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많이 가지려 발버둥치며 살아온 삶 반성"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시인 도종환

<접시꽃 당신> <부드러운 직선> <해인으로 가는 길>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등 서정적인 시와 산문을 발표해 온 도종환 시인.

그는 1998년 전교조 활동으로 교직에서 해직된 후, 10년 만에 복직해 교사와 시인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다 5년 전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병을 앓으며 아쉽게 교직을 떠나야 했는데요. 지금은 충북 보은군 산속 ‘구구산방’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며, 시와 산문을 쓰고 있습니다.

‘산 속에서 나무, 풀, 들짐승과 더불어 살면서 그동안 도시에서 너무 지지 않으려고, 너무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치며 살아온 삶을 반성한다’는 도종환 시인. 4년 만에 신작 산문집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를 발표한 시인 도종환 씨를 2월 2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자연 속 ‘구구산방’에서의 5년 생활... 아픈 몸도 많이 회복돼

▶ ‘청안(淸安)하다’는 표현이 아주 좋은데요?

제가 요즘 인사를 하거나 누구에게 안부편지를 쓸 때 이 말을 즐겨 쓰고 있어요. ‘맑을 청(淸)’, ‘편안한 안(安)’인데요. 그 동안 인사법과 조금 다른 것이 맑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인데요. 제가 만들어 낸 말은 아니고요. 청화스님이라고 얼마 전에 돌아가신 큰스님께서 쓰시던 표현을 제가 책에서 보고 참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이면 마음이 맑고 편안하게 지내시기를 바라는 뜻으로 제가 좋아해서 즐겨 쓰고 있습니다.

▶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는데, 산 속에서 살고 계시다고요?

누가 산속에서 오래 살면 혹시 도인되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하시고 걱정하시기도 해요. 혹시 세상을 완전히 초월한 모습으로 도 닦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을 하시는데요. 그런 것은 아니고 대신 몸과 마음의 평안함, 청안함을 되찾을 수 있어서 글쓰는 사람으로서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 그곳이 충북 보은인가요?

네. 충북 보은군 내북면입니다.

▶ 눈이 많이 내렸을 때 그 곳은 어땠나요?

눈이 많이 내리면 고립되죠. 걸어서 드나들어야 하고요. 눈이 많이 내리면 춥고, 산쪽이라서 보통 도시보다 5도 정도 더 낮고요. 서울이 영하 10도라면, 거기는 영하 15도 이하로 내려가죠. 저희는 수돗물이 안 들어와서 계곡물을 끌어다가 모터로 돌려서 쓰는데, 날이 추우면 그 물이 얼고 모터 자체가 동파되죠. 외떨어져 살 때는 물과 불이 제일 중요해서 고장나면 안 되는데, 그것이 툭하면 고장이 나서 겨울에 그 부분이 제일 힘듭니다.

▶ 그러면 직접 수리도 하시나요?

제가 하다가 안 되면 읍내에 부탁을 해서 고쳐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잘 안오시려고 해요. 오면 비포장 산길을 넘어오다가 차가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또 걸어서 기계를 들고 올라오자니 힘들고요. 그래서 겨울에 한 번 고장이 나면, 수리 하는 데 당장 안 되고 좀 날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 산방 이름이 ‘구구산방(龜龜山房)’인데요. 어떤 뜻인가요?

집모양을 위에서 보면 거북이처럼 보인다는 것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붙이게 되었는데요. 거기에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살자는 뜻이 있어요. 처음에는 몸이 아프니까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붙였는데, 지금은 그것보다는 가능하면 모두들 쫓기고 달려가며 사는 삶에서 조금 비켜서서 느리게 사는 삶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거북 구(龜)’자를 그렇게 뜻을 풀이하면서 사는 집이라고 이름 붙였죠.

▶ 도종환 시인께서는 원래도 느리게 사시는 것 같은데, 더 느리게 사셔야 하나요?

그렇지 않아요. 저도 몸이 아프게 된 원인이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같이 하면서 많은 일들을 다 잘할 것처럼 생각하면서 하다가 다 짐질 수 없는 것을 짐지려고 하다가 그 하중이 너무 커서 그만 몸에 무리가 따르게 되고 아프게 된 경험이 있죠.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느리게 산 것은 아니고요. 한동안은 지나치게 일 잘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바쁘게 살다가 다시 느린 삶의 회복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죠.

▶ ‘자율신경실조증’을 앓고 계시다고 하던데, 어떤 병인가요?

