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 저격두고 日,국교단절 갈뻔했다"

육 여사 저격사건 외교문서 공개, 日''과실'' 결론에 "한일기본조약 제고"

74년 문세광의 저격사건을 다뤘던 당시 신문

지난 74년 발생한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과 관련된 외교 문서가 20일 공개됐다.


이 사건의 배후가 북한인지 아닌지를 두고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외교 단절 일보 직전까지 가는 등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과 일본 외교관계 단절 일보직전까지 갈등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 광복절 기념식이 진행 중이던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이 총성소리와 함께 일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권총을 소지한 괴 청년이 연단에서 광복절 기념사를 읽어 내려가던 박정희 전 대통령 방향 등으로 4발의 총을 난사한 끝에 육영수 여사가 희생됐다.

저격범은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됐고 23살의 재일교포 문세광으로 밝혀졌다.

23살재일교포 청년 문세광 총 난사 육영수 여사 희생

한일 양국은 곧바로 이 사건에 대해 수사에 들어갔으나 결론은 큰 차이를 보였다. 먼저 한국측은 이 사건이 조총련이나 북한과 연계됐다고 봤다.

조총련에 포섭된 문세광이 북한공작원으로부터 박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일본인으로 가장해 입국한 뒤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 측은 문세광의 단독범행에 초점을 맞춰 한국 내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박 대통령 암살을 결의하고 범행을 계획, 실행했다고 판단했다.


문세광이 유서를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 등을 계기로 1인 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혁명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죽음이냐 승리냐의 혁명전쟁에 나선다''고 밝혔다며 "그 자신이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세광의 저격은 ''과실살인''이라는 것이 일본측의 결론이었다.

''일본인 위장한 북한공작원''vs''한국 내 혁명 일으키려 한 단독범

이에 따라 한국측은 들끓는 반일감정을 내세우며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다나카(田中) 일본 수상에게 친서를 보내 "한일관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면서 몰아부쳤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 해 8월30일 박 우시로쿠 주한대사를 불러 "문세광 사건을 대하는 일본측의 태도로 우방국 여하를 판단하겠으며 일본 측이 성실한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면 한일간 기본조약도 재고할 수 있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특히 한국측은 그 해 9월 2일 에릭슨 미국 대리대사를 통해 미국 방문을 앞두고 있는 다나카 수상과 기무라 외상에게 한국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까지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본 측은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가 한국 측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세광에 대한 사형 집행을 이유로 사건을 서둘러 종결했다.

저격범 문세광은 128일만인 그 해 12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CBS정치부 권민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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