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통학교 오명 벗고 페어플레이상 받는 우수팀 됐죠"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꼴지들의 반란, 성지고 축구팀 김인배 감독

부산MBC 전국고교축구대회 4강, 서울시 교육감배 고교축구대회 준우승, 18세 이하 국가대표 2명 배출. 지난해 7월 창단한 서울 성지고 축구팀이 창단 1년도 안 돼 이뤄낸 기적 같은 성과입니다.

성지고는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못한 사람들을 위한 야학에서 출발해 2001년에 도시형 대안학교로 지정된 학교인데요. 창단 초기, 성지고 선수들은 ‘꼴통들’이라는 관중의 야유에 흥분하다 퇴장 당하기도 했고, 연습할 운동장이 없어 전국을 헤매야 했습니다. 주변에선 무모한 짓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선수와 감독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는데요.

전국 18개 학교에서 전학 온 사연 많은 선수들과 김인배 감독이 만들어낸 우승보다 값진 전국대회 4강! 그 날 감독과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는데요. 성지고 축구팀 김인배 감독을 11월 19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1년 전 18명으로 창단했지만, 지금은 전국대회 4강을 이룬 팀

▶ 창단한 지 1년 정도에 불과한데, 성적이 대단합니다. 46전 21승 15무 10패 맞습니까?

저희들이 힘든 과정을 거친 선수들이니까 마음이 일치돼서 강한 정신력으로 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 정신력이 이뤄낸 거죠?

예. 저희들이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겨울에 땀도 많이 흘렸고요. 그래서 이 정도까지는 기대를 못했지만 그래도 중위권 팀으로는 인정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선수들이 그런 자신감으로 했습니다.

▶ 감독님은 어느 정도까지 가면 그래도 체면치레는 하겠구나 하고 생각하셨어요?

올해는 창단 1년도 안 되었으니까요. 전국의 고등학교 팀이 120개 팀이 있습니다. 그래서 32강 내지 16강 정도를 최고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 18세 이하 국가대표 선수도 두 명이나 배출한 것도 대단한 거죠?

올해 두 선수가 다른 어떤 학교선수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인 특징도 있고요. 특히 골키퍼 윤장은 선수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상위권에 드는 앞으로 프로까지도 갈 수 있는 그런 기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력도 많이 하고요. 또 미드필더 김주용 선수는 일찍부터 조기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선수로서 태국에 가서 아시아 학생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올 정도죠. 그 두 선수를 배출한 것이 저희 학교의 큰 자랑입니다.

▶ 성지고가 방황하던 청소년들과 형편이 어려위서 공부를 못한 만학도들을 위한 야학에서 출발해서 지금은 대안학교라고 하던데요. 학교 소개 좀 해주세요.

저희는 강서구 화곡동 화곡 사거리에 자리 잡은 도시형 대안학교로서, 전교생이 1,900명 됩니다. 물론 지금 학업의 기회를 놓친 분들도 많지만 제도권 학교에서 적응을 못한 학생들이 모인 학교로서, 굉장히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어떻게 보면 선진국 교육에 근접해가는, 그래서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공부함으로서 대학 진학률도 상당히 높습니다.

또 교장 선생님의 교훈이 ‘왕따 없는 학교’라고 해서 정말 편애하지 않고 제도권의 학교에서 버림받은 학생들이 졸업을 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그런 학교로서 우뚝 섰습니다.

▶ ‘왕따’가 없고 정말 ‘왕자’들이 탄생을 한 것 같습니다.

네. 또 저희 교장 선생님이 특이한 것이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이 오면 그 학생의 발을 선생님들이 직접 닦아줍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통해서 교육의 변화를 많이 주시고 그것으로 인해서 학생들이 교장 선생님에게 굉장히 친근감을 갖고 학교생활을 더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문제를 일으킨 학생인가 할 정도로 학생들이 적응을 잘 합니다.

▶ 축구팀은 어떻게 해서 만들게 되었나요?

