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안개와 함께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었다.
경성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된 무장순사 1,000여 명이 효제동으로 집결해 김상옥이 은신한 이혜수의 집을 촘촘하게 포위했다.
먼저 권총으로 무장한 형사들이 1선으로 이혜수의 집을 둘러싸고, 그 뒤 2선과 3선에는 장총을 든 무장순사들과 기마 순사대가 배치됐다.
마지막 4선에는 헌병대와 경찰차들이 최종 저지선을 구성했다.
체포조 1진에 섰던 형사대 중 체포조 10여 명이 먼저 사다리를 타고 이혜수의 집 지붕 위로 올라갔다.
마침 이날은 이혜수의 여동생 이창규가 대전에 교사로 부임하는 날이라 기차 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났다.
그녀가 변소로 가려는데 지붕 위에서 수근수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사라고 직감한 그녀는 언니를 깨워 건넌방에서 자는 김상옥을 흔들었다.
"어서 일어나시오. 김 동지~ 일본 경찰놈들이 몰려왔어요"
김상옥은 반사적으로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지붕 위에 형사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김상옥은 일단 벽장 안으로 들어가 고서 더미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형사들이 몰려 들어와 허공에 총을 쏘며 건넌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김상옥~ 여기 숨어있는 거 다 알고 왔다. 당장 나와라~"
아무 소리도 안 들리자 문을 열고 뛰어 들었다.
그러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김상옥은 고서더미 뒤에서 벽에 등을 댄 채 양손에 권총을 들고 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포조 대장인 구라다 경부보가 벽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서더미에 권총을 쏘며 고함을 질렀다.
"탕~"
"긴소오교쿠 고산시로(김상옥~ 항복하라~)
그순간 김상옥의 '모제르 7연발'과 '브로니켈 12연발' 권총이 불을 뿜었다.
다른 형사들은 겁을 먹고 마당으로 도망쳐 나갔다.
그리고는 방 안의 벽장을 향해 일제히 총을 쐈다.
형사들이 벽장 안을 벌집으로 만들었으나 김상옥은 이미 그 곳을 빠져나간 후였다.
그는 얇은 널빤지로 된 벽장 뒷벽을 발로 차 부순 후 옆집인 74번지를 지나 72번지로 뛰어들었다.
73번지인 이혜수의 집에서 총을 난사하며 투항을 권유하던 일경은 그제서야 김상옥이 옆집으로 도망간 것을 눈치챘다.
우마노 경기도 경찰부장은 장총으로 무장한 순사들에게 72번지에 집중사격을 하라고 지시했다.
양측간에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어느덧 동편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는 가운데 효제동 일대에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성에 놀란 효제동 주민 수백 명이 경찰이 쳐놓은 통제선 앞까지 몰려나와 초조한 마음으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며칠전 삼판통에서 의열단원이 경찰들을 쏴 죽였다는 소문을 들어 이 총격전이 그 사건과 관계있는 것으로 직감했다.
우마노는 형사대에게 옆집 지붕에 올라가 72번지를 내려다보며 총을 쏘라고 명령했다.
형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순간 김상옥이 기다렸다는듯이 권총을 쏘았다.
"으아악~"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형사 2명이 연이어 총을 맞고 굴러 떨어졌다.
우마노는 이번에는 72번지 앞뒤 양편에서 장총으로 집중 사격하라고 지시했다.
앞뒤에서 쏟아지는 총알에 집주인 이진옥(62세)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지고, 집안에 있던 가재도구와 장독, 유리창이 모두 깨져 나가면서 파편이 마구 튀었다.
온 몸에 파편과 유탄을 맞은 김상옥은 집안 구석에 있는 변소로 피신했다.
이 곳에서 그는 30분간 형사들과 총격전을 계속 벌여나갔다.
◈ 김상옥, 항복을 거부하고 장렬하게 순국하다
세 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한 손은 일경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한 손으로 머리에 권총을 갖다 댔다.
그의 흐릿한 눈앞에 지나간 33년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 지나갔다.
혈기왕성한 20대 초반 '동흥야학'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던 일이며, 영덕철물점을 차려 국산 생활용품을 개발해 보급하던 일이며, 3.1만세운동 직후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을 제작해 뿌리던 일이며, 암살단을 조직해 사이토 총독을 사살하려다 실패한 일이며, 상해에 가서 의열단에 가입해 동지들과 투쟁의 각오를 다지던 추억까지…
김상옥은 모제르 7연발총의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탕~"
권총소리를 듣고 일본 순사들이 일제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김상옥의 시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두 손에 모두 권총을 쥐고 있었고, 죽은 후에도 둘째 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걸고 있었다.
김상옥은 이렇게 장렬하게 순국했다.
일제에게 나라를 뺏긴 후 항일 독립투사가 경성 한복판에서 홀로 천여 명의 무장경찰과 이렇게 오랜 시간 총을 들고 맞서 싸운 경우는 김상옥 의사가 유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