영양이 결핍되면 영양실조라고 하잖아요. 신경을 너무 많이 쓰면서 신경의 균형이 깨지는 병인데요. 나타나는 증상으로는 어지럽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그 후에 따라오는 증상으로는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작은 병이 걸려도 낫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되니까 다른 병에 걸리면 작은 병이라도 오래 오래 가게 되고, 이런 식으로 신경 균형이 깨지는 병이었는데요. 저도 이름을 처음 들어봤어요.

요즘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정말 열심히 살다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병으로 쓰러지는 경우가 특히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참 많죠.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병으로 환자가 되어있게 되면 참 산다는 것이 뭔가 하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열심히 산 대가가 이런 것인가 하는 것까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만들죠.

▶ 결코 무리하실 성격이 아니신 것 같은데요.

맡은 일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있어서 주어진 일을 외면하지 말고 다 잘해 보려고 한 것이 지나친 욕심이었던 거죠.

▶ 지금은 건강이 아주 좋아지신 건가요?

5년간 산속에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지냈거든요. 하던 일 모두를 다 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는 동안 몸과 마음의 균형이 되찾아지고 옛날보다 건강이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 산과 자연에서 살기만 하면 건강이 되찾아지는 건가요, 아니면 특별한 것을 잡수신 건가요?

지금 삶의 리듬을 되찾기만 한다면 자연 속에서 사는 그 삶 자체로 몸과 마음의 균형은 얼마든지 되찾아진다고 저는 믿고 있고요. 특별한 약을 먹어야한다기보다 자연히 산속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 채식위주의 식사습관을 갖게 되고요. 식사량도 작아지게 되고요. 또 일단 마시는 공기와 물 자체가 기본적으로 다르고요.

아주 기본적인 그런 요건만 갖춰도 몸은 얼마든지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모든 병이 사실은 마음에서 온다고 하잖아요. 저도 그렇게 믿고 있고요. 그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것이 몸에 균형을 되찾는 지름길이기도 하고요.

▶ 그러면 농사도 직접 지으시나요?

농사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요. 텃밭을 일구는 정도입니다.

◇ 내가 울면서 쓰지 않은 글은 남도 울면서 읽어주지 않죠.

▶ 4년 만에 신작 산문집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을 내셨는데요.‘지금 숲은 적빈(赤貧)입니다. 지녔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맨 몸입니다. 지금 숲은 적막입니다. 텃새들조차 목소리를 낮춘 채 날개를 접었습니다. 밤에는 적멸이고 아침에는 고요가 안개처럼 산을 덮고 있습니다. 적막 속에서 그대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립니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지금 겨울풍경이 그렇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해서 지내기가 참 좋은데, 겨울에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죠. 동네와도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에 헐벗은 나무들 사이 골짜기에 혼자 있는 풍경이 아주 삭막하고 적막하고 아주 고독하죠. 제가 이 책에서 말하는 ‘숲’이라고 하는 것은 나무가 많은 것인데요.

나무가 하나도 없는 곳은 사막이락 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막의 개념과 숲의 개념, 두 개를 대비시켜서 보고자 했던 것인데요. 사막은 살기가 힘들고 지치고 목마르고 도처에 원수가 숨어있다고 느끼고, 그래서 우리를 보호해줄 신을 향해서 일사분란하게 뒤를 따르면서 숭배하고, 그러면서 한 손에 경전을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그런 종교를 가지게 되고요. 이런 곳을 ‘사막’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이 다 문학적인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도시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이 사막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그 반대의 개념인 ‘숲’은 그런 원수는 찾을 길이 없고 같이 상생해야 할 것들과 함께 있고, 내 안에 되찾아야 할 신성이 있는 곳, 그런 공간, 그런 영성의 시간을 함께 포함한 개념을 저는 숲이라고 보았죠. 그래서 쫓기듯이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서 느리게 사는 삶을 회복하고 공생공존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숲으로 오시라는 의미, 그런 삶을 선택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죠.

▶ 이 산문집의 첫 번째 글제목이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인데요. ‘그 동안 너무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살아왔다’라는 뜻으로 전달이 됩니다. 몸이 많이 아픈 후에 자기반성과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거든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에서 늘 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쳐야 하고, 또 아이들과 가족들, 주위사람들에게 어쨌든 낙오해서는 안된다, 져서는 안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살다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인데, 끝없이 져서는 안된다는 강박 속에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글쓰는 사람으로서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살다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습니다. 어느 때는 너무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지는 것도 괜찮다고 받아들여 보세요.’ 라고 하면서, 가능하면 폭력이나 힘에 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음악, 아름다운 풍경에 져본다거나 하는 삶을 선택해 주셨으면 하는 이야기를 글쓰는 사람이라서 하게 되는 것이죠.

