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연기 잘하는 분' 이 말이 대상보다 행복해"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배우 김지영의 '장밋빛 인생'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푼수, ‘장밋빛 인생’의 미스 봉. 거침없는 입담으로 큰 웃음을 준 ‘마파도2’의 욕쟁이 할머니 ‘영광댁’, 또,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선 딸을 죽인 살인범을 눈물로 용서하는 가난한 어머니로, 늘 다양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연기자 김지영 씨.

그녀는 18살에 연극배우로 데뷔해, 지금까지 200편 이상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으로 활동해 왔죠. 2005년에는 ‘장밋빛 인생’의 ‘미스봉’역으로 한국방송 연기대상에서 여우조연상 이라는 생애 처음으로 큰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김지영 씨의 치열하고 실감나는 연기 속에는 그동안 힘겹게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데요. 최근 김지영 씨는 힘들었던 인생과 신앙 이야기를 담은 ‘장밋빛 인생’이란 책을 내셨는데요.

50년 넘게 진정한 연기자의 길을 걸어온 배우 김지영 씨를 1월 24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연기가 천직’인 연기 인생 50년

▶ 연기 인생 50년이신데 요즘이 전성기이신 것 같아요?

바쁠 때는 왜 이렇게 힘드냐면서 투덜거리기도 해요. 방송에 출연하기 전에 영화에서 단역을 할 때도 저는 쉬는 날이 없었어요.

▶ 연기를 하시게 된 계기는 뭔가요?

영화배우 김희라 씨의 아버님인 김승호 선생님이 저희 아버님 보고 형님, 형님 하면서 자주 놀러오셨었어요. 그 외에도 강계식 선생님과 여러 분들이 오셔서 같이 술 드시고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죠. 그런데 6.26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엄마 밑에서 자랐는데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새엄마가 못살게 군 건 아니었고 제가 힘들었던 거예요.

해방 전부터 아버지가 새엄마와 함께 사셨고 어머니가 저희들을 데리고 따로 살고 계셨어요. 그러다가 피난을 가는데 엄마와 함께 저희들만 피난을 갔어요. 전 국민이 다 배고팠던 시절인데,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착하디착한 분이셨어요. 오죽하면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보호해야겠다는 보호본능이 생길 정도였어요.

하지만 결국 어머니는 우리 4남매를 데리고 고생하시다가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죠. 그래서 서울에 올라와서 새엄마를 만나니까 새엄마가 미워서 못 견디겠는 거예요. 아버지도 밉고 세상이 미워서 어린 나이에 사람을 미워하며 살았어요. 어머니만 불쌍하고 고생하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사람을 미워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야반도주를 해서 김승호 선생님한테 간 거예요. 당시에는 영화가 성행하지 않을 때지만 연극계에서는 알아주는 분이셨어요.

▶ 고향이 어디세요?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때 판사를 지내셨는데 재판을 할 때마다 한국인들이 다치니까 판사복을 벗으셨는데 이 때문에 일본 사람들한테 밉보여서 재산을 몰수당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함경북도 청진 바닷가로 가셨어요. 저는 맏이라 서울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우리 형제들이 태어났죠.

▶ 김승호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뭐라고 하시던가요?

깜짝 놀라시면서 막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난 안 간다고, 아저씨가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죠. 그랬더니 집에 계신 아버지하고 통화를 하셨나 봐요. 아버지는 골칫덩어리가 없어지니까 올타구나 싶으셨겠죠. 자네가 데리고 있으면서 연극이나 가르쳐보라고 하셔서 그때부터 있었던 거예요. 일단 먹여주고 재워는 주니까요. 극단 대중극회라는 곳에 있었는데 연극만 하던 시절이라 악극단이 생긴 건 그 이후였어요.

▶ 원래 꿈은 뭐였어요?

할아버지가 늘 너는 법관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제 성격이 우둔하고 곧으니까 할아버지께서 법관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고 저도 법관이 돼야 하는 줄 알고 자랐어요. 그러던 게 6.25와 함께 무산이 된 거죠.

◇ 하루 저녁만 보면 대본 2시간짜리를 다 외울 정도

▶ 생각지도 못한 배우를 하시게 된 건데 고생은 안 하셨어요?