재단에 교장선생님의 큰 아들이 저하고 친구입니다. 과거에 제가 문일고등학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참 선수를 많이 배출하고 하니까 수시로 축구팀을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일반학생들이 한데 모일 곳이 없고, 단합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고 수차례 상의를 하길래 축구가 쉬운 것이 아니고 어려운 것인데 한번 해보자고 해서 시작을 했는데요. 의외로 시작이 잘 되었습니다.

▶ 선수들이 원래부터 소질이 있었나요? 아니면 전부 새로 시작한 선수들인가요?

새로 시작한 선수들은 한 두 명 밖에 안 됩니다. 기존의 127개라는 학교 중에 그 학교에서 적응을 못해서 나와서 방황하는 애들을 공고를 해서 모집을 했죠. 처음에 18명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지금은 한 40명 됩니다.

▶ 40명 모두 다 박지성 선수처럼 기량이 뛰어납니까?

저희가 처음에 교장선생님한테 그 취지를 말씀 드렸는데요. 축구선수가 성공해서 프로까지 가는 선수들은 3% 미만입니다. 그렇게 경쟁이 심한데요. 저희 선수들 중에는 장래 희망이 요리사도 있고, 건축가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일반 학교에서 적응을 못하니까 부모님들이 축구선수로서의 단체 규율을 배우기를 원하셔서요.

제가 볼 때는 저희도 3-5%를 전문선수 육성으로 보고, 나머지 학생들은 상급학교에 진학을 해서 지도자나 심판이나 스포츠 계통에 종사할 수 있는 그런 학과로 진학하는 쪽으로 배출을 하려고 합니다. 꼭 선수로만 성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요.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닙니다.

◇ 처음엔 너무 힘들어 체중이 16kg나 빠져

▶ 처음에 모집하는 과정 중에서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아요.

예. 많죠. 제가 과거에 문일고에서의 화려한 명성이 없었다면 저희 성지고등학교 선수 지망 자체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과거의 그런 것을 보고 축구만큼은 한 번 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인다고 해서 지망을 하는 선수들이 있었는데요.

거의 제 입에 맞는 선수는 없고 좀 문제가 되던 선수들이다 보니까 보통 ‘내 선수다’라고 만드는 과정이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그리고, ‘꼴통’이라는 이미지는 학교 자체가 제도권 학교에서 문제가 돼서 온 학생들이다 보니까 축구 선수를 빗대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 학생들이 자기네 축구팀이 있는 학교에서도 성지대안학교를 많이 가니까 그런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해서 그런 거죠.

처음에는 시합을 나가서 축구선수들은 안 그러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하니까 어린 나이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일부러 상대팀 감독들이 그런 약점을 노려서 선수들끼리 심리전을 시키기도 하죠. 와서 옷을 붙들고 “꼴통학교, 깡패학교”라고 하면 선수들은 우발적으로 감정이 생겨서 주먹이 날라가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을 고치는 데 몇 개월 걸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부산 MBC 전국대회에 가서 전국 3위를 했어요. 그런데 축구에는 페어플레이상이 있습니다. FIFA에서 강조하는 것이 페어플레이 정신인데요. 그것은 그 대회에 참가한 팀 중에 경고나 퇴장이 제일 적은 팀에게 주는 상입니다.

그래서 제가 문일에서 20년을 하면서도 한 번밖에 못 받았을 정도로 어려운 상인데, 저희가 3위 입상하면서 페어플레이상을 같이 받았어요. 그 다음부터는 심판들도 저희는 매너가 좋다고 해서 그 이후에 “꼴통이다”라는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습니다.

▶ 자리가 잡히기 전까지는 아이들 다잡는데 감독님이 힘드신 점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뭐, 매일 그랬죠. 저는 팀을 하면서 항상 내일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선수들간의 문제는 힘이 들죠.

▶ 특히 힘들었던 문제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제가 축구감독이니까 팀을 조금이라도 향상을 시켜보려고 운동량을 늘리는 주문을 너무 강하게 하면 선수들이 이탈을 하려고 하거든요. 선수들이 18명이면 그 18명 모두의 심리를 다 다뤄야 운동 프로그램이 나오지, 정규학교에서 하는 식으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다보면 저는 기술향상을 위해서 하는 소리지만 선수들은 ‘난 안 되나보다’ 하는 좌절감 때문에 금방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옵니다.

