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와 데라우치 총독은 약탈한 우리 문화재를 반환하라"

[임기상의 역사산책 94]일본인들, 조선에서 마구잡이로 문화재를 약탈하다

◈ 일본인 도굴꾼들, 백주대낮에 고분을 파헤치다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도굴꾼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약탈해 일본으로 가져간 가야 금관. (사진=국립도쿄박물관 도록)
국보나 보물이 아니더라도 모든 문화재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예지와 숨결이 깃들어 있는 소중한 보배이자 인류문화의 자산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재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당하는 가운데 너무나 많은 수난을 당했다.

특히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기간에 우리 민족의 수난 만큼 우리 문화재도 대량으로 약탈당하고 훼손되었다.

멀게는 몽골 침입 때 황룡사 9층목탑이 불에 타서 전소되었고, 가까이는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범에 의해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이는 안타까운 순간이 있었다.

가장 집중적으로 약탈당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우리 민족은 죽음을 신성시하고 무덤을 소중히 보존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약탈하려는 일본인 무뢰배에 의해 이 전통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조선 말 때부터 일확천금을 노리는 일본인 무뢰배들이 대거 한반도에 상륙했다.

이들 무리 속에는 부산이나 대구 같은 곳에서 가장 먼저 고물상을 차렸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지상에서 약탈 대상을 찾던 그들은 곧 지하의 고대 분묘를 타겟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경주와 개성을 중심으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극악무도한 고분 도굴이 자행된다.

일본인 도굴꾼들은 지금같이 야간을 틈타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백주에 버젓하게 몰려와 문화재를 약탈했다.

가장 불법도굴이 성행한 곳은 개성이었다.

개성이 고려왕조 5백년의 도읍지이기도 하지만 왕릉을 비롯해 고대분묘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굴꾼들은 이 분묘들에게 달려들어 마구 파헤치고 그 속의 부장품을 약탈해갔다.

안중근 의사마저 옥중자서전에서 "일본의 침략이 마침내 우리 선조의 백골에 이르렀다"고 개탄할 정도였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조사된 대한민국 영토 밖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15만 6,000여 점에 달한다.

그 중에 국립도쿄박물관에 1,849점,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1,501점, 그밖에 오구라 다케노스케 컬렉션에 1,296점 등 3만 4,152점의 소재가 공식 확인되었다.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의 개인 컬렉터들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문화재를 대략 30만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정말 꼭 찾아와야 할 문화재가 3개 있다.

◈ 임진왜란 와중에 홀연히 사라진 '몽유도원도'

먼저 <몽유도원도>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한국 미술의 금자탑', '우리 회화 사상 최고의 걸작', '조선 전기 최고 화가의 현존하는 유일한 진본 그림'이란 찬사를 받고 있는 <몽유도원도>는 한국에 없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덴리 대학의 소유가 되어 현재 중앙도서관에 있다.

이 그림은 1933년 일본의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된데 이어 1939년에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작품은 어느 이른 봄날, 젊은 왕자의 꿈을 그린 것이다.

1447년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복숭아 꽃나무들 사이로 첩첩산중 무릉도원으로 들어갔다가 뒤따라온 신숙주, 최향과 함께 시를 지으며 거닐다 잠에서 깼다.

그는 화가인 안견을 불려 이 꿈의 내용을 화폭에 담게 했다.

안견은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여섯 왕을 모신 왕실화가로, 화가로서는 최고직인 정6품을 넘어 정4품에까지 오른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그는 단 사흘만에 안평대군의 꿈을 그려냈다.

<몽유도원도>를 더욱 가치있게 만든 것은 안평대군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선비 21명의 찬문이 더해진 것이다.

여기에 참여한 인물은 조선 최고의 전성기인 세종시대에 활동했던 집현전 학사, 정치인, 장군, 음악가, 고승 등 정치와 문화의 핵심에 있는 사회적 명망가들이었다.

이 걸작이 사라진 지 440년이 지난 1893년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사는 시마즈 히사시루시라는 사람이 소장한 그림에 일본 정부의 '감사증'이 발급된 것이다.

시마즈는 가고시마의 영주로 임진왜란에 출병한 왜장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임진왜란 때 약탈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작품이 팔리고 팔려 돌아다니다 1950년대 초 덴리 대학으로 넘어간 것이다.

반환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그림을 정밀 복사해 한국에서 소장하는 방법이 현실적일 것이다.


◈ 이토 총감과 데라우치 총독, 조선의 문화재를 강탈해가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왼쪽)과 이토 히로부미. 대외 홍보 목적으로 일본식 복장을 입고 촬영하였다.
다음으로 유출된 중요 문화재는 이토 히로부미가 대출해간 규장각 도서이다.

1965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백린 열람과장이 규장각 도서를 정리하면서 발견한 한 장의 서류를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됐다.

이 서류는 1911년 5월 11일자로 일본 궁내부 대신 와타나베가 데라우치 조선총독에게 보낸 서한이다.

그 내용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관계 사안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져온 책들이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보관돼 있는데, 일본 왕족과 귀족의 실록 편수에 필요하니 이들 책들을 아주 달라는 것이었다.

이토가 빌려간 책은 규장각 도서였다.

2002년 서울대 이상찬 교수는 <한국사론>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토가 대출받은 책은 77부 1,028권에 달했고, 그 안에는 최치원의 <계원필경>, 이수광의 <지봉유설> 등 귀중한 저서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상찬 교수는 이들 책 중에서 11종 90책만이 1966년 한일문화재반환협상 때 한국이 돌려받은 사실도 확인했다.

규장각은 1694년 숙종 때 삼청동 입구에 세운 전각으로 역대 왕들의 글과 도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1905년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규장각 도서는 통감부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때 이토가 다량의 도서들을 '대출'이란 이름으로 빼돌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토가 대출해간 책들은 엄연히 규장각 컬렉션의 하나이다.

이러한 도서를 돌려주지 않고 소장하고 있다면 일본의 왕실 도서관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2대 조선 통감과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조선의 문화재 약탈에 열을 올렸다.

조선 총독에 이어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그는 통감과 총독의 지위를 이용해 야금야금 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렸다.

그가 가져간 문화재는 가야국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소중한 공예품을 비롯해 그림, 글씨, 서적 등 1,500여 점에 달했다.

이 문화재들은 데라우치가 고향인 야마구치에 세운 도서관에 '오호 데라우치 문고'에 소장돼 있었다.

이 도서관은 데라우치 집안에서 운영해오다 데라우치가 죽자 인근에 세워진 아마구치 대학에 기증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야마구치 대학이 1996년 데라우치 문고 소장본 가운데 135점이 경남대학교에 기증된 것이다.

이때 김홍도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들의 그림을 모은 <홍춘탕집>이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이 돌려주지 않고 있는 문화재를 돌려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을까?

국제관계에서 문화재를 돌려준 사례는 국교를 수립할 때 주로 이뤄졌다.

앞으로 진행될 북한과 일본과의 수교가 관심사이다.

아마 문화재 반환문제가 큰 현안이 될 것이다.

일본은 1960년대 한국과의 문화재 협상에서 북한의 문화재라는 이유로 상당수의 문화재 반환을 거부했다.

그런 만큼 우리 정부나 민간단체에서 문화재 반환 문제에서 북한과 협력을 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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