가자마자 마침 그 극단에서 <지옥문>이라는 연극을 했는데 그게 끝나고 바로 새로운 극을 시작할 때라서 연습하면서 쉬고 있더라고요. 새로 들어가는 극본이 <유랑삼천리>인데 제가 초등학교 4학년짜리 역할을 맡아서 데뷔를 했어요. 18살짜리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연기하려니까 반바지에 모자 쓰고 책가방 메고, 그게 무대니까 가능했겠죠.

제가 지금은 머리가 둔해졌지만 외우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어요. 하루 저녁만 보면 대본 2시간짜리를 다 외울 정도였거든요. 김승호 선생님도 남의 딸을 오래 데리고 있으면 골치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다음 날 바로 연습하자고 하시는데 해봐서 안 되면 보내려고 하루 저녁 외우게 하고는 이튿날 연습을 시킨 거예요. 그래서 했더니 모두 놀라서 말을 못해요. 뭐 저런 애가 다 있느냐고.

저는 저대로 생활이 그러니까 눈물을 흘려가면서 열심히 했어요. 연극계에 물건 하나 났다고 각 단체에서 와서 보고, 그러면서 연극을 하기 시작했어요.

▶ 데뷔 무대를 통해서 배우의 꿈을 본격적으로 꾸게 되신 건가요?

그렇다기보다는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부모님이 계시지만 형제들도 떼어놓고 나왔으니까요. 연극무대에 서니까 밥은 배고프지 않게 먹었는데 대신 월급이 없었죠. 당시에는 월급 받는 배우들이 없었어요. 월급을 왜 안 주느냐고 하면 다음 장소에서 주겠다고 하고, 그러다 보면 1년이 넘어가죠. 그리고 점심 값을 줬는데 그걸 아껴서 화장품 사고 옷 사입고, 김희갑 선생님은 그거 모아서 집도 사셨어요.

▶ 처음에 연극무대, 영화, 나중에 TV에까지 이어지신 거죠?

순수연극이 안 먹히니까 나중에 음악을 곁들여서 악극을 만들었어요. 뮤지컬의 원조죠. 또 2부에는 쇼가 생기고, 코미디가 나오고 만담이 나왔어요. 그러다가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죠.

▶ 그동안 출연하신 작품이 굉장히 많겠어요?

영화, 드라마 다 합해서 200편은 넘을 거 같아요.

▶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게 있으세요?

임권택 감독님의 <길소뜸>에서 처음 조연을 맡았는데 칭찬을 많이 받은 작품이에요. 김지영씨 하나 건졌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어요. 그리고 역시 임권택 감독님의 <아다다>가 있어요. 드라마에서는 <바람은 불어도>, <장밋빛 인생> 등이 기억에 남아요.

◇ ‘독특한 캐릭터’는 ‘예리한 관찰력’에서 나와

▶ <장밋빛 인생>의 ‘미스 봉’ 역할로 2005년에는 한국방송연기대상 여우조연상을 받으셨어요.

제가 상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어요. 드라마 <장밋빛 인생> 하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너무 작품이 좋아서 행복한 마음으로 했으니까 우리 후배들, 상 받을 때 박수 쳐줘야지 생각하고 옷도 평범하게 입고 참석했는데 처음에는 이름 부르는 소리도 못 들었어요.상 받으러 단상에 올라갔는데 아무 생각도 안 나요. 평소에 나도 상을 타면 하나님, 감사합니다는 말은 꼭 해야지 했는데 다 까먹고 그 소리도 못했어요.

▶ 각 캐릭터마다 독특한 개성을 불어넣으시는데 어떻게 하시는 거죠?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가 저한테는 연기 선생님이에요. 어디를 가도 사람들을 그냥 보지 않아요. 어디 큰 소리가 나면 가서 귀기울여보고 이런 상황일 때 저런 표정이 나오면서 목소리도 저렇게 나오는구나, 하면서 머릿속에 저장하는 거죠. 어떤 배역이 오면 머릿속 생각을 읽으면 하나가 딱 떠올라요. 이거다, 이걸 접목시키면 딱이네, 이런 식으로요.

▶ 사투리도 영역을 넘나드시던데요.