축구를 그만 두겠다고, 노력도 안 해보고 자기는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경우가 정말 하루에도 두 세 명씩 2~3개월 동안 계속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선수들이 좋아하는 운동방법이 뭔지를 찾아봤죠.

그래서 통계를 내보니까 과거에 있던 학교들에서는 주로 승부에 연연을 하다보니 육상선수처럼 뛰는 것만 하고 몸싸움만 하고 더티한 것만 배우려고 하는 것 때문에 아이들이 축구를 좋아해서 시작을 했는데 점점 축구가 싫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심리를 파악해보니까 어차피 축구선수니까 축구공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 많은 것을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프로그램 자체를 뛰는 것 없이 거의 100% 공을 가지고 기술적으로만 해서 체력을 보강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그것이 좀 맞아 떨어졌어요. 그 다음부터는 운동을 그만 두겠다는 아이들도 적어지고, 볼을 가지고 하다보니 기술이 더 세밀해지고 개인기들이 늘어가고 자기들끼리도 부분적인 호흡이 맞게 되었죠.

그래서 관중들이 저희 학교 축구를 보게 되면 아주 재미있다고 합니다. 지더라도 기술축구를 하니까요. 다른 팀들은 그냥 길게 때려 넣고 육상선수처럼 뛰어가서 골 넣는 연습만 하는데, 저희는 거의 패스로 하니까요. 그래서 저희 선수들이 졸업할 때쯤에는 굉장히 기량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제가 볼 때는 학원 스포츠가 좀 더 그런 쪽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외국 클럽들이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짜서 해야만이 축구의 저변 확대가 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 예를 들어서 이런 학생이 처음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게 되었다고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시면 더 이해가 빠를 것 같은데요.

대표적인 케이스로 성공한 선수는 올해 광운대학교에 입학한 조진성 선수 같은 경우인데요. 학교를 네 다섯 군데 옮겨 다녔던 선수입니다. 그런 선수가 수도권 내의 대학에 특기자로 갔다는 것은 공부해서 서울대, 연고대를 들어간 것과 비교할 정도인데요. 어떻게 보면 그런 학생은 고등학교 졸업장도 못 받을 학생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선수들이 적응하는 기간은 오래 걸렸지만 노력을 해서 지금은 어느 학교 선수에게도 처지지 않을 정도로 성공한 사례라고 볼 수 있죠.

▶ 처음에 선수들을 모아놨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솔직히 말하면 좀 어렵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축구는 팀워크 운동이거든요. 지금 이런 예가 없어서 연구대상이라고 하는데요. 사실 가장 성공적인 길로 갈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중학교, 최소한 6년에서 9년을 한솥밥을 먹어야 어떤 조직력이나 팀워크가 생긴다고 축구인들은 이야기 하거든요. 그래서 외국에서 클럽 시스템을 쓰는 것이 유소년부터 차근차근 전술을 밟아 올라가서 완성되는 것이 9년 내지 10년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개성이 강한 18명 중에 베스트 11을 짜는 것도 각자가 성격이 틀리고 개성이 틀리니까 힘들었고요. 다른 학교 정도로 흉내를 내는데만 한 6개월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 오합지졸 같은 학생들 중에 특히 굉장히 힘들게 했던 학생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한 50%는 다 한 번씩 제 속을 썩였습니다. 숫자도 적은데 축구 안 하겠다고 했었죠.

▶ 가장 애먹였던 학생은 누굽니까?

김지훈 선수라고, 동대부속 고등학교에서 적응을 못해서 온 선수인데요. 부모님 말로는 전 학교에서 운동을 하다가 4개월 정도를 쉬고 매일 컴퓨터만 하고 바깥에도 안 나가고 성격 자체도 굉장히 내성적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조금 가르쳐 보니까 스피드도 있고 가능성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선수보다 특출나게 한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단점을 찾아내서 집중적으로 시켰는데요. 조금만 힘들면 축구를 안 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도 몽둥이를 한 번 못 들어봤습니다. 일주일 시간을 달라고 해서 시간을 줘보기도 하고, 불러서 다시 옆에다 놓기도 하고요.

