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에 필요한/ 일제 하급 공무원은/ 우선 활용했으나/
악질 친일파로 숙청당한 사람들 많고 많았다/
숙청을 피해/ 38선을 넘은 사람들 많았다/
1946년부터 38선은 생사의 경계였다/
넘어와/ 북의 공산당에 이를 갈았다/
남의 현실에 환멸이었다/
혼란/ 굶주림/ 무직/ 올 데 갈 데 없었다/
안되겠다 뭉쳐보자/
평남 청년회/ 평북 청년회/ 함북 청년회/ 함남 청년회/ 황해 청년회 들 통합/
1946년 11월 30일/ 서북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오직 이승만 박사에게 충성을 바쳤다/
나는 선우기성이 아니라/ 이승만 박사의 손가락이다/
오늘도 이승만의 주먹 두 개를 쥔다/
서북청년회 지도자 선우기성/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 쟁취/ 균등사회 건설/ 세계 평화의 건설/
서북청년회 3대 강령/ 오죽이나 이상적이냐/
자주와/ 평등/ 평화가 오죽이나 이상적이냐/
철저한 반공노선/ 회원 6천명/
첫 투쟁은 좌익단체 습격/
백색테러가 시작되었다/ 유혈낭자/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지원을 받았다/
미군 첩보보조원으로/
38선도 넘나들었다/
김일성 별장도 습격했다/
선우기성/ 점점 살벌해졌다/
인간보다 비인간이 더 치열했다/
38선 이남이 떨어댔다/
모든 도시들/ 모든 촌락들/
선우기성의 밤뿐 아니라/
뭇 사람들 겁먹은 눈에 다 드러나는/
선우기성의 대낮이 벌벌 떨어댔다"
고은 시인이 쓴 시 '선우기성'이다.
6.25전쟁 중에 일가친척들이 대부분 학살당해 겨우 목숨을 구한 고은 시인에게 서북청년회가 공포의 존재였나보다.
선우기성이란 인물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서북청년단의 창설자이자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인물로 백색테러의 지휘자였다.
서북청년회는 해방 후 북한에서 공산당에게 탄압을 받았거나 재산을 뺏기고 남한으로 내려온 이북 5도 출신 청년들이 만든 준군사조직이자 반공단체이다.
이 단체의 회원은 주로 친일파나 지주, 기독교인, 민족주의자로 구성돼 있었다.
고향에서 쫒겨나거나 도망쳐 나온 이들은 공산주의자라면 생리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치를 떨었다.
남하한 후 출신지에 따라 각각 평안청년회, 함북청연회, 황해청년회 등을 구성한 뒤 좌익을 쳐부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몰려갔다.
그들은 늘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좌익이 날뛰는 남한의 현실이 늘 불안했다.
남한마저 공산당이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갖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하나의 단체로 뭉쳤다.
1946년 11월 30일 서울YMCA 강당에서 선우기성을 중앙 집행위원장으로 한 '서북청년회(서청)를 창단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이승만의 보호와 자금 지원을 받게 된 서북청년단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이들이 주로 한 일은 경찰이 할 수 없는 거친 폭력이었다.
독립운동가 김병길 선생은 서청의 만행을 이렇게 회고했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것들이었다.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개나 돼지를 마구 잡아먹었고 항의하면 장독대 항아리며 집안 집기들을 마구 부셨다.
어떤 때는 성냥을 확 그어서 초가지붕에 대고 불을 붙여 가옥을 다 불태우기도 했다.
시골 초가라는 게 지붕이 낮아서 손을 뻗으면 닿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도 없었다.
몽둥이를 질질 끌고 몰려다니다가 그냥 아무나 패고 부수고 불을 질렀다.
몽둥이가 없으면 패놓은 장작으로도 마구 사람을 팼다.
장작으로 패면 각이 지고 표족한 옹이와 가지가 있어 살을 푹푹 파고들었다.
서북청년단원들은 사람을 팰 때 옥상으로 끌고 가서 패면 아무도 모른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당시 옥상이 있는 집은 가장 높은 집이었을 것이고 거기서 패면 소리가 하늘로만 올라가게 되고 하늘에는 소리를 반사해줄 것이 없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도 전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반정부, 반미시위에 가담한 사람이 있는 집안은 서북청년단 만행의 표적이 되었다.
오빠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집의 여동생들은 서북청년단들이 날마다 찾아가서 성폭력을 동반한 온갖 악행을 다 가했다.
어떤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며느리와 자식들을 다 잡아다가 옷을 모두 홀라당 벗겨놓고 할아버지에게 며느리 등을 타고 넘으라는 고문도 가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초주검을 만들었다.
그런 고문을 당한 집안 중에는 대부분 법도를 중시하는 양반가문이었다.
양반가문이 아니더라도 우리 민족의 도덕관념이 얼마나 높은가?
그런 고문을 당한 집안에서는 목을 매고 자살하는 사람도 많이 나왔다.
그래서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에 가담하는 이들도 많았다"
◈ 서북청년단의 만행으로 제주도 4.3사태 불이 붙다
이어 4월 3일 빨치산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서청회원 500명이, 여순사건 직후인 11월과 12월에 최소한 1,000명 이상의 회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 신분으로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이들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서북청년단은 제주도민과 좌익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고 살인과 폭행, 약탈을 저질렀다.
이들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폭력 때문에 좌익 쪽을 택한 제주도민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서청회원들은 정기적인 봉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늘 빈손이었다.
때문에 공권력을 빙자해 뇌물 수수, 공갈, 사기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은 당시 제주도의 유일한 신문인 제주신보까지 장악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했다.
이들은 마을을 점령하면 인간으로 해서는 안될 짓을 많이 했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서로 뺨때리기를 시키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뺨 때리기를 강요했다.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여자들을 겁탈하고 나서는 고구마를 쑤셔대며 히히덕거리기도 했다.
장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 관계를 갖도록 강요하고 총살시켰다.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다.
테러에는 도끼와 방망이는 물론 총기와 폭탄도 사용했다.
제주도에서 서청은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 서북청년회원 안두희와 김성주의 비참한 말로
안두희는 서북청년단원에 가입해 김구 암살을 계획하던 이승만의 측근들을 알게 된다.
결국 안두희는 애국시민 박기서에게 맞아 죽지만 그의 배후인물이었던 서북청년단 부단장 김성주의 최후는 더 비참했다.
김성주는 이승만을 추종하다가 돌아선 인물이다.
그는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재판이 열리자 서북청년단을 이끌고 안두희가 애국충정의 의사라고 외치며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
그러던 김성주가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 조종자들을 비난하고 다닌다는 정보가 이승만 귀에 들어갔다.
대노한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김창룡 특무대장이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에는 김성주가 이승만의 정적인 진보당의 조봉암에게 김구 암살의 배후를 공개해 다음번 대통령선거에 이용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승만은 "이런 자는 그냥 살려둘 수 없다"며 처단을 지시했다.
김성주는 헌병사령부에 연행돼 엉뚱하게 국가반란, 대통령 암살 음모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증거부족으로 혐의가 인정되지 않자, 원용덕 헌병사령관이 자기 집 지하실로 끌고가 죽여버렸다.
악당들과 악당의 한판 승부인 셈이다.
서북청년단은 이후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이 만든 대동청년단에 가입했다가 내분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흐지부지 사라져버렸다.
최근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고 나선 인물들이 이 단체의 추악한 과거의 행적과 주도한 이들의 비참한 최후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