▶ 어릴 때부터 꿈이 작가이셨나요?

작가는 아니었고요. 어릴 때는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 길로 못가고 길을 잘못 들어서 글쓰는 길로 오게 되었죠.(웃음)

▶ 고향이 청주이시죠?

네. 충청북도 청주입니다.

▶ 조용하시고 법 없이도 사실 것 같은 부모님 아래서 사셨을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인 심성의 아주 중요한 부분은 어머니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해요. 물론 한 사람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도 있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도 있을 텐데요. 그 중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격 중에 문학과 관련된 심성들은 어머니로부터 받았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 도종환 시인은 고운 심성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 있으신데요. 화를 낸 적도 있으신가요?

물론 화를 낸 적도 많죠. 그런데 이번에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이라는 책을 쓰는 기간인 약 4~5년 동안 화를 내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 전혀 예정에 없는 질문입니다만, 술먹고 주정을 해보거나 싸워보신 적도 있으세요?

대학교 문학청년 시절에는 문학 한다는 이유로 술도 많이 먹었죠. 싸우지는 못하지만, 술먹고 당시의 문학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객기를 이른바 ‘퇴폐적 낭만주의’라고 부르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죠. 저도 똑같이 그런 시절을 보냈고요. 그 시절에서 실수도 많이 하고 잘못도 많았고요. 그 시절에서 출발해서 20여년 글을 쓰며 지내오는 동안 최근에는 특별하게 화를 내는 일들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 사춘기 때 부모님께 편지도 많이 쓰셨나요?

그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서 객지로 떠나시고 저는 외가에 맡겨져 있었는데요. 외가에서 그 당시에 밤10가 되면 라디오에서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부모님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십시오.”하는 방송이 나왔어요. 그 방송이 나올 때 시그널 뮤직이 아주 가슴을 흔드는 클래식 음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러면 정말 집으로 가고 싶은데 갈 수는 없고요. 아주 멀리 타도시로 떠나셔서 보고는 싶은데 볼 수는 없고 또 할 말도 있고 누군가에게 하소연도 하고 싶고, 참고서를 한 권 사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처지도 못되니까 편지를 자주 썼는데요.

국어선생님이 가르쳐 주시길, 편지를 쓸 때는 맨 앞에 먼저 계절인사를 쓰고 상대방 안부를 묻고 내 안부를 이야기하는 순서로 써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순서 그대로 계절인사 몇 줄을 쓰기 위해서 주위를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을 갖게 된 거예요.

지금 나뭇잎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날씨가 어떤지, 별이 떴는지, 바람은 어떻게 부는지를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쌓여서 그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에 편지를 쓴 것이 나중에 글쓰는 사람이 되는 것에 중요한 토대가 될 줄 그 때는 몰랐죠. 울면서 보고 싶어서 편지 쓰고 또 쓰고 아주 정성을 들여서 썼던 중학교 시절이 있었죠.

▶ 정말 감성이 온연히 자라는 시간이 되었던 거네요.

정말로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울면서 쓰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글쓰는 사람이 되어서 생각해보니까, 내가 울면서 쓰지 않은 편지는, 내가 울면서 쓰지 않은 글은 남도 울면서 읽어주지 않는다는 거죠. 나중에는 ‘문학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죠.

◇ 해임과 투옥... 감옥에서 읽은 아들 편지에 눈물 펑펑

▶ <접시꽃 당신> 때문에 좌천까지 당하셨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 인가요?

저희가 그런 시절을 산거죠. 시 하나하나도 공연히 이상한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요. 암과 싸우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라든가, 암이라는 시한부 삶을 살아야 하는 조건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제발 좀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해봤으면 좋겠다, 이 병은 희망이 없지 않는가?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하면 참 행복할 것 같다.’라고 써놓으면, 이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을 유추해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희망’과 ‘싸움’의 의미가 뭐냐?”하는 식으로 조사를 받고, 쫓겨나게 되는 시절이 예전에 1980년대에 있었죠.