옆에다 놓고만 있어도 제 선수 같아서 운동 안 해도 좋으니까 하고 싶은 마음 생길 때까지 일단 바깥에 나가면 놀고 싶으니까 숙소에서 지내보자고 해서 거의 면담만으로 하는 데 1-2개월이 걸렸습니다.

▶ 그럴 때 감독님도 화가 나기도 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도 화 한 번 못 내봤습니다. 그냥 정규적인 학교였다면 화를 내기도 했겠죠. 그런데 제도권 학교에서 일단 낙오된 아이들이다 보니까 그렇게 하다보면 선수들이 한 명도 안 남을 것 같고 해서 저녁 때 아이들 재워놓고 나서 혼자 많이 좌절했죠. 제가 성지고에 오기 전에 몸무게가 88kg까지 나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72kg이거든요. 그런데 병원에서는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하는데요.

혼자 삭히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버티기가 힘들었습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커서 살이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회복되고 있는 중입니다.

◇ 24년간 문일고 감독을 맡으며 20번이나 우승 이끌어
▶ 문일고에서 감독 생활을 오래 하셨나요?

예. 제가 지금 성지고에 오기 전까지 문일고에서 24년을 감독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이 프로에서 16명 뛰고 있고요. 대표적인 선수가 2002년 월드컵 때 이민성 선수, 지금 서울 LG 주장인데요. 저의 중고등학교 제자입니다. 자주 전화도 옵니다. 그런데 은퇴 시기가 되다보니까 많이 고민을 해서요. 올해 37이거든요.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서 좋은 지도자 공부를 시작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 전국대회 우승만 20번 정도 하셨다고요? 엄청난 기록 아닌가요?

네. 전국대회에서만 한 20번 정도 우승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는 아주 대선배님들 외에는 제가 최고 장수를 했고, 우승 횟수도 가장 많은 쪽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 축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신 건가요?

저도 축구선수입니다. 제가 안양중학교, 안양공고, 연세대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시합 도중 무릎을 크게 다쳐서 은퇴를 좀 일찍 했죠. 그래서 한 2년간을 재활하다가 도저히 선수로서는 불가 판정이 나와서 교직을 이수해서, 문일중학교 체육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 같이 축구했던 동료 선수들 중에 저희가 기억할 만한 선수는 누가 있을까요?

지금 인천 스카우터 하는 정해원 선수가 저의 중고등학교, 대학교 동기고요. 이태호 동의대 감독 등이 저의 동기들입니다. 아직까지도 친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 뭉쳐서 대포도 자주 한 잔 하시나요?

자주는 못 하는데요. 같은 축구계에 있으니까 자주 만납니다.

▶ 친구분들이 좀 더 화려한 팀에서 감독을 해보라고 하는 경우는 없으신가요?

우선 제가 문일에서 나오게 된 동기가 축구를 아주 접으려고 나온 겁니다. 문일이 사학재단이었는데요. 재단 이사장님이 고령으로 저를 무지 예뻐해 주시고 전격적으로 믿어주셨어요. 그런데 그것이 직장생활 하는데는 더 악조건이 되더라고요. 주위 사람들이 시샘을 하고, 자꾸만 학교측에서 제동을 걸고요.

한 번은 월급을 받는 교장 선생님이 한 분 왔는데, 제가 재단에서 아껴준다는 이유 때문에 전국대회 결승을 나가는데, 상대방 포철공고에서는 버스 15대가 응원을 온다고 해서 “선수들 사기도 있으니까 응원 좀 와 주십시오.” 라고 했는데 그걸 교장선생님이 막무가내로 반대를 하셨어요. 결국 저희는 결승에서 졌고요.

그래서 제가 서울에 올라와서 교장실을 들어가서 제가 서운한 점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저와 갈등이 시작되었죠. 그래서 제가 이제는 ‘문일에서는 한계가 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좀 쉬면서 일반 학생들의 수업만 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지고등학교의 제의를 받게 된 거죠.

