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학원 가야지 웬 할머니 댁요?"

대치동 등 유명 학원가 추석 연휴 특강… 씁쓸한 명절 풍속도

대치동 학원가 자료사진. 윤성호기자
초등학교 6학년인 백 모(12) 군 남매는 이번 추석 연휴에 지방에 사시는 조부모님 댁을 방문하지 않기로 했다.

추석 연휴인 6일부터 10일까지 학원에서 보강 수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백 군 남매는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영어와 수학 수업을 듣고 있다.

백 군은 "이 주변 학원 중에서 추석에 안 나오는 곳은 거의 없다. 평일처럼 계속 수업을 듣는다"고 말했다.

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그냥 오지 말고 공부하라고 하셨다"며 "추석 연휴지만 놀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백 군의 여동생도 "놀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학원 수업에 익숙해져 있어서 힘들지는 않다"고 말했다.

4일 동안 이어지는 추석 연휴에 10일 대체휴일까지 합하면 총 5일을 쉴 수 있지만, 대치동 등 유명 학원가는 추석 연휴에도 어김없이 붐빌 예정이다.

학원들이 평일에 하지 못한 보강수업을 하거나 대입논술 등 각종 특강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명절 연휴 친척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부모님 댁을 방문하지 않는 등 '인륜'마저 외면하고 '성적 올리기'에 매진해야 한다.


학생들은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지난 4일 대치동 학원가에서 만난 김형철(10) 군은 "추석에도 그냥 똑같이 수업을 한다"며 "할머니 집에 오래 있고 싶고, 신 나게 놀고 싶은데 학원에 나가게 됐다"며 울상을 지었다.

노은진(11) 양은 "빨간 날 중에 하루 정도만 쉰다"면서 "부담감이 크지만, 우리 마음대로 안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생각을 하면 약간 슬퍼진다"고 말했다.

노성은(10) 양도 "추석에 할머니를 보고 싶은데 학원에 가야 하니까...학원들이 빨간 날이 아니라 다른 날 보강수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학부모들은 '공부가 중요한데 어쩔 수 없지 않으냐'는 반응을 보였다.

초등학생 아들의 손을 잡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던 학부모 배 모(41·여) 씨는 "이쪽 엄마들은 학교는 빠져도 되는데 학원 보강을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크다"면서 "보강을 밀리게 되면 아이도 힘들고 엄마들도 힘들다"며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중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송 모(50·여) 씨는 "학원들이 단체로 휴강하면 몰라도 어쩔 수 없다. 안쓰럽기도 하고 차라리 학원들이 단체로 다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러한 명절 풍속도 때문에 조부모들이 자녀와 손자 손녀를 만나러 역귀성 하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 됐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만난 한 학부모는 "요즘은 공부가 워낙 중요하니까 시부모님들이 많이들 이해하신다. 다른 엄마들의 경우도 그렇다"고 설명했다.

책이 가득 담긴 캐리어를 끌고 학원에 가던 김 모(8) 군은 "명절이면 항상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신다"면서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교육희망네트워크 권혜진 집행위원장은 "공동체가 합의한 쉼, 여유 등이 학생들에게 사치가 되는 현실은 사회적 합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권혜진 위원장은 "명절의 가치 등을 학습할 중요한 시간에 (학원을 감으로써)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자꾸 줄어들면 가정 공동체가 깨질 수 있다는 우려가 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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