지금은 모두들 스케줄이 바쁘고 차도 있으니까 끝나면 없어지는데 전에는 촬영이 끝나면 차가 하나니까 같이 오거든요. 다른 사람이 찍을 동안 제가 먼저 끝나면 시장에 돌아다니는데 시골에 가면 가끔 5일장이 걸려요.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거기서 물건 흥정하는 것부터 사투리까지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을 해요.

가는 곳마다 눈여겨봐요. 어떤 때는 대본이 표준어로 나오거든요. 그럴 때 요런 건 강원도 사투리, 저건 전라도 사투리, 이렇게 사투리를 입히죠. 그러면 표준어를 사투리로 대사를 다시 써야 해요. 그렇게 해서 내걸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고 제대로 한 것 같아요.

▶ ‘미스 봉’은 배역상 미스라는 것 때문에 배역 맡으실 때 더 기분이 좋으셨을 것 같아요.

미스에는 별 관심은 없는데 다른 대본과 달리 단숨에 읽었어요. 너무 재미있고 희망이 생겨서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라고요. 지금 바로 촬영해도 금방 대사를 외울 수 있을 것 같고. 좋은 감독에 좋은 역할에, 심지어 한 신을 찍을 때마다 너무 아쉽고 아까운 거예요.

▶ 분장이나 헤어는 어떻게 하셨어요?

다른 건 모두 방송국에서 해주는데 <장밋빛 인생> 만큼은 머리를 직접 했어요. 옛날 파마머리 있잖아요. 옷도 캐릭터를 정해놓고 생각하면서 매일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지하상가까지 다니면서 재미있는 건 골라서 샀어요. 이 작품에 한해서는 액세서리, 소품을 직접 골랐어요.

◇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틈새시장 ‘푼수’와 ‘사투리’

▶ 최근에 <장밋빛 인생>이라는 책도 내셨어요.

고생도 하고 힘들게 살았지만 행복하다고 장밋빛 인생은 아닌 것 같아요. 행복하게 사는 것 자체가 장밋빛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체험을 많이 했는데 문뜩 이런 생각이 들어요. 때때로 하나님이 정말 계신 걸까? 계신다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는 걸까? 고민하게 되잖아요. 그럴 때 이런 체험담을 이야기하면 확실히 계시다는 것과 믿음 자체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내게 되었어요.

▶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찍으실 때 행복하셨겠어요.

그 역할 자체가 작지만 좋은 역할이에요. 하나님 사랑으로 내 자식을 죽인 죄인을 용서한다는 게 보통 생각하기 힘든 일인데 이런 좋은 역할을 나오는 씬이 너무 작아서 아쉬웠죠. 소설에서는 엄마가 용서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도 있고, 이런 갈등이 있는데 영화에는 딱 두 씬이었어요.

이 씬 안에 용서하고 안 하고를 결정하는데 한 씬은 교도소를 가느냐 안 가느냐로 수녀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거고, 막상 이 죄수를 용서하는 씬은 교도소에서 다 해야 하는 거예요. 한 씬만 더 있었으면 갈등하는 모습과 용서하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겠는데 딱 한 씬에 다 보여주려고 하니까 너무 힘들어서 감독님한테 너무 힘들다고 했어요.

어쨌든 하기는 했는데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어요. 그런데 시사회 때 갔더니 그 장면부터 사람들이 울더라고요. 내가 조금 표현을 하기는 했구나 싶었죠.(웃음)

▶ 감칠맛 나는 재미있는 역할부터 가슴을 울리는 역할까지, 연기의 폭이 넓으신 것 같아요.

영화에서는 비극을 많이 맡았어요. 가난한 집안의 엄마, 그래서 우는 역할을 많이 했는데 이 방송에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연구해 보니 사투리와 푼수더라고요. 방송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푼수를 잘 몰라요. 푼수는 코믹이 아니에요. 진짜 제대로 순박해야 하기 때문에 연기를 하려고 하면 안 돼요.

푼수 짓을 하다가도 쿡 찌르면 바로 눈물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해야 할 수 있어요. 아무도 이걸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내가 이걸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또 하나는 사투리가 약해요. 그래서 푼수와 사투리로 캐릭터를 잡았어요.

◇ 생활고에 시작한 연기, 옷이 없어 단역만 전전

▶ 결혼하시고 나서 남편께서 투병생활을 하셨는데 어려움이 많으셨겠어요.