성지고 같은 학교가 아니었다면 저의 이런 정열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아이들을 만나보니까 보람도 있고요. 아주 최악에서 시작을 하는 거니까요. 제가 선수들에게 “우리는 1승을 할 때마다 역사를 쓰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져도 밑지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마음껏 뛰자고 했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저희 고등학교와 붙는 팀들이 오히려 경계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는 참 보람을 많이 느껴요.

▶ 처음에 성지고에서 축구를 시작할 때 상황이 아주 열악했다면서요?

대표적인 축구 명문학교인 한양공고, 영등포 공고 같은 학교들도 운동장이 초등학교 운동장 크기만큼도 못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체조도 하고 공 패스 할 수 있는 공간만이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저희 학교는 운동장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축구팀을 창단했을 때 공원 운동장 등을 전전하면서 했죠.

▶ 심지어는 상대 팀 학교에 가서도 연습을 했다고 하던데요.

네. 처음에는 숙소가 급하게 준비가 안 되다 보니까 시합 전에는 오피스텔을 얻어놓고 훈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사정을 알고 또 제가 태어난 곳이 파주인데, 선배들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제가 앞으로 파주시에 축구교실을 여는 조건으로 해서 정규운동장을 아주 장기적으로 임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학교측에서 운동장 바로 뒤에 생활관을 만들었죠. 그러니까 그 전에는 한 6개월을 떠돌았습니다. 정말 조기축구회가 다 나가고 깜깜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운동장을 쓰고, 주인들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입장이었고요. 참 처음에는 굉장히 힘이 들었지만, 지금은 좋습니다.

◇ 8강전 마지막 골을 넣던 순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 “1승을 할 때마다 역사를 쓰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선수들한테는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었나봐요?

그렇죠. 처음에 팀을 구성했을 때는 상대팀을 이긴다는 것은 거의 어려운 생각이라고 했던 선수들이었는데요. 첫 대회에 나가서 4강에 들다보니까 굉장히 아이들이 다른 학교 아이들보다 올라서는 속도가 빠르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제가 할 일은 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다는 생각으로 “1승을 할 때마다 역사를 쓰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저희 학교 홈페이지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기록이 다 입력이 됩니다. 창단 때부터 기록이 되기 때문에 너희가 잘 해서 승리하면 10년 뒤에 와서도 볼 수 있는 기록이라고 얘기를 했죠. 또 바깥에서 볼 때 저희의 1승은 다른 팀의 5승 이상의 결과니까요. 그런 쪽으로 선수들에게 입력을 시켰는데, 그것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 선수들에게 큰 에너지가 될 뿐만 아니라 재학생들, 졸업생들에게까지 미치는 파급효과가 클 것 같아요. 이렇게 우승할 때 재학생들 분위기는 어땠나요?

아까도 말씀 드린 것처럼 예선전에는 거의 운동장을 찾는 학생들이 없어요. 그런데 저희는 이번에도 며칠 전에 시합이 끝났는데요. 우승팀인 대신고등학교한테 1:0으로 16강에서 졌습니다. 그런데 그 날도 학생들이 150명 정도 거의 자발적으로 왔어요.

예전에는 학교가 구심점이 없었고, 동창회도 저희 축구팀이 만들어진 다음에 구성이 되었습니다. 동문들조차도 어떻게 보면 성지고 나왔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을 하고 회피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축구를 통해서 동문들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동문회관도 만들게 되었죠. 학교 학생들에게 인기가 굉장합니다.

▶ 전국 대회 4강에 올랐을 때 그라운드에 누워서 엉엉 우셨다고 하던데요. 그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저희는 목표가 16강이었는데, 그것을 뛰어넘어서 8강까지 갔고, 제가 매 시합 나가는 전 날 아홉시에는 선수들과 미팅을 합니다. 몸가짐 등을 체크하려고요. 그런데 그 날 미팅을 끝내고 보강 자료를 준비하려고 선수들을 불렀는데, 선수들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어디를 갔나했더니 3학년 선수들끼리 따로 한 방에 모여서 미팅을 하고 있더라고요.