▶ 전교조 활동을 해서 교직에서 해임되고, 투옥까지 되시고요. 전혀 이런 풍파와는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저 같은 사람도 어떠한 일을 맡아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절을 살았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의 권유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또 시골학교의 선생을 하면서 ‘그래, 선생노릇 잘 하자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도 함께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고, 또 선배니까 책임도 맡게 되고, 책임을 맡았다는 이유로 어려움도 겪고 그런 시절을 살았죠.

그러니까 문학을 통해서 가지고 있던 세계관과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할 때,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옳은 것을 알면서도 바르게 행치 않는 것도 죄다.’라고 하는 기독교적 사유, 이런 것들이 안해본 일, 처음해본 일을 책임맡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고, 당시에는 젊은 교사로서 그것이 옳다고 믿었어요.

▶ 그 때 시대적인 상황이 워낙 복잡하기도 했었죠.

네. 아이들이 자살을 하는 것을 지켜볼 때, 교사입장에서 ‘입시지옥 때문에 아이들이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올바른 교육구조를 만들 수 있다면 함께 하자.’는 생각도 있었고요.

▶ 그런 와중에 경제적인 문제, 생활의 어려움도 절실할 때가 많으셨겠어요?

어려울 때도 많았죠. 많은 분들은 제가 베스트셀러 작가니까 돈도 많이 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런데 해직기간이 10년 정도 되었다는 것은 생각을 못하시고, 돈을 많이 벌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어쨌든 해직기간에도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 때도 마음속으로 ‘큰일났다, 굶어주게 생겼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보다는 조건이 낫다고 생각했었고, ‘하늘을 나는 새와 들에 핀 저 꽃들도 저렇게 먹이고 입히시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굶어주게 내버려 두시겠는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기간을 잘 보냈습니다.

▶ 혹시 해직, 투옥된 것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는 생각이 드시지는 않나요?

처음에는 너무 어이가 없고 ‘아니, 내가 왜 여기 와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다가, 그 다음에는 두고온 아이들 걱정이 많았어요. 그 때 아이들이 어렸거든요. 그 아이들 때문에 마음이 아팠고, 또 어른들께 죄스러웠고요. 엄마 없는 아이들을 부모님께 맡기고 온 꼴이 되버려서 너무 내가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도 제게 “너는 참 무책임하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냐? 네가 이런 식으로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아주 부자간에 연을 끊겠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네 자식을 네가 책임져야지, 왜 늙은 우리한테 맡기고 네가 옳다고 믿는 일만 할 수가 있냐?”하는 것 때문에 심하게 화를 내시고, 제가 갇혀 있는 동안 처음에는 면회도 안 오셨어요. 그런 면이 저는 부모님께 굉장히 죄스러웠고요. 아이들에게 미안했고요.

그런데 한 번 교도소 안에서 아들이 쓴 편지를 받은 적이 있어요. 제가 밖에서는 선생인데 남의 자식 바르게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정작 내 자식에게 한글을 못 가르치고 들어왔는데, 어디서 한글을 배워서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것을 받고서 참 많이 울었어요. 그 편지를 받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뾰족한 막대기로 감옥의 벽에다가 하얗게 그어서 십자가를 만들고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어요.

‘제가 지금 이 아이들을 업어줄 수도 없고, 가르쳐 줄 수도 없고, 지금 이렇게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당신이 키워주시고 자전거를 밀어주시고 노래도 들려주시고 해주십시오. 그렇게 제가 지금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던 기억이 있어요. 이제는 그런 일들이 없어야죠.

▶ 지금 ‘한국작가회의’의 사무총장을 맡고 계신데요. 어떤 일을 하시는 건가요?

한국작가회의라는 단체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문인들이 거의 다 모여있는 단체인데요. 제가 나가서 상근을 하면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고요. 전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인데요. 저희 단체에 소속된 분들을 보면, 소설가로는 황석영, 박경리, 박완서, 조정래님과 같은 대표적인 분들이 계시고요. 또 시인으로는 고은, 신경림, 정호승, 안도현, 김용태 님, 평론가로는 백낙청, 염무웅 님 등 이런 문인들의 모임이예요.

그런데 다른 회원들 중에는 학교나 직장에 있거나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니까 그 단체의 책임을 맡는 일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이른바 봉사를, 제가 ‘공익근무’를 2년간 맡게 되었습니다.(웃음)

▶ 시집같은 경우도 예전처럼 베스트셀러도 나오지 않고, 요즘 ‘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실감이 되시죠?