왜 결혼했나 싶을 정도로 아이만 낳았지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결혼하자마자 내 밥은 내가 벌어먹고 살았거든요. 남편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술을 좋아해서 본인이 번 돈은 술로 없애고 저한테는 돈 주는 게 없었어요. 결혼을 했으니까 그냥 살아야하는가 보다 하고 살았고 배고픈 시절도 겪었죠. 오죽하면 친구가 밥 먹으려고 시집가는데 너는 시집가서 굶냐고 할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없는 살림에도 친구들이 끊이지 않아서 늘 술상 차리라고 하고 고생이 많았어요.

옷 한 벌 못 얻어 입었는데 남편은 누가 봐도 귀공자로 볼 만큼 차리고 다녔고요. 그러다가 남편이 돈을 좀 버는가 싶더니 집에 안 들어오기 시작해요. 일찍 들어오면 10일, 보름, 한 달 이러더니 몇 개월을 안 와요. 몇 개월에 한 번씩 와서 돈 좀 주고 가면 그걸로 생활하고 아이들하고 살림하고 살았죠. 이때 벌써 아이들이 3명이었어요. 우리 시어머님도 아무리 내 아들이지만 저렇게 신선놀음으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어요.

어느 날 시장을 가는데 낯익은 사람이 길거리에 앉아있어요. 처음에는 그냥 지나갔는데 다시 와서 보니까 우리 남편이에요. 몸이 아파서 얼굴이 완전히 상해 있더라고요. 그래서 빨리 못 알아본 거죠. 당시에 월세를 제대로 내지 못해서 살림을 줄여서 이사를 왔어요. 그래서 집을 못 찾아서 길거리에 남편이 앉아있었던 거예요.

남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양쪽 폐가 나오지 않더라고요. 위는 펑크 나기 일보 직전이고 백혈구가 전혀 없어서 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대요. 어떻게 치료를 하면 되느냐고 했더니 서울에서는 못한다고 마산 요양소로 가라고, 나으면 다행이고 못 나으면 할 수 없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남편이 입이 까다로워서 병원에 가기 전에 굶어서 죽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집에 모셔놓고 의학서적을 샀어요. 약국 아주머니한테 사정이 이러니까 도와달라고 해서 약을 짓고 고기 몇 그램, 사과 몇 쪽, 이렇게 해서 13년 동안 수발을 했죠.

▶ 내치시고 싶은 마음은 없으셨어요?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왜 힘들까, 나는 이 사람이 밉다 싫다, 이런 생각은 안 했던 거 같아요. 겨를이 없었다고 할까요? 그저 열심히 해서 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아이가 또 하나 생긴 거예요.(웃음) 그래서 4남매를 뒀죠.

▶ 월세를 못 내서 이사를 하실 정도였는데 13년 동안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연극을 하다가 5.16 나던 해에 연기를 관뒀어요. 아이들만 키우고 살겠다 했는데 남편이 그렇게 되니까 물지게도 져봤고 가내공업도 해봤는데 정 안 돼서 그 월세를 줄여서 지금 아현동 가면 도서관 자리가 있는데 옛날에는 거기가 냇가였거든요. 거기에 각목 4개를 세워놓고 새집처럼 지은 집이 있어요. 그곳을 당시에 싼 가격에 전세를 들어갔죠.


여름에는 장판을 깔았어도 밑에서 오물냄새가 올라오고 겨울에는 천장에 루핑이라는 걸 깔았는데 춥기가 이루 말할 데 없어서 방안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어요. 도저히 안 되겠어서 밥그릇만 빼놓고 살림을 다 팔았어요. 돈 되는 건 다 팔았는데 약값 들고 하니까 6개월도 못가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연기생활을 다시 시작했어요. 연극하다가 관두고 영화계로 나간 거죠. 옷이 없어서 조연이 들어와도 단역만 맡아서 했어요. 아낙네 A, B, C 이런 거, 그때는 양장점에서 다 맞춰서 입어야 했거든요.

◇ 남편의 죽음을 통해 신앙 체험

▶ 신앙과 가까워지신 건 환경 때문이었나요?