코치들한테 무슨 내용인지 한 번 알아보라고 했더니, 저희들끼리 내일 죽어도 운동장에서 죽자고, 우리에게 이런 기회가 없으니까 쓰러지더라도 운동장에서 쓰러지자는 얘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찡했죠.

저도 그런 상상을 못했는데,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내일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좋은 시합은 해주겠다는 생각으로 나갔는데요. 상대팀이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라고 자기네 학교 인조 잔디 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학교와 저희가 8강에서 맞붙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자기 학교에서 하니까 전교생이 다 응원을 나왔어요.

그리고 우리는 서울에서 버스 두 대로 80명 정도가 한 쪽 구석에 자리잡았고요. 뭐, 일방적이었죠. 아무래도 심판들도 그렇고 홈팀의 이점이 있다 보니까요.

그런데 저희가 선제골을 넣고 1:0으로 이기고 있다가 거의 끝날 무렵에 한 골을 먹어서 1:1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승부차기를 하게 되었어요. 4:4가 될 때 까지 모든 선수들이 다 넣었어요. 그런데 다섯 번 째에 우리 골키퍼인 윤장은 선수가 상대방 슛을 막아낸 거죠.

그리고 우리 마지막 키커가 넣었는데요. 넣는 순간 선수들이 저한테 뛰어와서 부둥켜안고 다 엉엉 울고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5-6개월 피땀흘린 것을 보상 받는 순간이었죠.

▶ 마지막 골이 들어갔을 때 어떠셨어요?

제가 그 때 몸도 별로 안 좋았었는데, 그 골이 들어갔을 때 제가 운동장까지 막 뛰어갔습니다. 선수들한테까지 뛰어가서 같이 넘어지고 뒤엉켰는데요. 제가 문일에서 우승을 20번 해봤어도 그렇게 기쁘고 감격적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지도자 생활을 끝날 때 까지 그 순간은 못 잊을 것 같습니다.

▶ 김감독님은 어떤 노래를 즐겨하세요?

저는 ‘나의 20년’ 하고 ‘연안부두’를 좋아합니다. ‘나의 20년’은 제가 노래방에 가면 꼭 한 번씩 합니다.

◇ 야단보다는 칭찬... 자율적인 축구가 성공의 비결

▶ 김 감독님의 훈련 스타일 중에서 자율적으로 했다는 점이 큰 특징인 것 같은데요.

너무 자율이라고 해서 경기 규칙에 나오는 것 이외의 행동을 하게 되면 규제를 받죠. 그렇지만 축구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기가 연습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회를 부여해주는 거죠. 그래서 ‘자율’이라는 표현을 다들 아이들이 하고 싶은대로 놔둔다고 표현을 하시는데, 그것이 아니고 축구를 하기 위해서 운동장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범위내에서의 자율이라는 것이지, 운동장 안에서 할 일을 운동장 바깥에서 한다면 그건 축구에 필요 없는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규제를 해줘야죠.

그리고 아이들이 ‘자율’이라는 표현을 한 것은, 그 동안은 슛팅을 한 번 잘못 때리면 야단을 친다거나 욕을 해서 선수들 자신감이 떨어지게 하는 방법을 썼는데, 저는 야단보다는 알아들을 수 있게끔 교육을 시키면서 열 번 중에 한 번을 잘해도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는 쪽으로 한 것인데, 우리 선수들이 “우리 선생님은 자율을 줍니다” 라고 이야기 한 것이 이렇게 와전된 것 같습니다.

순간 상황 판단이 많고 순간 응용이 많은 것이 축구입니다. 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스파르타식은 득점을 만드는 과정까지를 교과서식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고요. 자율적이라고 하는 것은 장애물이 나오면 피해서 갈 수 있는, 반대로 돌아서서 줄 수 있는 응용력이 생긴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봤을 때는 스파르타식으로 하면 단기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긴 안목을 가지고 선수가 대성할 때까지 보려면 자육적인 훈련방법을 하는 것이 선수 생명을 더 길게 하고 창의력을 키우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 선수들에게 “채찍과 명령 대신 사랑과 자율을 주었다”고 하셨는데요. 여기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감을 주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주는 것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죠. 선수들은 지도자가 좀 힘이 들겠지만 다른 학교 선생님들께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선수들은 표정이나 몸가짐을 보면 걱정하고 고민거리가 많은 학생들은 표가 납니다. 그런 학생들을 시간 날 때마다 방으로 부르거나 야외 벤치로 불러서 고민도 물어보고 부족한 선수라도 장점을 더 많이 얘기해서 자신감을 주고 하는 대화를 많이 함으로써 선생님 마음도 알아주게 되죠.

