벨트 차는 게 멋있게 보여서 그런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인물 있겠다, 대학생이겠다 해서 여자들이 줄줄이 따랐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세계 챔피언이 아니었다면 여자들과 데이트도 하고 시간도 많았을 거예요. 저는 대학교 4년 내내 미팅 한 번 못해보고 졸업했어요. 학교 친구들도 미팅 있을 때마다 제가 챔이언이고 하니까 데리고 나가고 싶어 했는데 안 나가겠다고 했어요. 미팅 나가서 친해지면 차도 마시고 밥도 먹을 텐데 애인 사이라고 다른 오해까지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요.여자는 그냥 일반 남자랑 사귀면 좋을 텐데 박찬희와 사귀면 저 여자, 옛날 세계 챔피언 박찬희 애인이라고 표가 나지 않겠어요? 그 여자와 사귀다가 좋아져서 결혼까지 하면 다행인데 헤어지게 되면 나중에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될 때 박찬희 옛날 애인이라면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해서 여자의 장래에 지장을 줄까봐 미팅을 한 번도 안 했어요. 또 고등학교 때 국가대표를 했기 때문에 태릉선수촌에서 합숙을 했어요. 일요일 아침에 외출했다가 저녁 7시까지 들어와서 저녁 먹고 다음날 연습을 준비하거든요. 태릉 쪽이니까 대한체육회 버스를 타고 서울운동장까지 가다 보면 청량리 역을 꼭 지나가요. 일요일 여름이면 남녀 쌍쌍이 배낭 메고 가는 모습을 많이 봤거든요. 그러면 저도 고등학생 사춘기인데 여자애들도 만나고 싶고 등산도 같이 가고 싶죠. 하지만 너희들이 놀 때 이번 아시안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가지고 와서 이만큼 땀 흘리고 운동한 결과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금메달을 따게 됐죠. 악으로 더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된 것 같아요.

▶ 주먹 하나로 한국이 세계 1등이 되는 것에 자긍심과 용기를 국민들에게 심어줬어요.

=30년 전에는 지금보다 대한민국이 약소국가였잖아요. 세계에서 1등을 하는 것이 국민들에게 힘이 되었던 것이 복싱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거죠.

▶ 너무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하셨어요.

=제 신조가 지는 날이 은퇴하는 날이었어요. 도전할 때 마음보다 방어할 때 마음이 정신적으로 더 헤이해지더라고요. 복싱은 특히 맞는 운동이기 때문에 오래할 건 못 돼요. 그래서 젊을 때 경기하고 그만둬야지 하는 마음으로 2달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 타이틀 매치도 응했고 24살에 은퇴를 했어요. 은퇴하고 나서 가장 중요한 게 뇌잖아요. 그래서 병원에 가서 뇌검사를 했는데 의사선생님이 정상인과 똑같으니까 걱정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지금도 안경을 안 쓰는데 복싱을 하다 보면 머리도 맞고 눈도 맞기 때문에 눈이 나빠져요. 김태식, 장정구, 유명우 선수 등 세계 챔피언을 했던 선수들 중에 8,90%는 안경을 쓸 거예요. 얼마 전에 안경을 맞출까 싶어서 시력 테스트를 했는데 아직도 양쪽 다 1.5에요.

▶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아들 하나만 두었어요.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못 살 때고 어려울 때라서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운동이 있었어요. 첫째가 딸이었으면 아들을 낳으려고 하나 더 낳았을 텐데 아들이다 보니까 더 낳지는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딸이 있었으면 해요. 물론 당시에 하나 더 낳았다고 딸을 낳는다는 보장은 없지만요.(웃음) 아들은 지금 영화배우 데뷔를 준비하고 있어요.

▶ 작년 12월에 염동균 선수와 함께 ‘복싱 성대결’이라는 재미있는 이벤트를 하셨어요.

=복싱의 발전을 위해서 전 챔피언들이 모여서 경기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나이가 있어서 오래 못 뛰니까 시범경기로 2R만 뛰자고 얘기하고 여자 세계 챔피언과 경기를 하게 되었죠. 권투는 장난이 아니라서 형제끼리 링 위에서 스파링을 시키면 처음에는 살살 하다가 한 대 맞으면 약이 올라서 서로 때리고 그러다 보면 장난이 안 되는 거예요. 여성 코치가 복싱은 장난이 아니니까 2R 알아서 하시라고 하는데 저도 그게 편했어요. 그래서 과거처럼은 안 했지만 진지하게 했어요.

사각의 링에서 배운 인생, 그래도 복싱하고 싶어

▶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시면 어떤 삶을 사신 것 같으세요?

=선수 생활에 후회는 없다. 젊음이 있고 다시 태어난다면 그래도 복싱을 하고 싶어요. 지금은 복싱의 인기가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제가 세계 챔피언을 했을 당시의 인기를 생각하면 어떤 다른 운동보다 복싱을 하고 싶어요.

▶ 복싱선수들도 이종격투기로 많이 빠져나가고 국민들의 관심도 덜해지고, 복싱계의 현실이 안타까울 때가 많으시겠어요.

=과거 생활이 어려울 때는 복싱 잘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면 돈과 명예도 얻고 또 올림픽 같은데 나가서 메달을 따면 죽을 때까지 연금도 받고, 이런 생각 때문에 복싱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살기 좋아지니까 운동을 하더라도 굳이 매 맞는 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옛날에는 체육관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몇 백 명씩 있어서 자리가 없었어요. 선배쯤 되면 저리로 가서 해, 라고 하겠지만 처음에 가면 몸만 풀고 오는 정도였어요. 중국이 메달을 따는 이유는 인구가 많아서 그래요. 복싱도 마찬가지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복싱만 한다면 우리도 좋은 선수가 많이 나오겠지만 지금 체육관에 가면 열 댓 명 정도가 복싱을 하겠다는 사람들이에요. 당시에 비하면 몇 십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되니까 좋은 선수가 안 나오죠.

▶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운동을 그만두는 날부터 이런 마음을 먹었어요. 운동 그만둘 때 우리나라가 힘든 시기였잖아요. 공부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한테는 학비를 대주고 싶고 운동에 소질은 있는데 먹고 잘 곳이 없으면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은 게 제 꿈이었어요. 저처럼 운동만 하다가 사회에 나오니까 아무래도 사업하는 사람들보다는 뒤쳐지잖아요. 그래도 챔피언을 했던 때처럼 돈을 많이 벌어서 수재연금, 불우이웃돕기 등 좋은 일을 하고 싶고 그런 말을 듣고 싶어요. 현재는 그런 일을 못하는 게 안타까워요. 지금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국민들과 팬들에게 약속하지만 박찬희가 돈을 많이 버는데 이런 일을 안 하면 이름과 성을 갈겠어요. 꼭 실천하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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