그때는 미련하게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둘째 아들이 교회 가자고 하면 나 좀 내버려 두라고, 힘들다고 그랬거든요. 알고 보니까 빨리 갔으면 내가 고생을 덜 했을 텐데.(웃음) 남편이 하늘나라로 가면서부터 체험이 시작되었어요. 남편이 평소에 교회를 안 다녔는데 죽기 전에 그더라고요. 나 교회 나갈란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좋을 거라고, 앞에 교회가 있으니까 가자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틀 후에 돌아가신 거죠.그날 오랜 시간 촬영하고 있었는데 죽었다고 연락이 왔어요. 남편이 죽은 지 8시간 만에 도착을 했는데 정말 죽어 있는 거예요. 촬영하면서 내내 그때 처음 하나님께 기도를 했어요. 제가 그동안 하나님을 안 믿었는데 죄송하지만 소원을 들어달라고, 저 사람이 안 죽었으면 좋겠지만 데려가셔야 한다면 저를 보고 가게 해달라고요.

왜 그런가 하면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서 저와 아이들한테 행패를 많이 부렸는데, 그게 미워서 제가 돌아서서 욕을 많이 했어요. 남편이 죽을 거 같으니까 그런 부분이 마음에서 아프더라고요. 이걸 털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남편한테 이 마음을 용서받고 싶다고, 보고 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던 거예요.

펑펑 울다가 문뜩 기도하던 게 생각이 나서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데 감히, 하나님 너무 하지 않으시냐고, 내가 그렇게 기도했는데 우리 아들 말 들으면 모든 피조물은 당신이 지으셨다는데 이렇게 소원을 안 들어주십니까! 그러면서 울었어요.

그랬더니 잠시 후에 병원이 쩌렁쩌렁 울리는데 ‘남편을 다시 한 번 불러보라’는 음성이 들려요. 그래서 다시 불렀더니 뻣뻣했던 시체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의사, 간호사 다 도망갔어요. 나중에 의사분이 들어오셔서 이런 기적은 처음 봤다고 말하는데 제가 그때부터 체험이 시작된 거예요.

▶ 가장 힘든 때는 언제셨어요?

제가 소띠라 미련한가 봐요. 힘들고 배고픈 시절이 많았죠. 남편 약값 대야죠, 아이들이 넷이니까 셋방을 안 주더라고요. 힘들게 얻은 셋방도 주인한테, 애들이 한 번씩 들락날락해도 4명이니까 대문이 4번 닳는다고 애들 내보낼 때 함께 내보내고 들어올 때 한 번에 들여보내라는 구박도 받았어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집을 사고 싶었어요.

그때는 문예물을 많이 했는데 서울에서 뛰는 건 생활비와 약값으로 쓰고 문예물을 하는 건 무조건 큰댁에 맡겼어요. 계를 들어달라고. 그 계를 타서 13년 만에 아현동에 집을 샀어요. 그래서 남편이 나음과 동시에 이사를 하면서 집에 문패를 달아줬더니 남편이 감격해서 울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정말 힘들어, 고생해, 죽겠어, 이런 걸 몰랐어요. 배가 고파서 뛰어가서 냉수를 벌컥벌컥 마셔도 그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미련한가 봐요. 내 몫이려니 하고 살았거든요. 그러다가 양은 냄비 새 걸 하나 사면 쓰지도 않고 장롱 위에 얹어놓고 쳐다보면서 행복해 하고 그랬어요.(웃음) 절망 속의 배고픔은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오히려 이 때가 힘과 용기가 다져진 시기라고 생각해요.

◇ ‘연기 잘하는 분!’ 그 이상 좋은 게 없어

▶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어딜 나가면 예전에는 배역 이름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김지영 씨, 연기 잘하는 분” 이 말이 대상받은 것보다 행복해요. 이름을 모르면 “저분, 연기 잘하는 분!” 이래요. 그 이상 좋은 게 없어요. 항상 그런 연기자로 남고 싶고 앞으로 어떤 역할을 맡고 싶으냐고 사람들이 물어보는데 어떤 역이든 주어지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래서 후배들한테도 스타가 되려고 하지 말고 연기자가 되라는 말을 해 줘요.

▶ 앞으로 소망이 있다면요?

제 처음 기도도 그랬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마지막 순간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숨이 멎기를 바래요.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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