졸업한 아이들이 나중에 와서 하는 이야기가 선생님 봐서 했다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선생님이 너무 고생을 하고 힘드셔서 우리가 노는 쪽으로 빠지지 않고 운동만 했다는 얘기를 졸업할 때쯤 이야기 하더라고요.

아이들이 느끼기에 ‘우리 선생님이 명문학교에 계시다가 이렇게 왔는데, 선생님 봐서도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선수들과 제 마음이 통했던 것 같습니다.

▶ 사실 감독 부인은 감독과 똑같다, 오히려 수발들고 하느라고 더 고달프다고 하던데요. 김인배 감독님 사모님은 어떠세요?

축구 감독 부인들이 다 그렇습니다. 거의 감독과 같이 질 때는 마음 아파하고 이길 때는 같이 기뻐하고요. 보통 사람은 감독의 부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집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만났는데, 축구로만 한 30년 같이 산 겁니다.

▶ 그럼 4강에 올라갔을 때, 아내에게 제일 큰 선물이 되셨겠어요.

그렇죠. 축구를 안 하겠다고 하던 좌절된 시기에 얻은 결과라 굉장히 기뻐했죠. 그것보다 큰 선물은 없었죠.

▶ 생활은 어떠신가도 궁금해요. 생활비도 많이 갖다 주시는지요?

그런 점이 집사람한테 미안하죠. 제가 문일학교 퇴직할 때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제가 23년 11개월을 근무하고 퇴직하니까 총 수령액이 2억8천 정도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나올 때 8천만원 받아서 나왔습니다.

▶ 2억은 어디 갔습니까?

축구하느라고 다 없어졌죠. 그래서 굉장히 심각한 상황까지도 갔었는데요. 그래도 돈을 쓴 출처도 확실하니까 와이프가 많이 이해해 주었죠. 정말 문일학교에서 거의 사비를 많이 썼습니다.

▶ 어떤 용도로 가장 많이 쓰시게 되나요?

주로 중학교 스카우트 과정에서 지원관계 쪽이 많죠. 요즘은 학원 스포츠도 대단합니다.어려울 때는 어떻게 합니까? 학교에서 안 해주면 할 수 없죠. 그래서 조금씩 퇴직금을 일찍 수령하다보니까 연도별로 쌓여서 그렇게 되었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주위 분들이 저를 이해 못하는 부분들이 많았죠.

▶ 선수들 뒷바라지 해주느라 음식도 많이 하셨다면서요.

제가 지금 생활관 사택에 살고 있습니다. 저의 집은 마포인데요. 어차피 어느 정도 팀이 될 때까지는 아이들과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지금 집사람과 같이 한 8개월째 선수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있습니다.

▶ 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나요?

아이들은 둘 다 컸습니다. 아들 둘인데, 둘 다 축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는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를 나와서 공익근무를 하고 있고, 막내는 축구선수로 대학에 가있고요.

▶ 평생을 운동장에서만 사셨지,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알콩달콩한 시간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제가 17년을 코치 없이 혼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17년 동안 집에 들어간 날이 신혼 때 한 3개월 빼놓고는 거의 떨어져 살았죠. 그래서 막내 생일날이라고 연락이 와서 집에 갔는데 안아주려고 했더니 아기가 막 우는 겁니다. 자기 아빠를 보고 낯설어서요. 그걸 보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는데, 지금 그런 생각을 하면 다시는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습니다.

▶ 그래도 그런 것들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다 잊어버리시나봐요?

선수들한테로 다시 오면 집의 일은 싹 잊어버리게 됩니다.