시장에서 현저히 관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을 출판사나 작가들이 피부로 느끼죠. 초판을 2천부 찍던 것을 1천5백부로 찍고 있고, 한국 소설들도 황석영, 공지영 등 몇 작가들 이외에는 거의 외국소설을 선택하고 한국소설들은 선택하지 않고, 이렇게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도 줄어들고, 독자들로부터도 선택을 잘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죠. 그래서 좀 안타깝죠.

▶ 타개를 위한 대책은 없으신가요?

지금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요. 일단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일수록 문화예술에 공적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얼마나 어떻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시장에서 외국의 유명한 작가들과 우리 작가들을 동시에 공개경쟁시장에 내놓여져 있는 것을 보면서, 좀 좋은 후배들, 젊은 작가들을 육성하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나 투자, 그것을 문화부나 문화예술위원회 뿐만 아니라 기업에게도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외국작가들은 예를 들면 개미에 관한 소설을 썼다고 하면 과학자들보다 개미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로마 역사에 대해서 소설을 썼다고 하면 로마 역사에 대해서 역사학자보다 더 많이 알고 그 책을 쓰는 것, 그런 것들이 그 쪽 책을 선택하게 되는 요인 중에 하나거든요.

우리도 그렇게 국문과, 문창과에서 문학만 가르치지 말고, 문학, 역사, 철학, 종교, 과학 등을 아주 깊이있게 가르치는 ‘펠로우십’제도를 두어서 1년에 15명, 20명 정도로 약간만 뽑아서 장학금을 주고 2~3년 제대로 공부시켜서 가능성 있는 작가로 키워내야지만 경쟁력이 있고 미래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어디 가면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좀 도와달라, 기업에서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기회 닿는대로 말씀을 드려요. 노벨상 받을 때만 되면, 이번에 우리가 받네 못받네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투자를 해야 한다는 거죠. 투자를 해서 좋은 젊은 후배 문인들을 길러내야 다시 문화의 영향력도 되찾는다고 생각합니다.

▶ 철학의 깊이나 삶에 대한 통찰력 면에서도 외국 작가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픈 지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학교 공부를 끝내고 사회에 나올 때 고민들을 하는데요. 전업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직장을 잡아서 생계를 해결할 것인가 고민하는 그 시기에 있는 가능성 있는 젊은이들을 선발해서 그들에게 예를 들어 1년에 2천만원씩 주고 2~3년을 교육시켜서 제대로 공부하도록 바탕을 만들어 준다면, 이런 것들이 1년에 5웍원 정도면 운영비까지 가능하다고 보거든요. 그런 문학원 같은 것을 운영해서 역량있는 작가를 놓치지 말고 키웠으면 하고 바랍니다.

출판사에서도 누가 좀 재주가 있어 보이면 가져다 쓰려고만 생각하지, 투자해서 키울 생각은 안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요. 출판사 중에는 책을 엄청나게 많이 팔아서 돈을 많이 번 회사도 많은데요. 그런 출판사에서 이렇게 길러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베트남 평화학교’ 건립도 그런 의미가 있으신 건가요?

그것은 우연한 기회에 문화예술 교류를 베트남쪽과 그쪽에 계신 분들이 학교가 없어서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를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학교를 하나 지어줄 수 있겠냐고 제안을 해오셨어요.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가 베트남이라고 해요. 젊은 인구들이 많고 어린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전후 30년 동안 아이들을 많이 낳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학교가 부족해요.

그래서 처음에는 어디 자치단체에서 돈을 받아다가 지어줄까 생각을 하다가 ‘우리가 지금 문화예술 교류를 하고 있는데, 문화예술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생각하던 차에, 제가 그 때 마침 시집을 낸 것이 있어서, 그 시집 인세를 일단 아름다운 재단에 다 내놓고, 그것으로 학교를 지어보자고 해서 그림도 팔고, 노래하는 친구들에게 자선공연을 부탁해서 돈을 모금하고 해서, 작년 9월 달에 학교를 준공해서 베트남 어린이들에게 학교를 만들어 주었죠.

◇ 바쁜 삶이지만 우리 문학을 통해 삶의 여유를 되찾았으면

▶ 다시 산방 이야기를 해볼께요. ‘심마니 집배원’은 어떤 분인가요?