◇ 내 마지막 꿈은 프로 스카우터로서 좋은 선수 발굴

▶ 축구인으로서 본인 스스로 평가하시기에 어떤 것 같으세요?


저는 지금까지 지도자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해서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미안한 것은 있지만, 나름대로 저의 또래에서도 지도자로서 성공한 케이스로 인정을 받았고, 각종 연령별 대표도 해봤고요. 이제 꿈은 제가 이 성지고등학교를 어느 정도 일으켜 놓고요.

지금도 여러 곳에서 제의가 오는데 제가 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는 코칭 스텝에 들어가기는 좀 늦었고요. 프로 선수를 선발하는 스카우터 역할로서 구단에서 많이 섭외가 오는데요. 제가 봐도 운이 좋다고 할 정도로 선수 발굴은 정말 많이 되었습니다. 대표선수를 열 댓명 정도 만들었으니까요.

그래서 3-4년 후에는 성지고등학교 우승을 한 번 시키고 마지막 꿈을 프로무대에 가서 마무리를 지어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 축구 스텝도 여러 종류인데, 그래도 ‘감독’ 제일 꽃이지 않습니까?

꽃이긴 한데, 요즘은 많이 변화되고 있는데, 우리 축구만 유독 그것이 안되고 있습니다.

▶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건가요?

현재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에 대한 검증이 아니라 과거의 대표선수 생활을 얼마나 화려하게 했는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 하는 것을 보는 거죠. 사실 그런 꿈을 비운 지는 좀 됐습니다. 제가 1994년도에 그 마음을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하도 학연, 지연이 많다보니까 고과점수로 각종 대표 선발을 한다고 명시화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당시에 좋은 선수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감독으로서 성적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났는데, 유일하게 대표선수 생활을 화려하게 못했다는 것 때문에 탈락하게 되었죠. 그래서 제가 기술위원장을 하는 선배님한테 고과점수를 통해 능력별로 한다고 해놓고 한 번도 제대로 시행을 못하고 제도가 바뀌었냐고 반문을 했더니, 회피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대표선수 감독의 꿈은 접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 때 제가 팀을 옮길 수도 있었는데 학원 스포츠에 남은 이유가 그런 뜻에서 체육교사를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프로의 꿈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 저희 생각으로는 감독은 성적이나 능력으로 말하는 것이지, 대표선수 경력이 ‘꼭’ 거쳐야 한다는 것은 납득이 잘 안 가는데요.

그렇죠. 지금 그것 때문에 이슈가 많이 되죠. 일본의 경우에도 그렇지가 않은데, 우리나라는 아직 고쳐지지 않고 지금도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축구협회에 대항하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겠지만요. 농구의 김태환 감독 같은 경우, 초등학교부터 하신 분이 대표팀 감독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도자도 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느 시기에 가서는 대표팀도 한 번 해보고 싶고, 자기만의 노하우로 한 번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기회조차 축구계에서 주질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지도자들이 중도에 많이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부분은 자꾸만 언론 매체에서 지적을 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 어쩐지 이런 성적을 내셨는데도 어딘가 외로워 보이고, 자신 없어 보이셨어요.

자신 없지는 않습니다. 고등학교 축구에서는 어느 팀과 해도 저는 자신 없이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 사실 학원 축구를 통해 꿈나무를 키우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학원 축구를 지켜준 보람 같은 것을 많이 느끼실 수는 없을까요?

그것마저 없었다면 제가 여기 못 있었겠죠. 제가 지도자 생활을 프로팀 전체 1순위를 한 7-8번 정도 했으니까요. 프로까지 갈 정도면 정말 대단한 선수들이거든요. 그런데 문일에 있는 동안 지금 현재까지 전체 1순위를 7번 정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학에서는 랭킹 1위들이죠. 그 아이들을 보는 낙으로 지도자 생활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전국대회 우승을 기대해도 되겠죠?

예. 2008년도에 한 번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내년 4월이면 시작되는데, 선수들이 굉장한 자신감을 얻었고, 1년이라는 노하우도 있고 하니까요. 내년에 우승보다는 결승까지는 한 번 진출해 보려고 목표를 잡아놨습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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