‘심마니 집배원’이라고 하는 사람은 제가 붙인 별명이예요. 저희 집에 오는 집배원인데요. 토, 일요일이 되면 약초나 산삼, 산도라지를 캐러 다녀요. 시골에는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만 계시잖아요. 그런데 편찮으시고 아프고 수술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 약초 캔 것을 전부 돈 하나도 안 받고 가져다 드리고, 평상시에는 우편물 가져다주고 나면, 예를 들어 전기요금 고지서를 주고 나면, 할머니들이 그 요금 하나 내러 또 읍내까지 나오실 수 없으니까 고지서 가져다 드리고, 다음에는 돈 받아다가 내고, 다음에는 영수증 가져다 드리고요. 또 아프다고 하면 약도 사다 드리고, 농약이 필요하다고 하면 농약도 사다드리고요. 그런 심부름을 하기 때문에 도시에 나와 사는 자식들보다 더 사정을 잘 알고, 제가 볼 때는 거의 복지사 수준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잔일, 궂은일을 돕고요. 그것뿐만 아니라 늘상 일상적인 태도가 몸에 어떻게 배어 있는가 하면, 그냥 우편물만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 오늘 가는 집중에 누가 어디가 안 좋지.’하면서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예를 들어 오가피 열매가 길가에 있다고 하면, 잠깐 오토바이를 세우고 그 열매를 따서 그것과 함께 우편물을 가져다 드려요.

우리가 살면서 출발한 곳에서 목표한 지점까지 빨리 가서 그 일을 마치고 얼른 돌아오는 일에만 익숙해져 있는데, 이 집배원은 가면서 생각을 하는 것이죠. 이 분에게 무엇을 더 드리면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면서 가다가, 잠깐 오토바이를 세우고 칡꽃이라든지 오가피열매라든지 따서 가져다주거나 정 안될 때는 사탕이라도 하나 놓고 와요.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이 점을 눈여겨봐야 하지 않나,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거기다가 마음을 하나 더 얹어서 하는 일, 그 사람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뭔가를 하는 일, 이런 것들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 책에 보면 <몽실언니> <강아지똥>을 쓰신 고 권정생 선생님 이야기도 있어요. 돌아가셨을 때 많이 우셨다고요. 평생 청빈한 삶을 사셨던 분이기에 더 그러셨던 건가요?

네. 이 책에도 그 이야기를 썼는데요. 권정생 선생님 돌아가셨을 때 그 안동의 집에 가보고 나서 놀랬던 것은, 권정생 선생님은 우리나라 어린이 문학의 최고 어른이시고 대가이시거든요. 그런데 가보니까 다섯 평 짜리 흙집에서 살고 계셨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작은 집에 살고 계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댓돌위에 고무신 한 켤레만 놓여 있어요. 우리가 무엇을 입고 얼마나 많은 신발을 갖고 얼마나 많은 옷을 입고 살고 있는가 생각하고 그 분을 바라보면,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고 누리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서 부끄러워지는데요. 돌아가신 뒤에 보니까 12억 가까운 돈이 통장에 들어 있었어요. 그 동안 인세 받은 것들을 쓰지 않고 그대로 두셨다가 그것을 유언장에 조목조목 적어놓으셨어요.

굶주린 북한의 어린이들을 위해서 써달라든가 또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걱정하시는 내용이 있어요. 본인은 아주 청빈하게 사시면서 <강아지똥>이라든가 <몽실언니>를 통해서 받은 인세 전체를 그대로 모아서 결국은 어린이들에게 다 주고 가시는 삶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죠.

▶ 독자분들께 우리 문학, 우리 시를 사랑하자는 의미로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다들 바쁘게 사세요. 긴 글을 읽을 시간도 없이 쫓기면서 사시는데, 늘 생각이 많고 똑같은 사물도 한 번 더 쳐다보는 사람들이 글쓰는 사람들이라서, 그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독자들에게 전해줄 때는 좀 여유를 되찾고, 시 한편을 통해서도 내 삶을 돌아볼 수가 있고, 산문 한 편을 통해서도 조금 더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하루에 시 한 편을 읽는데 2~3분 정도 밖에 안 걸리고, 제가 쓴 산문 한 편을 읽는데 10분도 안 걸린다고 보거든요. 그러나 살면서 이런 점에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거든요.

바쁘게 사는 분들을 다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열심히 살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열심히 사시는 분들에게 좀 더 가치 있는 삶,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작가들은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런 것들이 나를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이런 도움의 말씀, 정신적인 위안, 용기, 힘, 사랑, 이런 것들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쓴 것이 저희들의 글이거든요.

그러니까 저희들이 쓴 글을 하루에 5분, 10분만 읽으셔도 삶의 여유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삶의 품격이 높아질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짧은 시간을 내서라도 독서를 하시고 책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거죠.

▶ 산방은 어느 계절이든지 다 좋겠죠?

겨울에는 좀 지내기 힘들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는 참 좋습니다.

▶ 그 곳에서의 시간도 24시간 똑같나요?(웃음)

그럼요.(웃음) 도시에서는 24시간도 부족하죠? 그런데 부족한 사람에게는 25시간을 드려도 역시 쫓기기는 마찬가지일거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똑같은 시간이지만 흘러가는 속도가 평온한 속도로 흘러간다는 점이 다르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 시내 나오면 자꾸만 산방으로 들어가고만 싶으신가요?


할 수만 있다면 나왔다가는 바로 누가 부르지도 않는데 들어가고 싶고, 또 글을 쓸 일이 있으면 무조건 싸들고 들어갑니다. 그래야만 거기서 좋은 글을 얻을 수 있어요. 지금까지 한 5년 지내면서 몸에 배었다고 할까요? 긴 글이든 짧은 글이든 꼭 산방에서 쓰곤 하죠.

▶ 도종환 시인은 혼자 좋으신지 몰라도 가족들은 어떤가요?

아이들은 지금 대학을 다니다가 외국에 봉사를 나가 있고, 자기 일들이 있고요. 또 저희 식구도 아주 열심히 하는 자기 생활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니까 제가 이런 책도 내고 작가로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항상 고맙죠.

▶ 집을 비운 사이에 산짐승들이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고요?

산 속인데 집 마당 바로 옆이 계곡이예요. 그런데 그 계곡의 물을 양쪽 산에 사는 짐승들이 와서 먹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낮에도 고라니나 산짐승들이 와서 물을 먹고 가요. 그래서 처음에는 좀 경계를 하더니 몇 년 지나니까 저 사람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소문이 난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이제는 낮에도 산짐승이 왔다갔다 하고요.

대개는 깜깜하고 어두워져야 행동을 시작하고 새벽이 밝아오면 굴속에 들어가 숨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하고 아직 덜 어두워졌는데도 나타나고, 눈이 서로 마주쳤는데도 빨리 도망가지 않고 천천히 예의상 가는 것처럼 하기도 하고, 어지럽혀 놓기도 하고, 마당 한 가운데에 계속 지속적으로 변을 보면서 영역 표시를 하기도 하고요.

살쾡이나 고라니, 다람쥐들이 계속 집을 뺑뺑 돌아가면서 영역표시를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등기부 등본상으로는 제 집인데, 이 짐승들은 계속 자기 영역으로 표시를 하는 거죠. 인정을 안하는 것 같아요.

▶ 어떤 산짐승들을 만날 수 있나요?

다 있습니다. 고라니도 있고, 멧돼지, 살쾡이도 있고요.

▶ 멧돼지는 좀 사납고 공격적이지 않나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로 산짐승들이 그렇게 난폭하거나 공격적이거나 그렇지 않고, 인간이 먼저 공격적인 모습을 보일 때 그런 식으로 대응하고요. 저는 먼저 공격하는 산짐승은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짐승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이거든요. 우리가 먼저 호들갑을 떨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할 때 그렇게 나오죠. 저는 그렇게 산짐승과 어울려 사는 것이 자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책에 보면 ‘나무와 인사를 나눈다’는 내용도 있는데요. 자연과 대화가 다 되시나봐요.

혼자 떠드는 거죠.(웃음)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나무들도 다 하나씩 작은 우주라고 생각하고 혼자 이야기 하는 거죠.

▶ 언제까지 그렇게 산방에서 지내실 건가요?

언제까지라고 정해놓은 것은 없고요. 계속 제가 글을 쓰는 일을 하는 동안은 그 산 속 산방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 제가 옥수수나 감자를 가지고 찾아가면 좋은 손님이 됩니까, 아니면 귀찮은 손님이 되겠습니까?

옥수수, 감자를 가져오시지 말고, 그냥 오시면 제가 옥수수, 감자를 삶아 드릴께요.(웃음)

▶ 이번에 4년 만에 내신 산문집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의 인세가 많이 나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쎄요. 아직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얼마나 팔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좋은 의미있는 일에 쓰이게 되면 좋겠습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추천기사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